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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바꿀 수 있는 100권의 책 32
광해군을 재평가한다고? ‘혼군 광해’와 ‘역신 강홍립’
김갑수 | 2017-12-18 16:14:49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역사는 무엇을 기록하는가 (1)
- 조영건, 김선동 두 분께 드리는 글

한문을 잘 모르는 우리가 경전이나 사서를 원전으로 읽기는 어렵다. 설령 한글 번역문이라고 해도 눈으로 읽을 수는 있지만 그 깊은 뜻까지 헤아리면서 이해하기에는 힘이 모자란다. 그렇기에 나는 고전적인 경전이나 사서에 접근할 때는 먼저 2차 해석서를 1차로 읽는다. 아마 전공자가 아닌 담에야 한국인이라면 나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조선시대 본격 역사서 중에 《동사강목, 東史綱目》과 《열조통기, 列朝通紀》가 있다. 순암 안정복이 저술한 동사강목은 1778년 정조 때에 필사본이 완성되었다. 정조는 세자 시절에 동사강목에 대해 듣고 순암에게 보여 달라고 요청한 적이 있었다.

이어서 순암은 열조통기를 저술했다. 열조통기는 덜 알려졌지만 동사강목 못지않은 가치가 있는 역사서이다. 동사강목은 기자, 단군조선부터 고려 말까지, 열조통기는 조선 건국부터 영조 대까지를 다룬 사서로서 이 둘 사이에는 시대적 지속성이 있다.

이 두 권의 역사서를 해석해 놓은 책으로 오항녕이 지은 <<조선 역사학의 저력, 순암 안정복의 동사강목>>이 있다. 순암은 역사 편찬에서 가장 중요한 것으로 세 가지를 들었다, 첫째 정통성을 밝히는 일, 둘째 시비를 바로잡는 일, 셋째 전장(정치와 문화의 성과)을 상세히 기록하는 일이다.

1) 친히 활과 화살을 가지고 말을 달려 노루를 쏘다가 말이 거꾸러져 말에서 떨어졌으나 다치지는 않았다. 좌우를 돌아보며 말하였다. “사관이 모르게 하라.”(태종실록. 4년 2.8)

2) 병조판서 조말생이 춘추관에 가서 대제학 변계량에게 사적으로 부탁하여 전에 납입한 사초(史草)를 꺼내어 고쳤다. 변계량은 사관들에게 외부 사람들이 알지 못하게 하라고 주의를 주었다.(세종실록 6년 12.20)

3) 이날 이현로가 승정원에 이르러 일기를 보고서 ‘뇌물 받은 관리’라는 글자를 고쳐 줄 것을 청하니 주서(注書)가 그 말에 따라서 ‘중죄(重罪)’로 고쳤다.(문종실록 2년 5.1)

사람들은 역사라고 하면 대체로 국사를 생각한다. 물론 국사도 역사이지만 개인의 기록도 역사이다. 1) 말에서 떨어진 것을 알리지 말라고 한 태종의 말도 역사이고 2) 사초 고친 것을 비밀로 해달라고 한 변계량의 말도 역사이기 때문에 사관이 실록에 적은 것이다. 3) 자신의 죄목을 바꿔 달라고 한 이현로의 말도 역사이기 때문에 《승정원일기》에 기록되어 600년이 지난 오늘까지 전하고 있다.

이렇게 볼 때 페이스북을 비롯한 SNS(Social Network Service) 역시 역사가 된다. 특히 그것이 공인일 경우 더욱 역사성이 강화된다. 얼마 전 내가 페이스북에서 치열한 논쟁을 벌였더니 나더러 논쟁의 상대방에게 전화를 해서 풀라고 충고하는 사람이 몇 있었다.

한마디로 이치에 어긋난 충고였다. 그들은 페이스북의 논쟁은 역사이고 사적인 전화는 역사가 아니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듯하다. 미안하지만 그건 아니다. 나는 온라인에서의 일은 온라인으로 끝내야 한다는 내 나름의 ‘역사의식’(?)을 가지고 있다.

얼마 전 통합진보당의 사무총장을 지낸 분이 정세 강연에서 ‘조선은 임진왜란 때 망했어야 할 나라’라는 말을 했다고 문제를 제기한 후배가 있었다. 이에 통합진보당의 진보정책연구원장을 지냈던 조영건 고문이 이 논쟁에 들어와서 ‘대영제국의 역사가 토인비’의 말을 인용하면서, 대역사가 토인비도 조선은 가치 없는 나라라고 했으니 ‘조선은 임진왜란 때 망했어야 한다’는 말이 과히 틀린 것은 아니라는 취지로 말했다. 나는 후배를 상대로 한 그의 어조에서 근거 없는 권위의식 같은 것을 느꼈다.

