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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사관 깨뜨리기①] 독립협회의 위선적 친일 행각
‘문화정치’와 총독 사이토 마코토
김갑수 | 2013-10-16 10:14:17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식민사관 깨뜨리기]는 김갑수 역사팩션 <중경의 편지> 중에서 발췌한 내용입니다.5편으로 나누어 소개합니다 <편집자>

‘문화정치’와 총독 사이토 마코토

1919년 8월 남대문역(지금의 서울역)에 내린 신임 총독 사이토 마사코는 마차로 옮겨 타자마자 무시무시한 폭발음을 들었다. 그것은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하다 국내로 숨어 들어온 조선인 강우규가 던진 영국제 폭탄이었다. 기자와 관리들 10여 명이 다쳤지만 다행히 화를 모면한 사이토는 전임자 데라우치의 무단정치를 혁신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자기 방침이 옳다는 것을 새삼 실감했다. 폭탄을 던진 이는 65세의 흰옷 입은 노인이었다.

사이토는 조선이라는 나라가 녹록치 않은 문화 국가임을 알고 있었다. 동양에서 절대 강국이었던 중국을 제외한다면, 조선은 수천 년 동안 동양의 일등 국가였음을 부인할 수 없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중국에 간 조선의 사신은 언...제나 다른 나라 사신보다 상석에 앉았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조선의 쇠퇴기는 19세기 말부터 지금까지의 50년에 불과했다.

강우규의 사형이 집행되었다는 보고를 들은 사이토는 헌병경찰제를 보통경찰제로 바꾸는 대신 병력을 3배로 증강한다. 그는 무단정치와의 차별성을 부각시키기 위해 문화정치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본격적인 조선인 유화정책이 시작된 것이었다.

그는 일선융화(日鮮融和)라는 명분을 내걸고 총독부 관리의 문관 등용, 일본인과 한국인 간의 차별 철폐, 지방으로의 분임 분권, 재래 문화 및 관습 존중, 언론 집회 출판의 자유, 한국인 인재 등용과 문호 개방 등의 시정방침을 제시했다. 그는 관리와 교원의 제복과 착검을 폐지하고, 태형을 없앴으며, 일본인으로 한정되었던 보통학교 교장에 한국인을 등용할 수 있도록 조치했다. 그는 동아 조선 시대 등 세 신문의 간행을 허가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조선인 사상 전담 특별고등계 형사(특고)를 두 배로 증원했고 파출소를 면 단위 마을마다 설치했다. 그는 언론 출판의 검열을 대폭 강화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언론인들을 해임 투옥했다. 그는 모든 한국 지식인을 친일파와 배일파로 분류했으며 이들에 대한 감시 거리를 거의 일대일로 밀착시켰다. 그는 민족동화교육의 일환으로 한국어 대신 일본어 사용을 장려했다. 한편 그는 학교 교육에서 일본의 역사와 지리 교과목을 대폭 늘리게 했고, 조선인 교육자를 국어(일어) 상용자와 국어 비상용자로 구분했다.

이렇게 되니 당대에 활동할 수 있었던 언론인과 교육자는 모름지기 문화정치의 분식 요건(粉飾要件)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었다.

사이토가 부임 이후 가장 먼저 한 것은 교육지침을 만들어 전국에 시달한 일이었다.

<사이토 마코토 총독의 신교육 칙어>

먼저 조선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의 역사와 전통을 알지 못하게 만듦으로써 민족혼, 민족문 화를 잃게 하고, 조선인의 조상과 선인의 무위, 무능, 악행을 들쳐 내어 가르침으로써 조선 청소년들이 부조(父祖)를 멸시하도록 만들고, 결과로 조선 청소년들이 자국의 인물과 사적에 대하여 부정적인 생각을 갖게 하여 실망과 허무감에 빠지게 한 후, 그때에 일본 사적, 일본 인물, 일본 문화를 교육하면 동화의 효과가 클 것이다. 이것이 조선인을 반(半) 일본인으로 만드는 요결이다.

사이토는 중추원 부속 기구인 반도사편찬위원회를 총독부 산하로 복속시키고 이름을 조선사편찬위원회로 바꾸었다. 그는 조선사편찬위원회에 직접 참석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는 위원장에 정무총감 사타오카를 임명하고 경성대 교수인 로이타, 미우라 같은 일인 관학자와 이완용, 권중현 등의 친일 인사를 고문으로 위촉했다. 그리고 쓰에마시나, 이마니시 같은 우익 학자를 위원으로, 이병도 신석호 등의 조선인 학자를 실무 연구진으로 기용했다.

