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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위안부가 있었던 시대 - 3회
복선伏線, 전쟁의 그림자
김종익 | 2019-10-15 14:55:24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이 글은, 침략자 일본이 식민지에 이식한 매춘 제도의 민 낯을 드러내며, 이 악습이 일본군 위안부 제도에 어떻게 작용했는가를 고발한다.

결국 식민지(조선, 중국, 타이완)에서 ‘자본주의적 기업 경영’의 일종으로 매춘업을 영위했던 일본인들이 일본군 ‘위안부’ 제도를 지탱시킨 근간이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 역자 주

위안부가 있었던 시대 3
- 복선伏線, 전쟁의 그림자 -

사토 쥰佐藤純
1965년생. 아사히신문 기자. 오사카경제법과대학 아시아 태평양연구센터 객원 연구원.
이 연재는 2016~2018년 아사히신문 휴직 중에 한 조사를 바탕으로 쓴 글이다.

※ 글 가운데 (  )는 필자의, [  ]는 역자의 주석입니다.

이전 회는, 구일본군의 위안부 제도 배경에 있었던 일본 현지의 매매춘 구조와 실태가, 기만과 범죄투성이로 여성의 인권을 짓밟는 것임을, 내무성과 경찰 자료 등을 통해 밝혔다. 이번 회는, 전쟁을 배경으로 한 공창 제도 존속 움직임을 살펴본 다음, 일본이 군사력을 배경으로 세력을 확대한 동아시아에서 만연한 매매춘 상황에 주목한다.

■ 전쟁을 내세운 공창 존속 주장

1935년 2월 18~19일, 공창 제도하의 매춘업자 단체인 전국유곽연합회가 도쿄·아오야마靑山에서 임시 대회를 열고, 전국에서 약 2,500명이 모였다. 공창 제도 폐지 여론이 높아지고, 내무성이 머지않아 공창 폐지를 결단한다는 관측이 확산되고 있었다. 위기감을 느낀 업자들이 반전 공세를 위해 연 궐기 집회였다. 주1)

연합회 본부가 정리한 『전국유곽연합회 임시 대회 기록』에 흥미 깊은 발언이 다수 수록되어 있다. 대회 첫날, 업자들은 메이지신궁에 참배하고 대회장에 집결했다. 회장인 아시이고사부로淺井幸三郞(도쿄 品川組合)는, 공창 제도가 폐지되면, “전국에 50만 명 이상의 실업자가 생긴다”고 호소했다. 부회장 기노 마사토시木野正俊(오사카시 松島組合)는, 내무성이 검토하고 있는 공창 제도 폐지는 사창으로의 전환을 재촉하는 데 지나지 않는다고 비난하며, “일본의 국체國體에 합치하는 것이련만”이라며 존속을 호소했다. 일본 현지의 유곽업자, 소개업자 조합에 가입하고 있던, 일본 영토였던 조선, 타이완, 사할린의 유곽업자 조합이 축전을 보냈다. 일본 현지의 동향은 이들 지역의 동업자들에게도 관심사였으리라.

이틀째는 내빈인 중의원 의원 가와시마 쇼지로川島正次郞, 후나다 나카船田中, 오노 반보쿠大野伴睦 등이 잇달아 등단하여, 기세를 올렸다. 전후 자민당의 실력자가 되어 가는 정치가들에 가담하여, 야마가타山形현 선출직 중의원 의원이 된, 다카하시 구마지로高橋熊次郞가 연설했다. 전후, 야마가타현 가미노야마上山 시장을 역임하는 인물이다. 다카하시는 공창 제도를 폐지할 경우, 풍기, 위생 문제가 염려된다고 하며, “제일 먼저 군대를 어떻게 할 것인가 (생략) 우리는 상하이에 간 해병대에 성병이 만연한다고 듣고 있다”고 토로했다.

연재 첫 회에서 언급했듯이, 육군은, 1932년 제1차 상하이 사변 때, 성병과 강간을 방지할 목적으로 공창 제도를 모방한 대책을 검토하고, 해군을 따라 처음 위안소를 설치했다. 다카하시는, 전쟁터의 군인들을 성병에서 지키기 위해 일본 현지의 공창 제도를 존속시켜야 한다고 호소한 거라고 해석된다. 

