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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기친람’과 박근혜 대통령
정운현 | 2014-03-27 09:25:04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상서(尙書)>는 공자가 중국 요순시대부터 주(周)나라 때까지의 정사(政事)에 관한 문서를 모아 엮은 책이다. 유가(儒家)의 이상정치에 대해 서술한 오경(五經)의 하나로 총 20권 58편으로 구성돼 있다. 그 <상서> ‘고요모(皐陶謨)’편에 ‘일일만기(一日萬機)’라는 말이 나온다. 이는 천자(군주)는 하루 동안에 만 가지 일을 처리한다는 뜻이다. ‘만기친람(萬機親覽)’이라는 말도 여기서 유래했다고 한다.

동양의 역대 군주 가운데는 만기친람, 즉 ‘일중독’에 빠진 군주가 더러 없지 않았다. 조선에서는 개혁군주로 불린 정조 임금, 그리고 중국에서는 진시황과 책사 제갈공명으로 알려져 있다. 이들은 주변의 지적과 만류에도 불구하고 한사코 밤을 새워가며 국사(國事)에 열중했다. 병이라면 병이요, 정열이라면 정열이라고도 할 수 있다. 다들 너무 무리한 탓에 몸을 상해 오래 살지 못했다는 공통점도 있다.

먼저 정조 임금 얘기. 정조 5년(1781년) 규장각 제학(提學) 김종수가 정조 임금의 태도를 지적한 6개항의 상소문을 올렸다. “작은 일에 너무 신경 쓰시면 큰일에 소홀하기 쉽습니다. 크고 실한 것에 전력을 기울이지 않고 눈앞의 일만 신경 쓰면 겉치레의 말단입니다...” 규장각 제학은 종1품∼정2품 벼슬로 오늘로 치면 차관급에 해당한다. 그런 고위 관리가 임금의 ‘업무태도’를 지적하고 나선 것이다. 이는 사적인 비난보다는 충언에서 나온 것이라고 봐야할 것이다.

 정조 임금

재미난 것은 정조의 반응이었다. 정조는 김종수의 지적에 대해 “작은 것을 거쳐 큰 것으로 나가는 법”이라며 “그것이 과인이 작은 것이나 살핀다는 지적을 받으면서도 눈앞에 닥친 일부터 해나가려는 이유”라고 당당히 밝혔다. 임금에게 대놓고 ‘지적질’을 하는 김종수도 놀랍지만 이를 기분 나쁘게만 받아들이지 않고 당당하게 해명하고 자신의 스타일을 강조하는 정조의 태도도 참 멋있다 싶다. 조선시대에도 권부의 상징인 궁궐에서 이런 대화가 오갔다는 게 쉽게 믿기지 않을 정도다.

진시황은 만기친람의 원조 격이다. 진시황은 하루에 읽어야 할 결재문서의 중량을 저울질해서 처리했다고 한다. 만약 하루에 처리해야 할 문서가 정량에 미달하면 전혀 쉬지를 않고 밤을 새워가며 정사를 봤다고 한다. 제갈공명 또한 ‘좁쌀영감’으로 불렸던 모양이다. 한번은 제갈공명이 직접 장부를 조사하자 양과라는 장수가 지적을 했다. “통치에는 체통이 있습니다. 상하가 영역을 침범하면 안됩니다. 닭은 새벽을 알리고 개는 도적을 지킵니다. 주인 혼자 하려 하면 심신이 피곤해서 아무것도 못합니다. 어찌 이리하십니까?” 제갈공명은 선제(先帝) 유비의 우언을 지키려고 만기친람 하며 노심초사 했다고 전한다.

근자에 박근혜 대통령의 ‘만기친람’이 세간의 입길에 오르내리고 있다. 박 대통령이 규제개혁장관회의를 신설해 직접 주재하기로 하면서 기존 대통령 직속 규제개혁위원회는 설자리를 잃게 돼 버렸다. 결국 민간 위원장은 지난달 초 사표를 냈고, 정부 쪽 실무자인 국무조정실 규제조정실장도 두 달째 공석이다. 박 대통령은 또 통일준비위원회를 신설해 스스로 위원장을 맡기로 했다. 이렇게 되면 헌법기구인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는 또 다시 존재 이유가 없어진다. 통일 관련 주무부처인 통일부는 하루아침에 꿔다놓은 보릿자루 신세가 되는 건 당연한 이치다. 이건 아니다.

대통령이 앞장서서 국정을 이끌고 챙기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그러나 국정은 각 직위별로 권한 위임이 돼 있고 업무 영역도 나뉘어 있다. 그런 것을 체계화라고 조직화한 것이 바로 시스템이다. 그런데 대통령이 오지랖 넓게 나서서 매사를 다 챙긴다면 장차관이나 정부기관장들은 팔짱 끼고 구경만 할 수밖에. ‘만기친람’을 앞세운 대통령의 과도한 의욕은 국가의 기존 조직이나 계획을 한순간에 엉망으로 만들 뿐이다. 이렇게 되면 관료들은 청와대의 눈치와 대통령의 의중만 살피며 복지부동하게 된다. 지금이야말로 정조 임금 때의 제학 김종수, 제갈공명 시절의 양과와 같은 인물이 절실히 요구된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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