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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랑의 고전소통] [人物論] 나는 여자다, 그러나 군주요 황제다
이정랑 | 2020-04-09 09:10:53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무측천 武則天】 치밀한 준비로 중국의 유일한 여황제가 되다 (中)

개혁의 채찍이 안 통하면 비수를 들이대 혁신을 꾀했던 대담한 여걸!

때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무측천에게 결정적인 기회가 찾아왔다. 서기 654년, 무측천이 딸을 낳자 황후는 무측천의 처소를 찾아 아이를 보고 갔다. 황후가 다녀간 후 고종이 올 것이라는 소식을 들은 무측천은 천재일우의 기회라고 판단하고 강보에 싸인 아기의 목을 졸랐다. 그런 다음 아기의 몸에 이불을 덮어놓고 밖으로 나가 고종을 맞이했다.

고종은 이불을 들어서 아기를 품에 안는 순간, 아기가 죽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무측천은 몹시 놀라는 척하면서 통곡하기 시작했다. 고종이 다급해진 표정으로 좌우의 시종들에게 물으니 방금 황후가 다녀갔다고 했다. 황후의 소행이라고 생각한 고종은 분노를 금치 못했고, 무측천은 이를 기회로 삼아 황후의 갖가지 과실을 고종에게 일러바쳤다. 마침내 고종은 황후를 폐하고 무측천을 황후로 세웠다.

당시의 상황에서 무측천에게는 딸의 시신을 발판으로 삼는 것만이 황후를 제압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하지만 이것으로 모든 일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무측천은 이전에 먼저 황후를 지지하던 유상을 사직시킨 데 이어 차례로 주요 대신들을 제압하려 했지만 여의치 않자 중서사인 이의부(李義府)와 왕덕검(王德儉), 어사대부 최의현(崔義玄), 어사중승 원공유(袁公瑜), 허경종(許敬宗) 등 한문서족(寒門庶族)출신으로 뜻을 펴지 못한 관료들에게서 자신의 지지 세력을 찾기로 마음먹었다. 조정 내에서 일부 대신들의 지지를 받기 시작한 무측천은 강경노선을 달리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이의부가 상소를 올려 황후를 폐하고 무측천을 새 황후로 세울 것을 요구했다. 고종 영휘(永徽) 6년(655) 8월, 고종이 정식으로 황후를 폐하는 문제를 제기하자 장손무기 일파는 결사적으로 반대하고 나섰고 저수량 등도 간언을 올려 기어이 황후를 폐한다면 새 황후는 명문가 출신을 맞아 들어야지 무측천같이 미천한 가문의 여인을 맞아선 안 된다고 주장하면서 달기(妲己)나 포사(褒姒) 같은 나라를 망친 요녀들을 전례로 들었다.

재상들 가운데 유일하게 이의(李義)만이 이충을 태자로 세우는 일에 참여하지 않고 미지근한 태도로 말했다.
“이는 폐하의 집안일에 불과한데 외부 사람들이 나서서 왈가왈부할 까닭이 어디 있단 말이오?”

결국은 9월에 저수량이 조정에서 물러나면서 10월에는 황후를 서인으로 폐하고 무측천을 황후로 책봉했다. 11월에는 이의가 나서서 황후책봉 전례를 거행했고 이듬해에는 태자 이충이 양왕(梁王)으로 폄하되고 무측천의 아들 이홍(李弘)이 태자가 되었다.

황후가 되는 데 성공한 무측천의 다음 목표는 권력 장악이었다. 가장 시급한 일은 폐위된 황후를 보위하던 일당을 철저히 제거하는 것이었다. 황후의 소속비를 냉궁에 가둬 죽인 무측천은 저수량을 애주에서 죽게 했고, 장손무기를 자살하게 했으며, 유상을 상주에서 죽게 했다. 이들의 친족들도 대부분 주살되거나 관직에서 배척되었다. 서기 659년, 마침내 장손무기의 권력 집단은 완전히 와해 되어 정권은 중궁에 귀속되었다.

고종은 성격이 유약했을 뿐 아니라 몸도 건강하지 못해 항상 잔병에 시달렸기 때문에 정사는 대부분 무측천의 손에 의해 이루어졌다. 현경(顯慶) 연간에는 고종과 더불어 ‘이성(二聖)’이라 칭해지며, 황제와 동등한 권력을 행사했다. 하지만 그녀가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면서 많은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무측천이 전횡을 부리는 바람에 고종의 수권이 제한을 받게 되었고 그녀의 태도 역시 눈에 띄게 오만방자해 졌다.

그러자 고종은 재상 상관의(上官儀)에게 무측천을 서인으로 폐위시키라는 조서를 내렸다. 하지만 일찌감치 상관의의 신변에 심복을 배치해 두었던 무측천은 이런 소식을 전해 듣고는 황급히 고종을 찾아가 자신의 모든 행동이 고종에 대한 애정에서 비롯된 것이라며 달콤한 말로 설득했다. 심약한 고종은 자신은 원래 그럴 생각이 없었으나 상관의가 주장한 일이라고 둘러댔다. 이에 무측천은 사람을 시켜 상관의가 이전에 태자 이충과 더불어 모반을 계획했었다고 무고하도록 사주하여 상관의와 상관정지(上官庭芝) 부자를 처형하고 그의 아내와 딸을 궁중의 노예로 귀속시켰다. 이충도 검주에서 살해되었다.

