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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송신도宋神道의 인생담 ①
전장과 위안소라는 극한을 살아낸 재일 여성
김종익 | 2018-03-07 14:05:46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 이 글은 『세카이』 2018년 3월호에 게재된 「宋神道の人生譚 - 戰場と‘慰安所’の極限を生き拔いた在日女性」을 옮긴 것이다.
본문의, ( )는 필자, [ ]는 역자의 주석이다. 중국의 지명은 현대 중국어 발음으로 옮겼다. 본문에서 필자가 강조하기 위해 사용한 홑낫표(「 」)는, 작은따옴표(‘ ’) 로 옮겼다. 또 대화를 표기하기 위해 사용한 홑낫표(「 」)는, 큰따옴표(“ ”)로 옮겼다.

가와타 후미코川田文子
와세다 대학 문학부 졸업. 30여 년간 ‘위안부’ 문제에 전념하며, 일본군에 의한 성폭력 피해자의 증언을 기록하고 있다. 『위안부라 부린 전장의 소녀』 『할머니의 노래唄 - 재일 여성의 전중·전후』 등의 저서가 있다.

재일在日 ‘위안부’ 재판을 단 한 명의 원고로 싸웠던 송신도 씨가 지난해 12월 16일 타계했다. 재일 위안부 재판을 지원하는 모임(이하, 지원 모임)은 특별 양호 노인 홈인 송 씨의 방에서 12월 3일 조금 늦은 아흔다섯 살의 생일 축하연을 했다. 송 씨는 거의 눈을 감고 있었다. 눈을 뜰 때마다 교대로 머리맡으로 다가가 귀가 어두운 송 씨에게 말을 걸었다. 그날은 보청기를 끼고 있지 않았다. 귓전에 대고 “가와타川田예요”라고, 큰 소리로 인사를 하자 “아”라고 큰 소리로 대답했다. 그것이 나에게는 최후의 대화가 되었다.

일행의 메모로 시작된 만남 

미야기현宮城県 오나가와정女川町에 살고 있던 송 씨를 처음 방문한 것은 1992년 3월 말부터 4월 초였다. 송 씨는 부재중이었다. 두 집이 한 동을 이룬 연립주택의 이웃에게 물었더니 이웃에 담소를 하러 갔다고, 언덕 위에 있는 집으로 안내해 주었다. 이웃은 셋집 주인이었다. 카세트테이프 십여 개와 갈아입을 옷을 넣은 커다란 캔버스 천 가방을 든 나를 송 씨는 가발이나 별난 먹을거리를 팔러 온 잡상인으로 생각했던 것 같았다.

그해 1월 14일부터 3일간, 시민 그룹이 전화로 정보를 수집하기 위해 ‘종군위안부 110번’을 실시했다. 그 전해 12월 6일, 김학순 씨 등 ‘위안부’ 피해를 입은 세 명이 전前 군인·군무원, 유족 등 32명과 도쿄지방법원에 사죄와 배상을 요구하며 소를 제기했다. 해가 바뀌고 1월 11일, 일본군이 위안소 설치와 ‘위안부’ 모집을 감독, 통제한 사실을 드러내는 군 작성 문서를, 요시미 요시아키吉見義明 쥬오中央 대학교 교수가 방위청 방위연구소 도서관에서 발견한 것을 아시히신문이 보도했다. 그 직후에  많은 정보가 모여들었다. 나도 3일간, 수화기를 들었고, 종료 후 모든 조사 카드를 훑어보았다. 그 가운데 송 씨의 주소와 정보 제공자의 “방문해 주세요”라는 동료의 메모가 기재된 카드 한 장이 있었다.

실행위원회는 사전에 중요한 정보에 대해서는 재조사 실시를 하기로 정하고 있었지만, 송 씨에 대한 재조사는 주저했다. 당시 이름을 밝힌 사람은 김학순 씨 한 명, 나머지 두 명의 원고는 가명을 사용했다. 김학순 씨의 커밍아웃은 “반세기에 걸친 침묵을 깨고 이름을 밝혔다”고 많은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았다. 그러나 위안소에서 일본군에게 피해를 당한 여성들이 어떤 상황 속에서 살고 있는지, 거의 파악되지 않고 있었다. 게다가 송 씨의 조사 카드에 정보 제공자의 연락처는 기재되어 있지 않아서 방문해도 좋은지 확인할 수 없었다.

나는 1977년 말부터 약 5년 동안, 오키나와현 도카시키섬渡嘉敷島의 위안소에 연행되어 전후에도 오키나와에 남겨진 배봉기裵奉奇 씨의 증언을 들었다. 배 씨는 주기적으로 격심한 통증에 시달리며, 타인과의 접촉을 피한 채 살고 있었다. 그런데 그 증상이 있을 때 이외는 나의 방문을 받아들였다. 배 씨는 글자를 모르고, 전화도 없었다. 연락 수단이 없는 바람에 갑작스러운 방문, 오후 1시 무렵부터 해질녘인 5시까지 이야기를 들었다. 귀찮은 점도 있었을 텐데 거부하시지 않았다. 어느 날 문뜩 깨달았다. 타자에게 함부로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어떻게든 승복할 수 없는 자신이 입은 고난을 호소하고 싶었던 거라고. 그 경험과 조사 카드에 기재된 정보 제공자 말에 힘을 얻어, 나는 단독으로 송 씨를 방문했다.