그래서 나는 이 점을 비실명으로 거론한 적이 있다. 토인비는 영국 제국주의적 입장에서 전쟁을 선동한 적이 있는 사람이다. 그는 일제 강점기 일본에 가서 강연 중에 “조선은 방문할 가치조차 없는 나라”라고 말했다.

그런데 민중연합당의 대통령 후보를 지낸 김선동 전 의원이 들어와서 ‘과유불급’을 말하면서 “통일운동의 원로에게 지나치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나는 다음날 저녁 조영건 고문의 전화를 받았다. 조 고문은 내 말을 1초도 듣지 않고 당신 말만을 일방적으로 하더니 전화를 끊었다. 나는 그가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이 없다. 단 하나 기억나는 것은 ‘임진왜란 때 선조는 당연히 사형 당했어야 할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이런 이야기들을 불편해하는 사람이 많다. 그런데 순암 안정복은 바로 이런 것까지를 밝히는 것이 역사임을 우리에게 가르쳐 준다. 이런 것이 바로 조선시대의 역사정신이었다. 어떤 사건을 기록하려면 선후전말을 다 기록해야 한다. 선별 기록은 자연히 과장 또는 과소라는 왜곡을 낳는다


광해군을 재평가한다고? ‘혼군 광해’와 ‘역신 강홍립’ (2)

언제부터인가 대한민국에서 광해군이 부활했다. 조선 시대 내내 폐왕으로서 ‘혼군(昏君)’이라 일컬어지던 광해는 어떻게 해서 부활된 것일까? 역신으로 삭탈관직되었다가 청나라 덕분에 복권되었던 강홍립도 대한민국에서 덩달아 명예를 회복했다.

그런데 광해의 부활과 강홍립의 복권은 가당한 일일까? 자기가 역사를 조금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말한다. 미-중 교체기를 맞아 명-청 교체기 때의 광해군처럼 중립외교를 펼쳐야 한다고, 또한 실용외교를 펼친 광해군은 ‘고독한 군주’였다고.

사람들은 이 근거로서 1618년 명이 후금을 치기 위해 조선에 지원군을 요구했을 때 광해군이 마지못해 1만 3,000의 군사를 파견하면서 지휘관 강홍립에게 밀지를 내렸다는 사실을 든다. 그들 말대로 광해가 밀지를 내린 것은 사실인 것처럼 보인다. 밀지는 관형향배(觀形向背), 즉 형세를 보고 싸우든지 말든지 하라는 내용이었을 것이다.

강홍립은 심하전투에서 청군에 대패하여 투항했다. 이미 9,000의 병사가 죽은 괴멸 상태에서였다. 조선군이 일거에 대패한 이유는 청군이 강해서가 아니라 조선군의 준비 부족과 전략 부재 때문이었다. 광해는 궁궐 공사에 정신이 팔려 훈련도 안 된 군사를 머릿수만 채워 파병했다. 겨울철에 군대를 보내면서 누비옷조차 마련해 입히지 않았다.

순암 안정복은 광해의 무리한 궁궐공사를 비판한다.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난 후 인목대비는 광해의 잘못된 정치를 비판하는 교서를 발표했는데 그 중 두 번째로 거론된 대목이 “민가 수천 채를 철거하고 궁궐을 두 동이나 건립하는 등 10년 동안 토목공사가 끊이지 않았다”는 내용이었다.

광해군을 재평가하는 사람들이 언급하지 않는 부분이 바로 이 대목인데, 이것은 의외로 심각한 일이었다. 광해군은 임기 내내 궁궐공사만을 벌였다. 이때 창덕궁, 창경궁, 경운궁, 경덕궁, 인경궁, 자수궁 공사가 계속되었다. 그의 곁에는 언제나 간신배 조귀수가 있었다.

토목공사에는 당연이 재정이 들어간다. 광해군은 근거도 없이 결포세를 신설해 마구 거두어들였다. 광해는 국방이나 민생은 안중에도 없었다. 광해는 도망해 온 중국 병사 출신 풍수쟁이 사문용과 역시 풍수쟁이인 승려 성지를 총애하면서 궁궐공사에 몰두했다. 이때가 언제인가? 임진란과 병자란의 어간, 즉 비상시국이요, 총체적 난국인 때였다.

