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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공은 개죽음”…일본 가미카제 유서의 실상
‘강요된 애국심’ 기록유산 등록은 ‘엽기’…조선인 가미카제 두 번 죽이는 일
정운현 | 2014-02-08 23:12:48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아버지, 안녕히 계세요. 효도라고는 한 번도 해드리지 못했지만 저는 내일 일본을 위해 죽습니다. (중략) 아버지를 좋아한다고 말해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마지막이니까 말하겠습니다. 아버지, 사랑합니다." - <청춘의 유서-생명을 대신하여 이 일기 그리고 사랑>(1981)

사사키 하치로오(佐佐木八郞). 1923년생. 도쿄제국대 졸업 후 1943년 12월 학도병 징병, 1945년 2월 20일 특공대원 지원. 1945년 4월 14일 특공대 임무 수행 중 전사. 향년 22세. 해군 소위

"내 생명 이제 한 달밖에 남지 않았는데 지금껏 살아온 얄궂은 생애의 결론적인 의미를 찾기라도 하자는 것인가. 단념할래야 단념할 수 없는 초시계의 바늘만 돌아간다.…이제 한 달 남은 내 생애에서 아무런 꾸밈도 없는 자신을 찾아내려고 하는 나의 몸부림. 나에게는 이미 내 자신이 죽어버린 느낌이 든다." - <해신(海神)의 목소리 사라지지 않고-카이텐 특공대원의 수기>(1972)

와다 미노루(和田稔). 1922년생. 도쿄제국대 재학 중 1943년 12월 학도병 징병. 1944년 10월 18일 잠수어뢰 카이텐(回天) 특공대원 지원. 1945년 7월 25일 훈련 도중 고장난 어뢰 안에서 질식사. 향년 24세. 해군 소위.

죽음보다 '삶'을 원했던 젊은 일본군 특공대

이 두 사람은 모두 태평양전쟁 때 '황군'의 특공대원으로 참전했다가 전사한 일본인 청년들이다. 사사키는 가미카제, 와다는 '바다의 가미카제'로 불리는 카이텐(回天), 즉 '인간어뢰' 특공대의 일원이었다. 전사 당시 사사키는 22세, 와다는 24세. 둘 모두 전사 후 해군소위로 특진, 추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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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미카제가 탑승한 제로센이 미 군함을 향해 돌진하는 모습 ⓒ 자료사진

사사키는 1943년 12월에 징병된 500명의 도쿄제국대생 가운데 한 명이었다. 그는 1944년 1월 28일 다른 학생들과 함께 '지옥훈련'이 기다리는 야타베(谷田部) 해군항공대로 배속됐다. 그곳 교관들은 학도병들을 잔혹하게 다뤄 그들의 입안은 찢어지고 얼굴은 늘 부어 있었으며, 더러는 뇌진탕을 일으켜 쓰러지기도 했다. 1945년 2월 20일, 부대장은 전원을 강당에 집합시켜 특공대원 '지원' 여부를 제출토록 했다. 겉으로는 자유 의사에 따른 것이었지만 그들에게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도쿄 제1고등학교 졸업 후 도쿄제국대에 입학한 그는 처음에는 역사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나 전공은 경제학을 택했다. 당대 일본인 남성의 최고 엘리트 코스를 밟고 있던 그는 학생들 사이에서조차 지적·신체적 우수성이 특출하다고 평가되었다. 노후 뒷바라지를 기대하고 있던 그의 부친은 사사키가 해군의 조종 예비학생으로 지원한 것을 알고 격노했으나 학도병으로 나가는 것을 피할 수는 없었다. 첫 인용문은 그가 출격 전날 부친에게 쓴 마지막 편지다.

와다 역시 사사키처럼 제1고등학교-도쿄제국대 코스를 밟고 있어 전도양양한 청년이었다. 와다는 군대에 대해 비판적인 의견을 갖고 있었으나 다른 특공대원과 마찬가지로 진보주의자이면서도 동시에 열렬한 애국자이기도 했다. 그는 자기의 희생을 역사의 흐름 속에서 일어나는 일로 생각했다. 얼핏 보면 그는 '천황, 즉 국가를 위한 희생' 이데올로기의 신봉자로 비춰진다. 다른 학도병들처럼 그 역시 조국을 지키는 책임은 자신들에게 있다고 생각했으나 마지막까지 죽음보다는 '삶'을 원하면서 고뇌했다.  