정보 제공자는 나중에 센다이仙台의 재일본대한민국민단(민단)을 찾았을 때, 민단의 분이었다는 것을 알았다. 송 씨가 일본국의 사죄를 요구하며 도쿄지방법원에 소를 제기한 것은, 첫 방문으로부터 1년 후인 4월 5일이다. 나는 송 씨와 다른 두 명의 증언을 토대로 한 원고를 완성(『황군위안소의 여성들』, 1993년), 제소에 임했다.

시집媤家에서 도망친 신부

송 씨는 1923년 11월 24일, 충청남도 논산論山군 두마豆磨면에서 태어났다. 송 씨의 목 밑에는 팥알 크기의 움푹 파인 상처 자국이 있다. 위안소에서 입은 상처가 몇 개인가 있었기 때문에 그 가운데 하나가 아닌가라고 물었더니, 태어난 직후 남자아이가 아니었기 때문에 불에 달군 젓가락인가 뭔가로 찔렸던 자국이라고 설명했다.

아버지는 산주교[일본어 표기는 ‘サンジュ敎’]라는 종교의 지도자였다. ‘神道’는 여자아이에게 붙이는 이름은 아닐 것이다. 남자 이름으로서도 매우 드물지 않을까. 아버지의 강한 생각의 배어 있는 이름이라는 생각이 든다.
학교에는 거의 다니지 않았다.
“좋아하지 않았으니까. 학교에 가라고 해서, 책을 싸. 그리고 책 따위는 내팽개치고 노는 거야.”
산주교의 모임이 있을 때는 자주 보러 갔었다.
“여동생을 업고 갔어. 그게 재미있었으니까. 오줌을 누고 싶어도 참았어. 오줌을 싸서 엄마에게 야단을 맞은 적도 있었지.”
여동생은 문자를 터득했지만, 송 씨는 터득하지 못했다.
열두 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많은 신자가 조문을 하러 왔다.
집은 넓었고, 아버지가 남긴 재산도 있었지만, 그것이 다 없어지자, 어머니는 송 씨와 여동생을 데리고, 본처와 딸이 있는 약국을 운영하는 남자 집으로 들어갔다. 후손을 잇는 남자아이를 낳는 조건으로. 어머니는 송 씨 자매와는 아버지가 다른 남동생을 낳았다. 송 씨는 어머니에게 반항해 소란이 일어났을 때와 같은 경우, 본처와 그 딸 편에 섰다.

송 씨는 열다섯 살에 시집을 가게 되었다. 맞선 자리에서 어머니에게 옆구리를 찔렸다. 마음에 들었는지 어땠는지 어머니는 표정으로 묻고 있었다. 한 번 만난 정도로는 답할 수 없었다. 상대는 스물일곱의 우락부락하게 생긴 농부였다. 어머니는 송 씨의 마음 따위는 관계없이, 혼례 준비를 진행했다. 반항적인 자신이 거치적거려서 일찍 시집을 보내고 싶은 거라고 송 씨는 받아들였다. 당시 결혼 연령으로는 그다지 빠른 건 아니었다.

가마를 타고 시집으로 향할 때, 돌아오는 길을 알려고 가마 창문에 침을 발라 구멍을 내고, 밖의 풍경을 눈에 담았다. 혼례 잔치가 끝나고, 방에서 신랑이 혼례복을 벗기려고 했을 때, 순간적으로 화장실에 간다고 하고 방을 나와 속옷 차림으로 쏜살같이 깜깜한 밤길을 달렸다. 밤의 정적으로 개구리 우는 소리만이 들려왔다.

집에 도착하자 여동생이 눈치를 채고 일어나서 왔다. 추워서 아궁이에 불을 피워 주었다. 어머니가 일어나 와서, “시집 간 년이 왜 여기에 있어”라고 화가 잔뜩 난 목소리로 말하고, 두들겨 패기 시작했다. 당시 조선에서는 시집을 가면 3년은 친정에 오지 않는다는 풍습이 있었다. 송 씨는 그대로 집을 나왔다. 어머니가 몽둥이를 가지고 쫓아왔다.

친구 집을 거처로 삼고 돌아다닌 후, 대전에서 보모를 하며 지내고 있던 때의 일이다. 두마면의 집 근처에 살던 여성에게 사정을 이야기하자, 그 여성은 “시댁에 가지 않고서도, 전선에서 나라를 위해 일하면 살아갈 수 있다. 돈도 모은다”고 꾀었다.
“그 노파의 감언이설에 넘어가 속아서 돌아다녔던 거지. 도시 쪽으로 가니까 말이야 뭔가 뭔지 알 수 없었어. 따라 간 거지, 그런 곳. 조선에 있을 때 유곽 같은 곳이 있다는 것도 몰랐어요.”
송 씨는 그 여성을 “유괴 할멈”이라고 했다.
마침내 전선으로 출발한다고 할 때, 동생에게, 여자는 몸가짐이 중요하다고 생각해 바늘과 실을 선물로 준비해서 한 번 두마면에 갔다.