효고현 선출직 중의원 나카이 가즈오中井一夫는, 사창의 여성에게 매춘을 시키고 있는 업자를 공격의 대상으로 삼았다. “그들이 사는 집 입구에는 험악하다고 할 정도의 깡패가 곤봉을 들고 서서, 그렇게[매춘을] 하게 시키고 있는 것은 아닌가. 어디에 아가씨들의 자유가 있는가”라고 토로하며, 여성들이 강제적으로 매춘을 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래서 공창 제도를 없애지 말라는 것이다. 바로 앞의 연재에서 소개한 나가사키현 경찰부의 후지오카 후미오藤岡章男가 유곽업자와 야쿠자의 결탁을 지적하며 공창 제도 폐지를 호소한 것과 대조적이다.

의원들에 이어서, 일본부인갱생회 회장 고지마 미쓰에小島光枝가 등단하여, “공창은 우리나라 국체에 입각하여 신의 권위하에 제정된 제도이다”라고 호소했다. 해군성 관계자에게 로비하여 은밀히 협력할 약속을 얻어낸 이야기도 공개했다.

업자들 가운데 100명이 도쿄에 남아서, 다음 날부터 내무, 문부, 육군, 해군 등 각 성, 귀족원, 중의원, 각 정당 등에 진정을 거듭하며, 제도 존속을 구하는 청원을 제국의회에 냈다. 지원하는 의원들은 제도의 근거를 내무성령 「창기단속규칙」으로 격상하는 법안을 제출했다. 3월 위원회 심의에서, 다카하시 구마지로가 공창 제도 존속을 요구하는 맥락 안으로 발을 들여놓은 발언을 한다.

육군 당국, 해군 당국은, 파견 출정 군인들이 이런 성병들 때문에 시달리지 않을 것이라고, 혹은 풍기를 유지하는 데, 어떤 고심을 하시고, 어떤 수단을 취하고 계시는가는, 당국이 잘 아실 겁니다.   

이 발언은 정식으로 제국의회 의사록에도 수록되어 있다.주2) 상하이만이 아니라, 중국 동북 지방에서도 위안소가 만들어져 있었다.주3) 나아가 군은 병사들의 성병 대책으로 조제약과 콘돔 배포, 매춘 여성에 대한 성병 검사 등을 행하고 있었다. 다카하시는 이러한 사정을 알고 있는데 더해, 이들 대책을 지원하기 위한 공창 제도가 필요하다고 호소했을 가능성이 있지만, 역시 기록만으로는 발언의 진의나 배경은 파악할 수 없다. 다카하시는, 여성에 매춘을 시키기 위한 국제적인 인신매매를 규제하는 조약에서 탈퇴하는 것까지 주장한다. 이 조약에 관해서는 다른 기회에 다룬다.

적어도 공창 제도를 존속시키기 위해, 업자의 모임에서 국체가 제기되고, 제국의회라는 공적 장에서는, 군이나 전쟁이 증인으로 소환되어, 인도적 차원의 국제적 대처에 등을 돌리는 말이 반복된 사실이, 「대회 기록」에서 간파할 수 있다. 이러한 의논 끝에, 존속이 위태로워져 있었던 공창 제도가 살아남는다는 흐름이 된다. 이 흐름의 물밑 움직임은 좀 더 심도 있게 규명을 시도할 가치가 있을 것이다.

평론가 간자키 기요시神崎淸는 전후 저서에서, 임시 대회에 참가한 업자들이, “메이지신궁에 참배해 ‘업계의 안정’을 기원하고, 궁성을 향해 절을 하며, 천황 폐하 만세를 삼창했다”고 적고 나서, “이 사실은 한결같이 인간적 자유의 억압을 미화하고 있던 점에서, 절대적 천황제와 노예적 공창 제도의 숨은 관계를 생각하게 하는 점이 있다. 칙어라든가 국체라든가를 들고 나오면, 어떤 무리無理든 통하는 세상이었다”고 회고한다.주4)

대회 첫날인 1935년 2월 18일, 제국의회 귀족원에서 기쿠치 다케오菊池武夫가 미노베 다쓰키치美濃部達吉의 천황 기관설을 공격했다.주5) 천황과 국체, 군의 존재를 내세우는 목소리가 한층 커지게 되어, 역사의 톱니바퀴가 파멸을 향해 한걸음 움직였던 것인지도 모른다.