1944년 10월 18일 와다는 '카이텐(回天)'이라고 불리는 잠수어뢰의 승무원으로 지원했다. 이 어뢰는 탑승원을 태운 채 적함 몸체에 충돌하기 때문에 '인간어뢰'로 불린다. 포츠담선언 전날인 7월 25일 훈련 도중 그가 탑승한 어뢰가 조타장치의 고장으로 해저로 가라앉아 그는 수중에서 질식사했다. 그를 태운 어뢰는 종전 후인 9월 중순 폭풍이 지나간 뒤에 떠올랐는데 그는 어뢰 속에서 책상다리를 한 채 자는 듯이 죽어 있었다. 죽음을 앞두고 그는 술김에 하사관 방에 들어가 꽃병의 물과 잉크병의 잉크를 마시기도 했다. 철저한 무력감에 빠진 그는 삶의 모든 걸 체념했던 것이다.

가미카제 특공대원들 유서는 '강요된' 애국심

일본 가고시마현 미나미큐슈시가 지난 4일 태평양전쟁 말기 일본 육군의 최대 가미카제 특공 기지인 치란(知覽) 기지에 보관돼 있는 가미카제 특공대원들의 유서와 편지를 '유네스코 기억유산' 등재를 추진하겠다고 밝혀 논란이 일고 있다. 미나미큐슈시의 시모이데 간페이(霜出勘平) 시장은 이날 시내 치란특공평화회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내년에 전후 70년을 맞아 특공대원의 메시지를 널리 알려 전쟁의 비참함과 전쟁에 대해 생각하는 계기를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

옛 지란기지 터에 세워진 치란특공평화회관에는 특공대원들의 유서와 편지 등 1만4000여점의 자료가 보관·전시돼 있다. 미나미큐슈시는 이 가운데 특공대원의 것으로 확인된 유서와 편지 333점을 '치란으로부터의 편지'라는 제목을 달아 유네스코 유산 신청을 할 계획이다. 치란은 당시 가미카제 특공대가 출발했던 비행기지가 있던 곳으로, 이곳 등에서 출격해 희생된 특공대는 모두 1036명이나 된다. 자살 특공대원은 대개 20세 전후였는데, 조선인 대원도 10여 명이나 된다.

논란의 핵심은 일본이 순진한 젊은이들을 침략전쟁에 강제로 동원해 이들을 사지로 내몬 것에 대한 자성은 하지 않은 채 '전쟁의 비참함' 운운하고 있다는 점이다. 게다가 특공대원들이 남긴 유서나 일기에 나타난 '애국심'의 표현은 자의적인 것이 아니라 강요와 협박에 의한 것이었다. 특공대원들은 자신의 유서나 편지가 '영령'이 남긴 글로 전시될 것이라는 상관의 훈시를 들은 후에 쓴 것도 많았다. 특공대원 출신의 신타 마사미치(信太正道)는 유서를 쓸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서술했다.

"특공은 개죽음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특공대원으로) 지명 당했을 때는 맥이 다 풀려버렸다. 교육 참고관에 장식할 거라며 유서를 쓰라고 했다. 그러나 속내를 다 쓸 수 없으니 무슨 말을 해도 다 거짓이었다. 본심을 토로하는 것은 금기사항이었다."

실제로 '모범적'인 유서는 견본으로 치란기지 벽에 전시되어 뒤를 이은 사람들이 읽도록 했고, 지금까지도 야스쿠니 신사에 전시돼 있다. 특공대원들은 방대한 분량의 일기를 남겼다. 이는 기록 문화를 중시하는 일본인들의 습성에다 그들 대부분이 학도병 출신으로 고등교육을 받은 자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남긴 수기는 기지 내에서 엄격한 검열을 거쳤다. 따라서 자본주의, 인플레이션, 심지어 버터 같은 외래어도 사용이 금지됐다. 한 특공대원은 형에게 보낸 편지에서 "가위(검열)가 무서워서 쓰고 싶은 말도 못 쓴다"고 불만을 토로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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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미카제 특공대 출격 때 사쿠라 꽃가지를 흔들며 전송하는 치란고등여학교 학생들 ⓒ 모멘토 출판사

특공대원들은 출격 직전 이별의 술잔으로 천황에게 건배하고 '천황폐하 만세!'를 외쳤다고 한다. 하얀 비단 목도리와 히노마루(일장기) 머리띠를 매고 웃는 얼굴이나 결연한 표정으로 출정하는 대원들의 사진이 그 증거가 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사진은 실제로 기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대원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를 은폐하고 있다는 지적이 있다. 일제 말기 해군에 징집돼 츠치우라(土浦) 해군기지에서 특공대원들의 식사, 방청소 등을 담당했던 카스가 다케오(春日武雄)가 남긴 출격 전야 대원들의 모습은 다음과 같았다.