송 씨는 중국과 국경을 접한 곳, 신의주의 소개소에서, ‘유괴 할멈’으로부터 ‘인간 브로커’ 남성에게 넘겨졌다. 소개소에는 많은 여성이 모여 있었다. 그 여성들과 함께 무개차로 톈진으로 갔다. 그때까지 톈진 같은 대도시에 간 적이 없었다. 송 씨 등은 환락가로 끌려갔다. 화려한 의상을 한 여성들이 호객을 하고 있었다. 나중에 상기해 보니 유곽이었다. 일의 내용을 숨긴 채 ‘인간 브로커’는 “치마저고리로는 장사가 안 된다”며, 호객하는 여성들과 같은 의복을 준비시켰다. 송 씨는 기모노를 입는 방법을 몰랐기 때문에 원피스로 했다. 고 씨라는 키가 작은 조선인 남성이 무리 속에서 뽑은 여성들은 배로 한커우漢口로 향했다. 그리고 한커우에서 작은 배로 갈아타고, 양쯔강을 건넜다. 도중에 물에 팅팅 불은 반나체에 못을 박은 것처럼 구멍이 뻥뻥 뚫린 시체를 보았다. 

건너편 우창武昌에 도착하자, 식당이었던 건물로 끌고 갔다. 건물 입구 근처의 시멘트벽에 선지피가 말라붙어 있었다. 화장실에 가려고 뒤쪽으로 나가자 시체가 방치되어 있었다. 미지근한 물로 선지피를 씻어 내고, 삽을 빌려와서 건물 옆에 구덩이를 파고 시체를 묻었다. 일본군은 우한 작전에서 장제스군과 중국군을 물리치고, 1938년 10월 26일, 우한을 점령했다. 우한시가 된 한커우, 우창, 한양漢陽은, 당시는 우한 3진鎭으로 불린 독립된 세 개의 읍이었다.

송 씨 등이 우창에 도착한 것은 일본군이 점령하고 얼마 안 된 때였다. 건물에는 일본군 침공에 쫓겨 정든 땅을 버린 중국인의 생활 자취가 배어 있었다.
목공 출신의 부대가 와서, 1층은 회계실로, 2층은 칸을 막아서 여러 개의 작은 방을 만들었다. 세계관이라는 간판도 내걸었다. 위안소 개설 전부터 무리를 이룬 병사들이 몰려들었다.
고 씨는 세계관의 주인이 되고, ‘인간 브로커’가 회계 업무를 맡았다. 먼저 와 있던 다섯 명에 송 씨 등 여덟 명이 더해졌다.
“그게 제일 싫었는데. 성기 검사”
검사대에 올랐을 때, 송 씨는 울면서 저항했다. 군의는 성 경험이 없고 성병에 걸렸을 확률이 낮다고 보아 검사를 하지 않고, 노출된 엉덩이를 팡하고 때리고, 다음 사람을 재촉했다.
성병 검사가 끝나자 군의 영업 허가가 떨어졌고, 위안소가 개설되었다.

송 씨의 작은 방에 처음으로 들어온 것은 성병 검사를 한 군의였었다. 그때 일을 송 씨는 도쿄지방법원의 본인 심문에서 증언한다.
“너, 라는 말을 알아듣지 못했어요. 끌어당겨도 어이어이 울었어요. 영문을 몰랐어요. 죽일 작정을 하고 있는 걸까. 두렵고, 슬프고, 말은 알 수 없고.”
군의는 송 씨의 머리를 쓰다듬었을 뿐 그냥 나갔다. 그러나 그 후 회계에게 긴 머리채를 휘어잡힌 채 질질 끌려가서 두들겨 맞고 걷어차이는 제재를 당했다.
“군인의 요구에 따르지 않으려면, 여기까지 오는 데 든 경비를 지금 당장 내놔라”라며.
송 씨는 한 푼도 빌리지 않았는데, 대전에서 우창까지 오는 기차 여비, 뱃삯, 숙박비, 식비, 일에 필요하다며 산 원피스 대금까지 가불금 명목으로 계산되어 있었다.

송 씨는 몇 번이나 도망쳤다. 그 때마다 발견되어, 제재를 당했다. 중국인 집에서 숨겨준 적도 있었다. 하지만 세계관에서 도망하는 것이 가능하더라도, 말도 지리도 모르고 수중에 돈도 없는 열여섯 소녀가 혼자서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지난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그 지역에 주둔했던 전前 군인은 언제 전투가 시작되는지 알 수 없는 전쟁터에서, 군에서 떨어져 행동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단언했다. 송 씨는 주변의 상황을 조금씩 깨닫게 되자, 여기서 살 수밖에 없다고 체념해 갔다. <계속>



본글주소: http://poweroftruth.net/column/mainView.php?kcat=1001&table=ji_kim&uid=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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