다음으로 강홍립에 대해 알아보자. 순암의 《열조통기》에서는 강홍립에 대한 전기를 ‘강홍립전’이라고 하지 않고 ‘강노전(姜奴傳)’이라고 한다. 이름도 쓰지 않고 노예라고 부른 것이다.

인조반정 이후 곧바로 이괄의 반란이 있었다. 당시 한명련은 반란군의 수뇌 급이었는데 이괄과 함께 죽음을 당했다. 이후 한명련의 아들 한윤은 후금으로 탈출하여 강홍립을 만난다. 강홍립은 한윤과 함께 누르하치에게 조선으로 쳐들어 갈 것을 청했다가 ‘조국을 배반하는 놈들’이라고 힐책만 당하고 물러났다.

그런데 홍타이지가 집권하고 정세가 격변하여 청이 조선을 침공하게 되는데 그것이 정묘호란이었다. 이때 강홍립은 길잡이가 되어 청군을 인도했고 휴전 협정 때는 통역을 맡았다.

이런 사연으로 광해와 강홍립은 조선시대 내내 혼군과 역신으로 인식되었다. 그런데 일제 강점기에 들어서 역사를 보는 관점에 돌연 이상한 현상이 나타났다. 일본인 식민사학자 이나바 이와키치가 광해군을 ‘실용주의 외교로 백성에게 은택을 입힌 군주’라고 재평가하고 나선 것이다. 여기에는 조선인에게 명을 배척하고 만주의 이미지를 좋게 만들고자 하는 저의가 있었다.

당시 일본은 만주를 침공하여 위만주국을 세우고 ‘만주와 조선은 하나’라는 만선일체론를 내세울 때였다. 이를 가리켜 ‘만선사관’이라고 하는데 이른바 식민사관의 변종일 따름이다. 이처럼 광해군을 재평가하는 것은 식민사관이라는 보이지 않는 올가미에 걸려드는 자멸 행위이다. 그리고 강홍립은 요즘 법으로 하면 적군에 가담해서 아국을 침공하는 여적죄에 해당한다. 참고로 여적죄에는 무기형이 없고 사형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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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   꺼져잉~~  2017년12월19일 01시39분    
굿모닝 광해군

나는 역사 속에서 광해군이라 불리워지는 사람이다. 조선 왕조 14대 임금 선조의 아들이요, 16대 임금 인조의 숙부이되 '祖'나 '宗'의 묘호를 얻지 못하고, 왕자때 이름 광해군으로서만 영원히 기억되는 불운한 왕이다. 폭군에 패륜아라는 오명을 쓴채 반정군에 의해 왕위에서 끌어내려졌기 때문이다.

나의 계모이자 아버지의 정실부인인 인목대비는 반정 후 폐위된 내 죄악을 조목조목 나열했다. 자잘한 것은 없는 것으로 넘기더라도 나의 죄악은 크게 세 가지였다.

폐모살제(廢母殺弟), 즉 나보다 아홉살 어리긴 하지만 엄연히 어머니뻘인 자기를 폐서인하고 자기 아버지를 죽였으며, 동생인 영창대군을 죽인 패륜을 범했다는 것이고, 과도한 토목공사로 백성을 도탄에 빠뜨린 죄에, 결정적으로 명나라에 대한 사대의 예를 소홀히 하고 오랑캐 후금과 '밀통'하였다는 것이다.

폐모살제는 어쩔 수 없는 나의 허물이다. 당쟁의 와중에서 나는 나보다 아홉살 어린 어머니 인목대비를 폐위시켰고 그 아버지를 죽였다. 또 내가 지시한 일은 아니지만 아홉살 난 영창대군이 펄펄 끓는 방 안에서 쪄 죽임을 당했으니 실로 할 말이 있을 수 없도다. 그러나 이를 일컬어 패륜이라 할라치면 조선왕조 스물 일곱 임금 가운데 온전한 자가 누구랴. 내 후임자 인조만 해도 아들과 며느리 손자 셋까지 다 죽여 없앴는데..... 토목공사 건 역시 그렇다. 전란통에 궁궐도 관청도 모두 잿더미가 되어 버린 나라에서 국왕으로서 그렇게 못할 일이었을까.