"어떤 사람은 화가 나서 소리를 지르고 어떤 사람은 엉엉 운다. 오늘밤만의 목숨…. 부모 형제자매의 얼굴, 모습. 그리고 연인의 미소 띤 얼굴, 약혼자와의 슬픈 이별. 주마등같이 돌고 도는 상념은 끝이 없다. 내일은 마침내 출격. 일본제국을 위해, 천황폐하를 위해서라고. 젊고 고귀한 청춘의 목숨을 바칠 각오는 다짐하고 있지만, 흐트러진 테이블에 엎드린 사람, 유서를 쓰는 사람, 팔짱을 끼고 명상하는 사람, 엉망이 된 송별회장을 떠나는 사람, 몇 시간이나 묵묵히 뭔가를 쓰는 사람, 미친 듯이 춤을 추면서 꽃병을 부수는 사람. 이 처참한 출격 전야의 어찌할 바를 모르는 학도병사의 심경은 너무나도 알려져 있지 않다.…"

특공작전은 명목상 지원병을 중심으로 이뤄졌다. 특공대를 창설했을 때 육해군병학교 출신의 직업군인 가운데는 지원자가 한 사람도 없었다. 직업군인들은 자신들은 지원하지 않으면서 대신 학도병이나 비행예과 연습생들을 사지로 떠밀었다. 특공대는 처음부터 이들에게 '살아남는 법'에 대해서는 가르치지 않았다. 대원들이 맨 처음 교육받은 것은 포로가 됐을 때 자신의 총으로 자살하는 방법이었다. 발끝을 사용해 방아쇠를 당겨 즉사할 수 있도록 턱 아래 한 부분을 정확하게 겨냥하는 교육을 받았다. 이들 대부분은 '자발적 지원'이 아니라 강요로 특공대원이 됐다.  

종전 후 특공대원들의 동료들은 조국을 위해 목숨을 버린 친구를 생각하며 살아남은 사람으로서 죄의식을 안고 살았다. 그들 중에는 특공대원 친구가 남긴 글들을 모아 추모 수기집을 펴내는 것으로 위안을 삼기도 했다. 가족들은 오랫동안 더 큰 트라우마를 겪어야만 했다. '빨간 딱지'로 불린 소집영장이 나오면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소집되든지 아니면 헌병에게 살해당하든지 둘 중 하나였다고 한다. 부모들이 할 수 있는 건 아들의 무사귀환을 비는 기도뿐이었다. 전사한 특공대원의 어머니나 누이들은 '영령'을 위해 순백색의 기모노를 입은 '신부 인형'을 만들어 바치기도 했는데 일종의 '영혼결혼식'이라고 할 수 있다. 

가미카제 특공대는 일본 항공부대의 '아버지'로 불리는 해군중장 오오니시 타키지로(大西瀧治郞)가 처음 고안한 것이다. 그는 특공작전을 실용화하기 이전부터 전투기나 어뢰에 탄 채 적함 몸체에 부딪쳐 공격을 가하는 '타이아타리(體當たり, 몸체공격, 육탄공격)에 대해 생각했는데 이를 신풍(神風), 즉 가미카제라고 불렀다. 가미카제는 미국의 일본 본토 침공에 대비한 방위계획으로 시작됐는데, 첫 출격은 1944년 10월 25일 시키시마(敷島)부대가 필리핀 레이테만의 미군 함정에 몸체공격을 감행한 것이었다. 특공작전은 확실한 죽음을 의미했기 때문에 정규군대로 편성되지 않은 채 천황의 이름으로 이들은 죽음을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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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미카제들이 공격용으로 사용한 제로센 ⓒ 자료사진

특공대의 장비는 비행기와 어뢰로, 그 어디에도 탑승원을 위한 구명장치는 구비돼 있지 않았다. '제로센(零戰)'으로 불리는 단발엔진 탑재 함상전투기는 고도 2만 피트(약 6100미터)를 최고 시속 372마일(약 600km)로 비행하는 성능을 가졌는데 250kg의 폭탄을 적재할 수 있었다. 폭탄 무게와 가속도로 인해 일단 급강하하면 비행기를 제어하기 어려워 결국은 적함이나 바다에 내리꽂히게 돼 있었다.

잠수어뢰 '카이텐(回天)'은 탑승원이 탄 채로 적함 몸체에 부딪쳐 공격을 가하는 것으로, 흔히 '인간어뢰'로 불렸다. 대개 2인승이었는데 탑승원은 무게 9t의 어뢰 중앙에 쪼그려 앉아 1550kg의 탄두를 가지고 30노트로 잠행했다. '카이텐(回天)'이란 '하늘로 돌아간다'는 뜻으로, 대원들의 무참한 죽음을 미화한 표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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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평양전쟁 당시 미군이 노획한 '인간어뢰' 카이텐-2형 ⓒ 자료사진