■ 조선에서도 인권 침해

메이지 이후, 일본은 주변에 세력을 확대하고, 군인과 상인 진출에 수반하여 매춘업자와 여성이 뒤따르고, 일본 현지의 매매춘 구조가 유입되어, 현지 여성들도 끌어넣는다. 일본 현지와 마찬가지로, 혹은 보다 심각한 상황이 각지에서 발생했다.주6) 예를 들면 조선에서는, 1910년 병합 전부터, 부산과 서울의 영사관이 규칙을 정해 일본인에 의한 매춘을 관리했다. 병합 후인 1916년, 조선 전역을 대상으로, 일본 현지의 제도를 답습한 「유곽창기단속규칙」, 「기생작부포주업단속규칙」 등을 시행했다. 주7)

조선총독부 간부가 임원으로 이름을 올린 재단법인 「조선경찰협회」가 경찰관용으로 발행한 월간지 『경찰 휘보彙報』는, 1933년 7월 ~1934년 11월, 9회의 연재기사 「공창제도 및 기생과 창기 자유 폐업에 관한 약간의 고찰 자료」를 게재했다.주8) 필자는 총독부 경찰관 강습소 교수 마스다 미치요시增田道義이다. 그는 도쿄대를 나와 경시청 등을 거쳐 조선으로 건너가서, 강습소에서 경찰관 교육을 담당하고 있었다.

마스다는 연재 첫머리에, 자신은 성 풍속을 상세하게 알지 못한다고 미리 밝힌 다음, 일본 현지와 조선의 공창 제도에 관한 신문·잡지의 기사, 전문가의 저서 등을 다수 소개하고, 일선 경찰관들로부터 자료 제공을 받은 것을 밝히고, 경찰·사법 관계자 간에 오가는 이야기를 포함시키고 있다. 공식적인 정보만이 아니라, 내부 정보에 근거해 썼다고 생각된다.

마스다는 1933년 5월 일본 현지에서 창기의 외출 자유화를 계기로 연재하는 것이라고 쓰고 있는데, 그 내용은 창기의 인권 유린 실례, 제도와 실태의 괴리, 폐지론과 존속론, 포주와 창기 측이 맺는 계약의 문제점, 창기와 기생의 폐업의 어려움 등으로 다루는 폭이 넓다. 전회에서 언급한 내무성 사무관 고스게 요시지小菅方次의 논문을 획기적이라고 평가하며, “버려야 할 인신매매 노예제도의 한시라도 빠른 절멸이 이루어지기를 바란다”고 자신의 입장을 명확히 밝히고 있다.

특히 창기가 폐업하려고 한 경우, 업자와의 사이에 끼어든 경찰이 업자 입장에 서서, 폐업하기 어렵게 만들고 있는 경향이 있는 점을 반복해 지적하며, “유곽영업자의 앞잡이 비슷하다고 비난받아도 불평은 없을 것이다”라고 비판했다. 고스게도 논문 속에서 일본 현지 경찰의 이러한 업자 편에 선 대응을 비판하고 있으며, 매춘업자와 경찰의 친밀은 공통의 구조적 문제였던 것을 알 수 있다.

마스다는 단속 당국의 자세에 더욱 치고 들어간다.

필자가 전에 모처에 근무할 때, 사법회의 석상에서 어떤 사법주임이 “유괴죄 등으로 엄중하게 검거한다면 한이 없다. 유곽은 찌그러들지도 모른다. ○○인人 창기의 대부분은 ○○성省 근처에서 유괴되어 온 것이다”라고 거리낌 없이 말한 것을 기억하고 있다(생략) 조선의 어떤 지방에서는, 임시 허가라고 칭하며 법에서 정한 조사도 완료하지 않고 매춘업을 허가하고 있는 듯한 편의 수단을 아직껏 강구하고 있다. 이것은 관청 스스로가 유곽창기단속규칙을 파훼하고 있는 것이다.