그랬다고 치고 넘어가자. 사실 가장 내가 왕위에서 쫓겨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세번째였다. "再造之恩(나라를 다시 만들어준 은혜)의 명나라를 배신하고 후금과 '밀통'하였다"는 것이다.

나는 임진왜란이 터진 직후 세자가 되었고 압록강 넘어 도망갈 궁리에 여념이 없던 아버지 선조를 대신하여 최전방을 누비면서 적군에 맞섰다. 그 전쟁의 막전과 막후를 어떤 조정의 신하보다도 더 상세히 알며, 우리를 '도우러 온' 명나라 군의 활약(?) 역시 그 누구보다 가까이에서 지켜볼 수 있었다.

아버지 선조는 북쪽을 감히 등지고 앉지도 않을만큼 명의 은혜에 감사했고 어떤 얼빠진 선비는 "중국인들은 우리 조선 인민의 아버지"라고까지 했다지만 그들은 결코 우리를 도와 주러 온 것이 아니었다. 자기네 땅에서 싸우기 싫었을 뿐이며 입술이 없어지면 이빨이 시리다는 그들 나름의 교훈을 따랐을 뿐이다. 그들은 벽제관 전투 이후에는 제대로 싸우지도 않았으며 실로 전투에는 무능하고 약탈에는 만능인 최악의 군대였다. 오죽하면 백성들이 왜군은 얼레빗이요 명군은 참빗이라고 했을까.

그들은 정작 우리 군대가 왜군을 공격하려들면 기를 쓰고 막았다. 한산도의 막강 수군은 임진년 이후 전투를 치르지 못했고 육지에서도 왜군을 공격했다는 이유로 유성룡 이원익 이하 고관들과 군 수뇌부가 명나라군의 일개장교 앞에 꿇어 엎드려 수모를 받은 것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역사상 유례를 찾을 수 없는 기이한 주권의 양도”가 이루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이 말은 1950년 경인년, 이 땅에 온 美利堅(미국) 장수가 너희 나라 군대의 작전지휘권을 선사받고서 내뱉은 말이다마는......

세월이 흘러 내가 왕위에 있던 1616년 여진족 누르하치가 후금을 세우고 왕을 칭했다. 나는 그를 잘 안다. 임진왜란 당시 우리에게 2만명의 구원병을 보내겠다고 거드름을 피우던 인물이다. 그 옛날 금나라 시절부터 "여진족이 1만이면 천하가 그를 감당할 수 없다"고 중국인들이 두려워해 마지않던 여진족이 드디어 통일 국가를 세운 것이다. 나는 직감했다. 저 무능하고 썩어빠진 명나라가 불길처럼 일어나는 신흥 후금의 철기병들을 감당할 수 없을 것임을.

아니나다르랴, 1618년 후금의 누르하치는 명나라에 대한 공격을 개시했다. 우리가 임진년에 왜군한테 당한 것처럼 순식간에 만주지역을 상실해 버린 명나라는 우리에게 구원병을 청했다. '再造之恩'을 갚으라는 것이다. 너희 나라 왕이 압록강까지 쫓겨 왔을 때 그를 도와 나라를 회복한 것이 누구냐는 것이었다. "너희 나라의 자유를 위해 우리의 젊은이들이 피흘려 죽어간 것을 벌써 잊었느냐"는 것이었다. 후손들이여... 어디서 많이 들어본 소리같지 않느냐? 너희는 낙동강까지 쫓겨간 적이 있었다지.

내 신하들, 그리고 재야의 말많은 선비들, 그리고 덩달아 백성들은 명나라에 대한 은혜를 뼈에 새기고들 있었다. "중국인들은 모두 우리 조선인들의 아버지"이며 "명나라의 은혜를 잊는 것은 짐승만도 못한 행위"라는 것이 나의 신민들의 상식이었으며 누가 여기에 딴지라도 걸 라치면 천하의 난신적자로 낙인찍히기 십상이었다. 임진왜란이 끝난지 20년 가까이 되었으되 그 숭명사대(崇明事大)의 벽은 굳건했고, 명나라 사신들이 와서 수만냥의 은을 긁어가도, 그들이 어떤 횡포를 부려도, 우리 신민들은 얌전했다. 내가 구원병 파견을 거절하고 있을 때 아마 철없는 유생들이나 머리 허연 권신들이나 이렇게 외치고 있었을 것이다.

"하늘이여 우리 임금님의 마음을 돌려 명나라를 돕게 하옵소서."