독립협회의 위선적 친일 행각

조선 말기 역사에서 가장 심하게 왜곡되어 전해지고 있는 단체는 독립협회가 아닐까 한다. 우리는 독립협회의 실체를 알기 위해서 협회 간부라는 사람들의 행적을 확인해 보아야 한다. 독립협회는 고문 서재필, 회장 안경수, 부회장 윤치호(나중에 회장됨), 위원장 이완용 등이 주도하고 있었는데 그들은 하나같이 매국노에 가까운 행적을 보였다.

회장단 중에서 이완용과 윤치호에 대해서는 이미 더 말할 필요가 없다. 안경수(일본에서 김옥균에게 이토의 밀정 배정자를 맡긴 이)는 1898년 일본의 사주를 받아 고종 양위 음모를 꾸민 사람이다. 그 밖의 위원으로는 고리대금업을 하면서 친일 단체 정우회의 총재를 지냈던 김종한, 미국 유학 출신으로 총독부 남작 겸 중추원 참의를 ...지내는 민상호, 을사오적 이근택의 동생이면서 총독부 남작인 이근호 등이 더 있다. 그러고 보면 독립협회 간부와 위원 중에서 살아남을 사람은 이상재, 주시경밖에는 없다.

1898년 독립신문의 논설에는 '이토 히로부미 씨는 당금 세계의 유명한 정치가요, 또 우리 독립 사업에 대공이 있는 사람이라. 이번 유람차로 오니 정부와 인민은 각별히 후대하기를 바라노라'라고 되어 있다. 그들이 말하는 ‘독립’은 대한의 자주독립이 아니었다. 그들은 일본의 지원을 받아 청나라의 종주권을 없애는 음모를 독립이라고 포장하여 말했을 뿐이었다. 그래서 청나라 사신을 맞이하던 영은문을 부수고 그 자리에 독립문을 세운 것이었다. 당시 많은 일본인들은 일본이 조선에 독립문을 세워 주었다고 자랑하고 다녔다.

독립협회 회장 윤치호는 서울을 방문했다가 돌아가는 이토 히로부미를 위해 요릿집 국취루에서 환송 잔치를 열어 주었다. 이토 히로부미는 그 날 윤치호에게서 받은 선물에 대단히 흡족해 했다. 그가 윤치호로부터 받은 선물은 대형 은찻잔이었는데, 거기에는 새로 지은 독립문이 부조되어 있었다. 이토 히로부미는 답례로 자신의 사진을 윤치호에게 주었다.

독립협회의 기관지 <독립신문>의 논설 몇 편을 검토해 보겠다. 독립신문 논설들은 나라를 위한다는 구실을 내세워 일방적으로 일본 편을 들었다는 점이 확인된다.

- 1896년 독립신문 제6호 논설 : 일국이 두 해 전에 청국과 싸워 이긴 후에 조선이 분명한 독립국이 되었으니 그것 또한 조선 인민이 일본에 대하여 감사한 마음이 있을 터이나, 조선 인민 중에 일본을 감사히 생각하는 사람이 지금 없는 것은 다름 아니라...

- 1896년 독립신문 제44호 논설 : 일본 정부와 일본 인민들이 조선이 진보하는 것만 즐거워하지, 어떤 나라이든지 도와주는 것은 상관 아니 하노라...조선 사람들이 일본이 조선을 위한다는 것을 자세히 모르는 것이다.

- 1897년 독립신문 제144호 논설 : 하나님이 조선 백성을 불쌍히 여기사, 일본과 청국 사이에 싸움이 생겨 못된 일하던 청인 놈들이 조선서 쫓겨 본국으로 가게 되었다. 이것은 조선에 천만 번이나 다행한 일이다.

- 1898년 독립신문 별호 논설 : 조선은 계속해서 일본 돈을 써야 한다. 일본 은전을 여전히 일용한 일로 고시를 하였다 하니 우리는 전국 재정을 위하여 크게 치하하노라.

오늘날 대한민국의 신문들은 4월 7일을 ‘신문의 날’로 정해 기념하면서 하루 휴간한다. 그런데 4월 7일은 바로 독립신문이 창간된 날이다. 우리는 친일어용지 독립신문을 기리는 대한민국의 신문들에게서 은폐되고 왜곡된 식민지 역사의 단면을 읽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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