마스다의 경력에 비춰보면, 앞부분의 체험담은, 일본이 노일전쟁에 이겨서 조차권租借權을 획득한 중국 랴오둥遼東반도에 둔 관동청關東廳[요동 반도 남부에 있던 일본 조차지의 통치기관]에 재직했던 무렵의 일이라고 생각된다. 나중에 만주사변을 계기로 일본이 수립한 괴뢰국가인 만주국의 일부가 되는 지역이다.

연재 속에서, 마스다는 나아가 유곽업자가, 많은 조선인 창기가 가난한 가정 출신으로 글자를 읽지 못하고, 계산도 할 수 없는 점을 역으로 이용하여, 아무리 일해도 빚의 잔고가 줄지 않도록 경리를 조작하여 계속 일하게 하는 부정이 횡행하고 있는 점과, 많은 업자들이 고리대금업자에게 돈을 빌리고 있는 업계의 구조를 지적했다. 현행 제도 그대로도, 하려고 하면, 창기들을 “노예 상태에서 구출할 수 있는 것은 아닐까”라고 토로하며, 경찰의 운용이 미온적인 것도 도마에 올린다.

그 후, 마스다는 경성법학전문학교 교장을 지내고, 전후는 일본에서 변호사가 되었다. 교장 시절은 황민화 교육에 열심이었다고 한다.주9) 연재 속에서도, 마스다는 일본 현지에 비해 조선 창기의 대우 개선이 지체되고 있는 점을 언급하지만, 식민지 지배 그 자체를 문제 삼는 관점은 보이지 않는다. 군인의 매춘에 대해서도, 성병 대책 관점에서 쓴 일본 현지의 논문을 매우 간단히 언급하는 정도이고, 전혀라고 해도 좋을 만큼 언급하고 있지 않다.

『경찰 휘보』는 이 밖에도 공창 제도를 비롯한 매춘에 관한 논문을 잇달아 게재했다.   

1935년 2월의 다카기 다케사부로高木武三郞의 논문 「공창 폐지·사창 박멸·결혼 장려」는, “공창은 드디어 자본주의 경제의 한 부분으로 완전한 노예제도가 되고 말았다”고 지적했다. 1934년 10월에 일본 현지 도쿄부사회사업협회가 발행한 잡지 『사회복리』의 기사를 옮긴 것이다. 전회에서 소개한 1935년 7, 8월의 『경찰협회잡지』에 연재된 내무성 사회국 사무관 다케시마 가즈요시武島一義의 「자녀 인신매매 방지와 경찰」도, 매춘을 강요당하는 여성들의 인신매매를 고발한 논문이었는데, 『경찰 휘보』는 9월에 한 번에 정리해 게재하고 있다.

1935년 4월, 조선총독부가 개최한 각 도 경찰부장 회의에 즈음하여, 각지의 경찰에게, 범죄에 손을 담고 있는 소개업자의 단속 강화와 매춘을 강제당하고 있는 여성들의 처우 개선, 공창 제도 폐지 호소가 들어왔다.주10) 마스다의 엄밀한 논조의 연재가 허용된 것과 견주어 생각하면, 조선 경찰 안에서 1933~1935년에 공창 제도를 중심으로 하는 매춘 문제에 몰두하는 기운이 고조되고 있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다만, 이 무렵을 경계로, 현상을 비판적으로 다루는 기사는 『경찰 휘보』에서 눈에 띄지 않게 된다. 일본 현지에서 경시청 직원들의 자경회가 내고 있던 『자경』에도 공통되는 경향이다.

■ 실태를 파악하고 있던 외무성

외무성은 늦어도 1890년대까지는 악덕업자가 일본 현지에서 여성을 감언으로 꾀어내 매춘을 강제하거나, 팔아먹거나, 여성의 직업을 속여서 국외로 끌고나가 매춘을 시키거나 하는 것을 파악하고 있었다. 주11)