그 후 고종은 더욱더 무측천에게 의지하게 되었고 궁중 회의를 그녀가 주재하도록 했다. 이제 관료의 임용은 물론, 생사여탈의 권한까지 중궁전에 귀속되어 황제인 고종은 무측천의 꼭두각시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

서기 674년 8월부터는 황제를 ‘천황(天皇)’ 이라 부르고 황후를 ‘천후(天后)’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무측천이 황후가 된 17년, 무측천의 완전한 승리였다. 이는 그녀 인생의 승리였을 뿐 아니라 역사의 전환을 의미했다. 한문서족 출신의 신흥세력이 권력을 잡고 마침내 역사의 무대에 우뚝 서게 된 것이다.

황후와 장손무기 등이 100여 년 동안 유지되어온 문벌귀족 지주계급의 부곡전객제(部曲佃客制)가 경제를 대표했다면 무측천과 이의 등은 신진 한문서족 지주계급을 중심으로 하는 계약전농제(契約佃農制)가 경제를 대표한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무측천의 승리는 서족지주계급의 급격한 부상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이는 위진 이후 4백여 년 동안 계속되었던 문벌귀족 정권의 종말인 동시에 신흥 지주계급의 점진적인 권력 장악을 의미했다. 또 이는 사상해방과 생산력 발전, 그리고 중국 역사의 발전에도 매우 긍정적인 변화를 가져다주었다.

무측천은 정치적 기백을 십분 휘둘러 ‘천후’라 불리기 시작한 지 4개월 만에 고종에게 열두 가지 정책을 건의했다. 그 정책의 내용은 그녀가 당대 사회에 대한 장기적이고 세밀한 관찰과 연구 결과를 기초로 하고 있는데, 여기에는 상농의 권장과 부역의 경감 등 중요한 조치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문벌귀족들을 철저히 제거하는 동시에 과거의 울분을 풀기 위해 『성씨록 姓氏錄』을 편찬하여 태종이 만들었던 『씨족지』를 대신하기도 했다. 이때 무측천은 『성씨록』에 황후의 성씨를 맨 위에 기록하게 하고 당시의 관직에 따라 5품 이상의 관원들을 아홉 등급으로 나누어 열거하면서 이를 사류(士流)로, 구분했다. 이리하여 한문서족 지주계급 출신이 대거 상류계급으로 대두하면서 정치, 경제, 문화에 활기를 불어넣었고, 이는 사회발전에도 긍정적인 기능을 했다.

기득권을 빼앗긴 문벌귀족들은 무측천의 처사에 크게 불만을 품고 『성씨록』은 귀족의 족지(族誌)가 아니라 군공을 가리기 위한 ‘훈격(勛格)’에 불과하다고 비아냥거렸다.

그러나 무측천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모든 행정력을 동원하여 과거에 배포됐던 『씨족지』를 전부 회수하고 『성씨록』을 보급함으로써 사회의 기풍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고종의 병세는 더욱 나빠졌다. 그는 일찌감치 황위를 태자 이홍에게 물려주려 했다. 이홍은 성품이 인자하고 신중한 데다가 정치적 재능도 뛰어나 고종의 총애를 받았다. 하지만 무측천은 이홍을 좋아하지 않았다.

한번은 이홍이 궁중에서 소속비의 소생인 두 누이가 서른이 넘도록 유폐된 생활을 하는 것을 발견하고는 이들을 출가시키자는 주청을 올렸다가 무측천의 눈 밖에 나고 말았다. 사실 이홍이 무측천의 미움을 사게 된 근본적인 원인은 그가 친아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권력 쟁탈의 경쟁자였기 때문이다. 끝내 무측천은 독이 든 약을 먹여 이홍을 죽이기에 이르렀다. 이홍은 몸에 난 구멍마다 피를 쏟으며 비참하게 죽었다.

이홍이 죽자 무측천의 둘째 아들 이현(李賢)이 태자의 자리에 올랐다. 이홍의 죽음에 큰 충격을 받은 고종은 병세가 더욱 악화되어 도저히 정무를 살필 수 없게 되자 황위를 태자에게 넘기려 했다. 이에 무측천이 결사적으로 반대하고 나섰다. 그 후 무측천은 이현이 자신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자 이현을 서인으로 폐하고 경사에 유폐시킨 다음, 셋째 아들 이현(李顯)에게 태자의 자리를 잇게 했다.

서기 683년, 마침내 고종이 죽자 태자 이현이 중종(中宗)으로 즉위했고 무측천은 황태후의 신분으로 모든 제도를 관장했다.

한번은 중종이 장인인 위현정(韋玄貞)을 재상으로 앉히고 유모와 아들에게 5품의 관직을 하사하려 하자 재상 배염(裵炎)이 이를 부당하게 여겨 저지하려 했다. 그러자 나이 어린 중종은 화를 내면서 “천하를 위현정에게 준다 한들 겁날 게 무엇이란 말인가!”라며 호통을 쳤다.

이에 두려움을 느낀 배염이 무측천에게 이 사실을 고하자 무측천은 중종을 노릉왕(盧陵王)으로 폐하고 넷째 아들 예왕(豫王) 이단(李旦)을 예종으로 세웠다. 그러나 예종은 경사에 있지 않았기 때문에 정사에 참여할 수 없었다. 이와 동시에 무측천은 사람을 보내 폐위된 이현을 죽게 함으로써 신변의 모든 장애 세력을 제거하고 칭제(稱帝)를 서둘렀다. 당의 종실들은 무측천이 이씨 종실의 씨를 말릴 것이라며 두려움에 떨면서 전국에서 기병하기 시작했다.

이정랑 언론인(중국고전 연구가,칼럼리스트)

경인일보/호남매일/한서일보/의정뉴스/메스컴신문/노인신문/시정일보/조선일보/서울일보 기자, 편집국장, 논설실장 등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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