후손들이여.. 너희들 역시 비슷한 소리를 들었을 것이다. 덕수궁 앞 너른 터(너희들 말로 시청 앞 광장)에서 어느 야소교 목사가 외치는 소리가 저승까지 들렸느니..... 내 기억에 "부시 대통령의 마음을 돌려 미군 철수를 막게 하소서.."라고 했던가.

나는 미칠 것 같았다. 7년 전란통에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고, 길바닥에 기어다니는 사람들이 풀을 씹어삼키다 푸른 물을 토하며 죽는 꼴을 지켜본 나였다. 그 참혹한 전쟁이 끝난지 20년도 채 안된 지금, ‘대의명분’과 ‘보은’을 위해 또 한 번의 전쟁에 휘말려야 한다는 말인가. 동서남북 당파를 막론하고 거의 모든 신하들이 나에게 구원병을 보내라고 아우성을 쳤다. 하다못해 나를 지지하여 왕위에 앉히는데 지대한 공헌을 했던 권신 이이첨마저 거기에 적극 찬동하고 나선 판이었으니 할 말이 없었다.

그럼에도 나는 외교적 해결책으로 명의 압력과 후금의 위협을 피하려고 기를 썼다. 뻔질나게 사신들을 명나라에 보내어 우리나라의 피폐함과 왜란의 상처를 이유로 군대를 일으킬 수 없음을 호소했고 심지어는 명나라에 “경솔하게 행동하지 말고 만전을 기하라”는 충고를 하려고까지 했다. 그러자 비변사에서는 난리가 났다. “속국의 처지로 대국에 대해 이래라 저래라 하는 것은 말이 안된다”는 것이다.
아둔패기들이여, 사대에 눈 먼 장님들이여. 나쁜 피는 물려받기도 쉬운 법이려니, 너희들 대에도 그런 인간들은 있더구나. 갈라진 너희 나라의 반쪽과 명나라같은 대국 미국 사이를 ‘중재’해 보려는 이들에게 ‘건방지고 철없다’는 욕설을 내뱉는 자를 보았다. 이제는 혀를 차려해도 찰 혀가 없느니....

우여곡절 끝에 1만여 명의 명나라 구원병이 편성되었다. 1만명 하니 별 것 아닌 것 같으냐? 그것은 조선 전체의 장정들을 쥐어짠 병력이었다. 평안도 3천5백, 전라도 2천5백, 황해도, 충청도 각 2천 등 전국 각지의 생때같은 장정들이 압록강변 평안도 창성으로 모여들었다. 나는 이들이 “이미 패할 것을 알고 있었다” (광해군일기) 창을 제대로 쥘 줄도 모르는 어린 양 같은 군대를 피에 굶주린 철기 앞에 내몰면서 어찌 임금으로서의 자책이 없었겠느냐. 그 애꿎은 희생도 희생이려니와 그것이 빌미가 되어 임진왜란 이상가는 참화가 덮칠지 모르는 나라의 임금으로서 베개를 높이하고 잠을 이루었겠느냐.

구원군 도원수 강홍립을 불러 나는 이렇게 이야기했다.
“명나라군 장수들의 명령을 그대로 따르지 말고 신중하게 처신하여 오직 패하지 않는 전투가 되도록 하라.” 이 말을 두고도 피끓는 유생들은 “대의명분에 어긋나는 망발”이라고 펄펄 뛰었겠으나 나는 한 발 더 나아가 후금에까지 비밀리에 손을 댔다. 정확한 진상은 나만이 알고 있고 너희들 대에까지도 설이 분분한 이야기지만, 나는 후금과 통하고 있었다. 누대의 원수, 우리나라 북변을 승냥이처럼 위협하던 적국 후금과 나는 ‘밀통’할 수 밖에 없었다. 그 결과는 무엇이었냐고?

명나라의 10만 대군이 전멸했던 사르허 전투에서 우리 군대는 후금군의 철기병에 완전히 포위되었다. 죽음을 각오한 시점에서 후금군이 먼저 우리에게 사신을 보내 항복을 권했다. 그들은 우리의 처지를 이해하고 있었다. 물론 그 이해는 내가 시킨 것이었다만.