타이에 있는 일본공사관의 시라이 기사부로白井義三郞는, 1906년 7월의 『경찰협회잡지』에 아시아 각지에 일본인 매춘 여성이 있고, 홍콩과 싱가포르에서 매매되고 있다, 국내에 있는 우두머리들이 부하를 시켜 여성을 모지門司나 나가사키 등지에서 밀항시켜 부당하게 이익을 올리고 있다고 폭로하며, 소개업자 단속 강화를 호소했다. 주12) 중국 산터우汕頭[광둥성 동북부 항구 도시] 주재 영사 도쿠마루德丸는 1909년 1월, 외무대신 고무라 쥬타로小村壽太郞 앞으로, 홍콩의 일본인 매춘 여성 가운데 많은 수는 국내에서 유괴되어 온 자들로, 포주의 학대를 견딜 수 없어 도주하는 경우가 자주 발생한다고 보고하고 있다. 주13)

외무성은, 일본인 여성이 외국에서 매춘하는 것을, 국가의 체면상, 못마땅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주14) 이러한 자세는, 연재 첫 회에서 소개했던, 중일전쟁 초기에 일본인 위안부의 중국 송출에 이의를 제기한 외무성 다바타田畑에게도 통한다. 한편, 여성 보호, 구제라는 관점은 뒷전으로 내몰리고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 후인 1920년에 발족한 국제 연맹하에서, 1921년에 「부인 및 아동 매매 금지에 관한 국제조약」이 체결되었다. 매춘을 시키기 위해 스물한 살 미만의 여성을 고용하거나, 꾀어내거나 한 자를 여성 본인이 승낙했더라도 처벌한다, 마찬가지로 성년 여성을 강제적으로 고용하거나, 꾀어내거나 한 자를 처벌한다는 내용이었다. 일본 정부는, 연령 제한을 유보하고, 또 식민지에 적용하지 않는 조건으로 조인했다. 주15)

연령을 유보한 것은, 18~20살의 여성이 창기가 되는 것을 인정한 일본 현지의 창기단속규칙과의 모순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매춘을 둘러싼 대응에 일본 현지와 식민지에 차등을 두는 것은, 후술하는 1930년대 외무성의 자세에도 드러나고 있다.

국제 연맹은, 아시아에서 매춘 여성의 인신매매를 조사하기 위해, 1930년 5월 조사위원회 파견을 결정했다. 위원들의 내방에 앞서서, 외무대신 시데하라 기쥬로幣原喜重郞는 각지의 총영사와 영사에게 관내의 매춘 상황을 보고하도록 지시했다. 주16) 총영사와 영사들로부터 받은 보고는, 조사의 정도와 용어 사용 방식 등에 차이가 있었지만, 이 시기 각지의 개요를 알 수 있는 자료이다.

많은 총영사관·영사관이, 각각 일본 현지 같은 규칙을 정하여, 일본인 업자와 여성들을 단속하고 있는 사실을 보고했다. 중국에 있던 스물두 개 영사관의 보고를 단순히 합계하는 것만으로, 매춘에 관계하고 있던 일본인, 조선인, 타이완인 여성은 3,600명을 상회한다. 다만, 영사관 등이 파악할 수 없는 여성들이 있었다고 볼 수 있어서, 하나의 어림짐작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지역별로는, 펑톈奉天이 720명으로 가장 많고, 상하이 712명, 칭다오靑島 540명으로 이어진다. 민족별 내역을 표시한 바로는, 중국 동북 지방의 치치하얼에 조선인 27명에 비해 일본인 1명, 타이완 건너편에 있는 샤먼廈門에 타이완인 115명, 일본인 7명으로 되어 있으며, 지역에 따라 여성의 출신지에 특징이 있다.

적어도 6개 영사관이 조선과 타이완 출신 여성에 대한 업자의 범죄적 행위를 보고하고 있었다.

펑톈
[조선인 매춘 여성이] 때때로 조선인 무뢰한에 의해 유괴된 결과, 본업을 하게 되는 데 이른 것을 발견하는 일이 있다.

샤먼
탐욕 또는 빈궁한 [타이완인] 포주는 매춘부에게 손님을 강요하는 일이 있다. 요즘 학대 등 문제가 발생하는 일이 있다.

상하이
조선인 사창에는, 조선인에게 유괴된 결과, 매춘업을 하는 데 이른 사례가 있기도 하다.