가미카제 특공대는 처음에는 미군들을 공포로 몰아넣었지만 갈수록 그 위세는 시들해졌다. 이들이 탄 제로센이 바다에 추락하는 경우가 많아 명중률이 생각보다 낮았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폭탄이 너무 무겁거나 속도가 너무 빨랐고 게다가 조종사가 마지막 순간에 눈을 감았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특공대는 1944년 8월 21일부터 패전 때까지 총 출격기 3300기 가운데 명중률은 11.6%에 그쳤다. 어림잡아 미군함의 피해는 격침, 손상을 합쳐 375~455척이며, 잠수어뢰 카이텐에 의해 격침된 것은 미군의 유조선 한 척 뿐이었다. 육군보다는 해군의 특공작전이 훨씬 더 큰 성과를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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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군 유조선 미시시네와호가 1944년 12월 20일 태평양 울이티 환초 앞 바다에서 ‘인간어뢰’ 카이텐의 공격을 받고 침몰하는 모습을 미군들이 바라보고 있다 ⓒ 자료사진
'엽기'로 치닫고 있는 일본 우익, 보고만 있을 건가

치란(知覽) 특공평화회관 입구 왼편에는 돌비석이 하나 서 있다. 비석에는 "아리랑의 노래 소리도 멀리 어머님의 나라를 그리워하며 진 사쿠라 사쿠라"라는 노래가 새겨져 있다. 이 비석은 조선인 가미카제 11명을 기려 세워졌다.

조선인 가미카제의 전체 숫자는 아직 정확히 확인되지 않고 있는데 대략 16~20명 정도로 추정된다. 대부분의 경우 일제 패망 서너 달 전에 오키나와 부근 해상에서 전사했으며, 전사 당시 계급은 오장(하사)에서부터 중위(최정근)까지 다양했다. 나이는 대개 20세 전후인데 최연소는 17세(박동훈), 최연장자는 27세(이시바시 시로오)이며, 전사 후 이들은 2계급 특진하였다. 김상필, 탁경현, 노용우 등 3인은 학도병 출신이다. 

조선인 가미카제 가운데 특별히 이름이 알려진 사람은 미당 서정주의 친일시 '마쓰이 오장 송가(松井 伍長 頌歌)'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마쓰이 히데오(松井秀男, 한국명 인재웅(印在雄). 소년비행병 13기 출신인 그는 1924년 조선 개성 출신으로, 1944년 11월 29일 필리핀 레이테만에서 전사했다. 조선인 가미카제 가운데 그는 첫 희생자인데 당시 그의 나이는 20세였다. 전사 후 그는 2계급 특진(소위)했다(마쓰이 오장에 대해서는 그간 알려진 것과 달리 일제 패망 후 그가 살아서 귀환했다는 보도도 있어 그의 전사 여부를 두고 논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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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인 출신 가미카제 탁경현 ⓒ 자료사진

다음은 학도병 출신의 탁경현. 그의 일본 창씨명은 미쓰야마 히로부미(光山博文)로, 1920년 경남 사천 출생이다. 일본 교토약학전문학교 졸업 후 학도병으로 징집된 그는 특별조종견습사관 1기생 출신으로 일제 패망 3개월여 전인 1945년 5월 11일 오키나와 비행장 서해상에서 가미카제로 출격했다가 전사했다.

당시 그의 나이 24세로 전사 후 2계급 특진(대위)했다. 치란 기지 특공대원 시절 그가 특공대 지정식당 주인과 나눈 이야기가 일본서 영화로 만들어진 바 있다. 또 수년 전 한 일본인 여성이 그의 고향 경남 사천에 그를 기리는 기념비를 세우려 했으나 주민들의 반대로 무산됐다. 고향 사람들은 그를 '친일파'로 여겼다.

지금까지 유네스코 기록유산으로 지정된 기록물은 나치 치하에서 처참한 일생을 보낸 소녀 '안네 프랑크의 일기' 등 300건에 이른다. 미나미큐슈시의 등록 신청이 받아들여질지는 현재로선 미지수다. 만약 받아들여질 경우 탁경현 등 조선인 11명의 유서도 가미카제 특공대 일원으로 세계기록유산에 포함될 전망이다. 야스쿠니신사 합사에 이어 또다시 이들을 욕보이는 셈이다.

<한겨레>는 5일자 사설에서 "이름이 확인된 333점에는 조선인 대원의 것도 들어 있는 만큼 우리 정부도 제3자처럼 개탄만 하고 있을 일이 아니다"며 "일본의 후안무치와 몰역사성을 지적하고,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당사자로서 적극 나서야 한다"고 지적했다. 지금 일본 우익은 광기 차원을 넘어 엽기로 치닫고 있는 형국이다.

덧붙이는 글 | 2004년 모멘토 출판사에서 펴낸 <사쿠라가 지다 젊음도 지다>(오오누키 에미코 지음, 이형철 옮김)의 내용을 참조했음을 밝혀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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