강홍립의 항복이 알려지자, 조정은 벌집 쑤신 듯했다. 강홍립의 가족을 잡아 처벌하라는 상소가 빗발쳤고 또 한 번 군을 일으켜 후금을 치자는 주장도 목소리를 높였다. “까짓거 전쟁 한 번 합시다”라고 너희대의 국회의원이란 관직의 인물도 기염을 토했다지. 나는 피를 토할 지경이었다. 입으로 전쟁을 하는 무리들, 그 입에 내둘려 마침내 전쟁이라도 터지면 누구보다도 압록강변으로, 지리산으로, 너희들 시대라면 미국으로 비행기 타고 도망갈 놈들이 아닌가. 저 놈들의 식솔들 중 군대에서 칼 잡고 있는 놈이 몇이나 된단 말인가. 너희 대나 나의 때에나 군대란 어둠의 자식들의 집단이었느니.....


대의명분에 불타오르는 신하들은 후금 진영에 붙들린 강홍립이 비밀리에 보내온 밀서를 접수하는 것조차 “적과의 밀통”이라고 시비를 걸었다. 그들에게 강홍립은 적과 내통한 쳐죽일 놈이었고 그를 은근히 옹호하는 나는 제 구실을 못하는 군주였다. 마침내 나는 폭발했다.

“중원의 형세가 참으로 위태로우니 안으로는 자강을 꾀하고 밖으로는 고삐를 죄어 한결같이 하여야만 나라를 보호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인심을 보면 안으로는 일을 분변치 못하면서 밖으로는 큰소리만 친다. 신하들이 하는 소리를 들으면 전부 압록강에 나아가 결전해야 한다는 것인데.... 참으로 가상하기는 하다. 그렇다면 무사들이 서쪽 변방 (후금과의 국경)을 죽을 곳으로 여겨 부임하지 않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는가? 생각이 한참 미치지 못하고 나오느니 헛소리 뿐이로다........... 우리나라 사람은 허풍으로 나라를 망칠 것이다.”
(광해군 13년 6월6일 광해군일기 중)

나의 생각은 점차 신하들에게 전달되어 갔다. 그러나 그들은 나의 충정을 이해하는 대신 내 발밑을 파기 시작했다. 폐모살제라는 빌미로 이미 패륜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쓴데다 “재조지은”을 잊은 배은망덕한 임금이라는 빌미가 덧붙여졌고, 이이첨 등 내 측신들인 대북파의 극에 달한 부패와 탐학은 그 빌미를 명분으로 축적해 주었다. “서인이 이를 갈고, 남인이 비웃는” 정치고립 상황은 내 말년 내내 지속되었고 마침내 운명의 날, 1623년 3월 12일 내 조카 능양군을 내세운 반정군이 창덕궁을 들이쳤고 나의 경호대장인 훈련대장은 엎드려 그들을 맞았다. 나는 다시 왕자 때 이름 “광해군”으로 돌아왔다.

그 이후 조선 후기 내내 나의 이름은 폭군과 혼군과 어두운 임금의 대명사였다. 각종 기록에서 폭군이라 함은 나보다 열배는 더 포악했던 연산이 아니라, 나를 일컬음이었다. 임진왜란 당시 아버지를 대신하여 전선을 누비며 백성들을 묶어세웠던 왕세자 광해군의 활약과 완강하기 이를데없는 벼슬아치들과 기득권 상인들의 발악 섞인 반대를 무릅쓰고 경기도 일대에 대동법을 실시했던 나의 개혁 정책과 어떻게든 전쟁을 피하고 우리의 살길을 찾아보고자 노력했던 나의 외교적 노력은 역사의 쓰레기통 속으로 사라져 갔다.

귀양갈 때, 나를 수행한 병졸들은 안방과 아랫목을 차지하고 나는 건넌방에서 재웠다. 심지어 계집종까지도 늙은 것,, 운운하며 욕을 보였고 아내는 목숨을 끊었고 아들은 땅굴을 파고 도망가다가 잡혀 죽었다. 며느리는 그 망을 보아 주다가 나무에서 떨어져 죽었다. 처참한 인생이여.........