영사관 등에 의한 단속은, 업자와 여성 양쪽을 규제하는 한편, 여성을 혹사시켜 착취하는 업자를 견제하는 효과가 있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샤먼은 이 시점에서, “타이완인 매춘부에 대해서는, 종래 일본 현지인 매춘부처럼 적극적 단속을 행하지 않고, 방임 상태”라고 밝히고 있다. 샤먼에서는, 타인완인 여성의 경우 장사를 시작하면 4개월 이상 계속할 의무가 있었다. 명분이기는 해도 폐업의 자유가 인정되고 있었던 일본 현지에 비해, 여성의 자유도는 낮았다.

각 영사관의 보고는 일본 현지 출신 여성에 관해 대체로 문제가 없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그 가운데, 칭다오는, “조금도 불법으로 장사를 하는, 부녀의 인신을 구속하는 듯한 일은 없다”고 단언하면서, 인신매매에서 사들인 여성을, “노예처럼 부리는 구습에서 탈각할 수 없는 악질 포주가 전혀 없다고는 말할 수 없다”고 모순된 보고를 보냈다.

국가의 체면이 걸렸다는 따위로, 일본 여성이 창기라고 내세우는 것을 허용하지 않고, 기생, 작부 등으로 하여금 매춘을 하는 것을 인정하는 영사관이 한커우漢口, 톈진, 상하이 등 아홉 곳이었다.

칭다오는 손님 가운데 일본 해군인 군인이 있는 것을 보고하고, 상하이는 일본을 포함한 여러 나라 군인이 다수 있어 매춘 여성에 대한 수요가 크다는 점을 전하고 있다. 연재 첫 회에서 보았듯이, 1932년 제1차 상하이 사변 때, 일본 육군이 상하이에 만든 위안소에는, 나가사키, 평양과 함께 칭다오에서, 모두 160명의 일본인, 조선인, 중국인 여성들이 송출되고 있다.

스물두 개 영사관이 보고한 중국인 매춘 여성은 합계 6만 명을 넘는다. 중국 측 관헌의 감독 아래 있는 여성, 일본 영사관 등의 감독 아래 있는 여성 외에, 어느 쪽 당국의 눈도 미치기 어려운 여성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된다. 열여덟 개 영사관이 중국인 여성에 대한 부당한 처우를 보고하고, 그 가운데 열 개 영사관은 유괴와 상해 행위가 있다고 보고한다. 전쟁 시대로 돌입하기 직전의 중국에서 매춘을 하게 되는 중국인 여성들이 매우 비참한 상황에 처해 있었던 것을, 일본 외무성이 알고 있는 것을 파악해 두고 싶다.

국제 연맹 조사위원회 멤버들은 1930~1931년에 중국과 일본 등지를 방문하여, 정부기관과 공창 폐지를 요구하는 단체 등으로부터 의견 청취를 거듭했다. 영사관 등에서 한 보고로 각지의 상황을 파악하고 있던 일본 정부는, 만반의 준비를 하고, 위원들을 맞이했다. 오노자와 아카네小野沢あかね[릿쿄立教 대학 교수. 저서에 『근대 일본 사회와 공창 제도 - 민중사와 국제 관계사의 관점에서近代日本社会と公娼制度--民衆史と国際関係史の視点から』가 있다]는, 외교 기록을 상세하게 독해하여, 일본 측이 질문에 정면으로 답하지 않고, 얼버무리며, 실태의 은폐를 기도하고, 불성실한 대응으로 시종한 사실을 밝히고 있다.주17)

국제 연맹 이사회는 1933년 1월, 조사위원회가 제출한 보고서를 승인했다. 주18) 일본 정부의 은폐 방침에도 불구하고, 보고서는, 조선에서 중국 동북 지방으로, 일본 현지에서 동북 지방을 포함한 중국과 조선으로의 매춘 여성 매매가 있다고 인정하고, 일본과 목적지에 있는 공인 기루가 이러한 인신매매의 토대가 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타이완에서 샤먼으로의 매매도 명기되었다. 또한 여성이 폐업하려고 하면 경찰이 개입하여, 결과적으로 여성이 기루로 되돌아가는 일이 있다고 지적했다.