그러나 나는 일 점 후회는 없다. 나는 최선을 다하였으므로. 한 나라의 왕으로서 내가 책임진 억조창생의 안위를 위하여 사력을 다해 신하들과 싸웠고 명나라를 구슬렀고 후금의 철기병을 달랬다. 그래서 불구대천의 적과 ‘밀통’하기도 했고 그것이 “天理를 멸하고 인륜을 끊어 위로 명나라에 죄를 지었고 아래로 만백성에게 원한을 맺히게” 하였을지는 모르나 나는 그것이 조선의 평화와 재건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노력이었음을 믿는다. 어제.... 너희들의 首長 이라 할 대통령이라는 이를 지켜보면서 나는 깜짝 놀랐느니...... 그 표정은 반정군에 의해 끌려나와 인목대비 앞에 꿇어 엎드렸던 순간의 나의 표정이었다. 말할 수 없는 답답함과 까닭 모를 후회, 그리고 나의 일은 끝났다는 담담함까지 어찌 그리도 똑같단 말이냐. 후손들이여 이제 너희에게 남은 일은 무엇일까.

나를 단죄한 이들은 집권하자마자 사람을 보내 평안감사와 의주부윤을 죽였다. 그들은 나의 대 후금 “햇볕 정책”을 최전방에서 실행하던 충실한 관리들이었다. 그들이 죽었을 때 우리나라에 피신해 있던 명나라 장수 모문룡이 쾌재를 불렀다고 하니,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것이다. 바로 그 4년 뒤, 후금은 조선을 공격했고(정묘호란) 또 그 9년 뒤엔 13만 대군을 이끈 청 태종의 친정(병자호란)으로 내 후임자 인조는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이마를 짓찧어 이마가 피범벅이 되는 굴욕을 맛보고 말았다. 거기에 국토는 또 한 번 피와 살의 진장밭이 되었고...........

전쟁이라는 포성같은 단어가 그다지 멀지 않게 된 후손들이여, 깊이 생각하라. 과거의 은원과 대의명분을 가지고 오늘의 득실에 무게를 다는 것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도 권할 일이 아닐진대, 나라와 나라 사이의 일에서야 더 말해 무엇하랴. 물론 피할 수 없는 전쟁도 있다. 하지만 그 전쟁이 대체 누구를 위해 벌어지는 것이며, 그 전쟁이 어디에서 벌어지는 것인가는 반드시 생각하라. 그 질문에 명확한 대답을 한 연후에 전쟁을 이야기하라.

나의 무덤은 경기도 남양주군의 어느 교회묘지 위에 나동그라져 있다. 내 형 임해군의 묘도 지척에 있어 그 후손들의 제사를 받지만 나는 그럴 후손도 없어 수백년 동안 제삿밥 얻어먹은 적조차 없다. 하지만...... 그래도 나는 후회하지 않는다. 나는 내 할 일을 했던 것 뿐일지니. 역사와 너희 백성들의 평가가 어찌 이뤄지든 나는 당시의 내 자리에서 최선을 다한 것이었을지니..... 그러나 그 최선을 다한노력이 무위로 돌아가는 것을 막지 못한 것조차 나의 책임이었을지니..... 나는 그렇게 담담히 돌아눕는다. 나의 잠을 깨운 시끄러운 소음에 대해 이렇게 한 마디 넋두리를 남기고.......

이상... 저승에서 광해군의 코멘트였습니다.

[출처] 굿모닝 광해군|작성자 직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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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5]   뚝이  2017년12월19일 18시50분    
갑수옹은 너무나 조선왕조실록을 신뢰한 나머지 패자의 가록은 살펴볼 마음이 없는것 같소...대동법 하나만 해도 광해의 치적이 사료되는데 말이죠..선조가 죽일놈이지 빈천지교는 불가망이고 조강지처는 불하당이라 했거늘 전쟁때 죽을 고생한 세자를 폐하려 하다니...양심이 있으면 중전이 죽었을때 양위하고 물러났으면 홍타이지한테 삼배구고두의 치욕은 없엇을것을 말이야 나같아도 왕권을 위협하면 다 죽였을거야 아마...능창군죽일때 능양도 죽였어야 했는데 광해의 실책이였지...이방원이 봐 사돈이고 뭐고 싸그리 정리하고 나니 세종대왕이 나왓네
(179) (-94)
 [3/5]   최인호  2017년12월19일 19시08분    
‘대영제국의 역사가 토인비’의 말을 인용하면서, 대역사가 토인비도 조선은 가치 없는 나라라고 했으니 ‘조선은 임진왜란 때 망했어야 한다’는 말이 과히 틀린 것은 아니라는 취지로 말했다. 나는 후배를 상대로 한 그의 어조에서 근거 없는 권위의식 같은 것을 느꼈다. / 무차별적 국가침공질쟁이, 선진적 성고문쟁이,떼학살 자유주의쟁이,배타적 숫컷원숭이신 아버지 하느님놈의 더러운 나라 / 학살질쟁이 양키나라 미국제국주의 못지않게 천하고 역겹고 야비하고 차라리 존재하지 않았음이 마땅한 제국주의나라 영국 /