이 보고서에 대해 심의할 국제 연맹의 위원회가 1933년 4월에 제네바에서 열렸다. 주19) 만주국 문제를 둘러싸고 고립되어, 연맹에 탈퇴를 통고한 일본 정부는, 문화, 평화 등의 주제에 대해서는 협력을 계속할 자세를 취하며, 이 위원회에도 대표를 보냈다. 일본 정부의 대표 세 명 속에, 내무성 사무관 고스게 요시지小菅方次가 포함되어 있었다. 연재 2회에서 다뤘던 1932~1933년의 『경찰협회잡지』의 논문에서, 공창 제도 문제점을 고발하고, 제도 폐지의 방향성을 강하게 주장한 인물이다.

일본 측은 보고서에 자세히 반론했다. 예를 들면, 여성이 폐업하려고 한 경우의 경찰 개입에 대해, “최근 수십 년 동안 완전히 근절한 사실을 공개적으로 밝힌다”고 주장했다. 고스게가 『경찰협회잡지』 논문에서 경찰 개입이 계속되고 있다고 폭로한 것과 정반대의 내용이다. 고스게는 어떤 생각으로 회의에 참가하고 있었던 것일까. 덧붙여, 조선의 마스다가 『경찰 휘보』 연재에서, 업자 쪽 태도를 취하는 경찰을, “유곽영업자의 앞잡이”라고 비난한 것은, 이 위원회 이후의 일이다. 

일본 측은 또한, 아시아에서 매춘을 하는 일본 여성은, “거의 전부 자신의 자유 의지에 따라 해외에서 돈벌이 목적”으로 도항한 것이어서, “결코 타인에 의한 유괴, 강요, 사기 등에 의한 피해자라고 인정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식민지 조선, 타이완을 포함하여 일본 정부로서의 반론이다. 이것도 사전의 재외 공관 보고에 비춰보면, 적어도 조선·타이완 여성에 관해서는 사실에 반한다.

아시아에서 여성의 인신매매 문제는 그 후도 계속 풀리지 않았다. 1937년 2월, 네덜란드령 인도네시아 반둥에서, 국제 연맹 주최 「부인 아동 매매 단속에 관한 동양 여러 나라 회의」가 개최되어, 국제적인 여성 인신매매를 없애는 방책이 논의되었다. 일본 정부의 담당자는 외무, 내무, 척무拓務 등 각 성과 타이완 총독부의 사무관들. 4월 20일자 외무대신 사토 나오타케佐藤尙武 앞 보고서는, 주20) 회의에서는 주로 중국인 여성 매매가 논의되어, 인신매매에 관한 국제 연맹의 사무소 설치를 결의했다고 전한 다음, 미래에 대한 걱정을 다음과 같이 술회한다.     

내지[일본 현지] 부녀의 해외 도항에 관해서는, 단속이 거의 완벽을 이루어 가고 있다고 할지라도, 조선인 타이완인 부녀에 관해서는, 여전히 유감스러운 점이 없다고 할 수 없다. 이 점에 관해서는, 이번 회의에서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해도, 중국 각지의 실정은 상당히 한심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가까운 장래에 마땅히 뭔가 조치를 취할 필요가 있다.

“유감스러운 점” “중국 각지의 실정”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명백하지 않지만. 중국 각지에서 매춘을 하는 조선인과 타인완인 여성들이 비참한 상황에 처해 있기에, 조기에 대책을 취해야 한다고 의견 보고를 했다고 해석하는 것이 자연스러울 것이다.

손을 쓸 새도 없이, 약 두 달 반 후에 일본군은 중국과 전쟁을 시작했다. 기존의 매춘 구조를 토대로, 각지에 위안소를 설치하고, 일본 현지와 조선, 타이완, 중국 여성들을 위안부로 만들어 갔다.

이듬해 1938년 9월, 국제 연맹 통상총회 제5위원회에서 아시아에서 여성의 인신매매가 새삼 논의되었다. 주21) 중일전쟁은 2년째에 접어들어, 장기화 양상을 드러내고 있었다. 일본군은 가는 곳곳에 위안소를 만들고 있었는데, 위안소, 위안부 문제가, 위원회에서 직접, 정면으로 논의되는 일은 없었던 듯하다. 외무성 보고에 따르면, 전년의 동양 여러 나라 회의에서 권고된 사무소 설치가 지연되고 있는 것에 대해, 중국 대표가 “극동의 현상 때문에 연기하게 되는 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바이다. 전쟁의 결과, 본 문제는 극동에서 한층 절실한 문제가 되어 가고 있다”고 호소했다.

잠정 의사록에 따르면, 중국 대표는, 전쟁에 수반하여 많은 중국인이 극동의 다른 나라로 이동한 사실도 언급한다. 주22) 흥미 깊은 발언이지만, 이 이상 상세한 기술은 지금으로서는 발견되지 않는다. 회의 참가국과 출석한 외교관들의 기록 등을 더듬어 보면, 중일전쟁 초기의 동아시아 매매춘에 새로운 각도에서 빛을 보게 될지도 모른다.

다음 회는, 조금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만주 사변에서의 위안소를 검토한다.

주1)
秋定嘉和 「‘存娼論’ 主張と行動 - 昭和 十年二月の全國貸座敷連合會臨時大會の紹介」, 『キリスト敎社會問題硏究』, 第37號. 藤野豊 『性の國家管理』107page

주2)
「第67回帝國議會衆議院請願委員會議錄(速記) 第9號」(1935. 3. 1.)

주3)
吉見義明 『從軍慰安婦』 19page

주4)
神崎淸 『決定版·神崎report 賣春』 26page

주5)
「第67回帝國議會貴族院議事速記錄 第10號」(1935. 2. 18.)

주6)
藤永壯 「植民地公娼制度と日本軍 ‘慰安婦’ 制度」, 『戰爭·暴力と女性3 植民地と戰爭責任』. 山下英愛 「朝鮮における公娼制度の實施とその展開」, 『日本軍‘慰安婦’關係資料集成(下)』. 宋連玉『世紀轉換期の軍事占領と‘賣春’管理」, 『軍隊と性暴力』など.

주7)
『朝鮮警察槪要』(1940年)(國立公文書館所藏)

주8)
尹明淑 『日本の軍隊慰安所制度と朝鮮人軍隊慰安婦』 301page. 韓國國立中央圖書館のサイトで『警察彙報』1~440號(倂合前の『警察月報』を含む. 欠號あり)をデジタル畵像で閱覽できる. 東大, 明治大の圖書館が一部を所藏している.

주9)
姜德相 『朝鮮人學徒出陣』 9page

주10)
『日本軍‘慰安婦’關係資料集成(上)』703page

주11)
『外務省警察史』(復刻板) 第4卷 294page, 『通商彙纂』(復刻板) 第28卷 494page, 外務省通商局

주12)
白井義三郞 「海外渡航の醜業婦取締に就て」『警察協會雜誌』 第74號 56page

주13)
『外務省警察史』(復刻板) 第4卷 295page

주14)
『外務省警察史』(復刻板) 第4卷 292page

주15)
『日本軍‘慰安婦’關係資料集成(下)』126page

주16)
『國際聯盟婦人兒童問題一件/東洋に於ケル婦女賣買實施調査ノ件/準備調査(賣笑婦ノ實情取調ノ件)』(アジア歷史資料センター, 以下‘アジ歷’). この資料について藤永壯が「朝鮮植民地支配と‘慰安婦’制度の成立過程」『日本君性奴隸制を裁く-2000年女性國際戰犯法廷の記錄 第3卷』の中で詳しく分析している.

주17)
小野沢あかね 『近代日本社會と公娼制度』 185page

주18)
『日本軍‘慰安婦’關係資料集成(下)』214page

주19)
『國際聯盟婦人兒童問題一件 第1卷』分割一 (アジ歷)

주)20
「婦人兒童賣買取締に關する東洋諸國會議經過報告書送付の件(各廳府縣)」『警保局長決裁書類·昭和12年(下)』(國立公文書館所藏)

주21)
『國際聯盟總會關係一件/第19回總會關係 第1卷』分割四 (アジ歷). 防衛省防衛硏究所戰史硏究センターもこの資料を所藏している(「昭和13, 14年 外務省關係 海軍大臣官房記錄」『外務省關係綴 完 昭和13~14』)

주22)
『國際聯盟總會關係一件/第19回總會關係 第6卷』分割三 (アジ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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