얼마 전 통합진보당의 사무총장을 지낸 분이 정세 강연에서 ‘조선은 임진왜란 때 망했어야 할 나라’라는 말을 했다고 문제를 제기한 후배가 있었다. 이에 통합진보당의 진보정책연구원장을 지냈던 조영건 고문이 이 논쟁에 들어와서 ‘대영제국의 역사가 토인비’의 말을 인용하면서, 대역사가 토인비도 조선은 가치 없는 나라라고 했으니 ‘조선은 임진왜란 때 망했어야 한다’는 말이 과히 틀린 것은 아니라는 취지로 말했다. 나는 후배를 상대로 한 그의 어조에서 근거 없는 권위의식 같은 것을 느꼈다.

그래서 나는 이 점을 비실명으로 거론한 적이 있다. 토인비는 영국 제국주의적 입장에서 전쟁을 선동한 적이 있는 사람이다. 그는 일제 강점기 일본에 가서 강연 중에 “조선은 방문할 가치조차 없는 나라”라고 말했다.

그런데 민중연합당의 대통령 후보를 지낸 김선동 전 의원이 들어와서 ‘과유불급’을 말하면서 “통일운동의 원로에게 지나치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나는 다음날 저녁 조영건 고문의 전화를 받았다. 조 고문은 내 말을 1초도 듣지 않고 당신 말만을 일방적으로 하더니 전화를 끊었다. 나는 그가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이 없다. 단 하나 기억나는 것은 ‘임진왜란 때 선조는 당연히 사형 당했어야 할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민족정신 잘 거세되고 잘 관리되어 온 식민재벌앞잡이국가 때한민국에서는/ 오래전부터 정통제국주의앞잡이당과 일류제국주의앞잡이당이 서로 우애좋게 독과점적 식민앞잡이정권질을 독점해왔지요 / 어용적인 식민재벌앞잡이문화가 활짝 만개했지요 .계속 역겹게 만개한 상태이지요 / 이런 척박한 땅에서 뼈속까지 반인간적인 양키제국주의 영국제국주의 앞잡서서 빨아대는 짔꺼리는 늘상 횔행하지요 ..../ 내세우는 것과 달리 /정말 시덥지 않은 편견을, 애국심을 충심을 드러네 신앙고백 해대네요 /제국주의 앞잡이적 진보인사 /제국주의 앞잡이적 민중인사는 이제 그만......../ 차라리 대형 애국교회 성도님들이 종교산업현장에 나가/ 양키앞잡이신 ,자유탐욕 숫컷원숭이신 아버지 하느님을 큰 소리로 외처 부르는게/조국에 , 민족에 덜 모욕적이겠네요
(135) (-117)
 [4/5]   최인호  2017년12월19일 19시28분    
방씨오너놈이 여성테러질의 모범을 보였던 자유탐욕숫컷원숭이문화적 일류식민앞잡이신문.../ 조선일보가 /조국과 선조들에 대한 모욕과 자해행위질을 하루도 쉬지않고 /열심히 선동하십니다 / 우리 진보와 민중도 앞서가는 애국조선을 / 따라잡기 위해 분발합시다.
(139) (-107)
 [5/5]   최인호  2017년12월19일 22시44분    
토인비놈은 역겹고 / 광해군도 역겹다 / 오늘날 때한민국에서 제국주의 앞잡이질 정치꾼이 얼마나 많은 연예정치빠돌이들의 너저분한 열광을 처받는가 / 광해군이 오늘날 있다면 놈은 절대 고독할 일이 없을 것이다 /모범양키식민지 때한민국에 있다면 /일류양키앞잡이,일류식민재벌앞잡이짓을 잘 해낼만한/ 너가수적 인재일것이다. 조선일보적 인재로 보인다 / 극소수땅투기꾼과 토건재벌너네가족 몇마리/만의 탐욕을 /예쁘게 순종하며 채워드리려고 / 애국스포츠 영웅 내세워 홍보 기만 협잡질하면서 궁민 정신줄 거세하는데 진력하는 / 양키중심 국제원숭이사회에 견마지로를 다하는 평판좋은 시다바리 남한대통령 만세 ...최소한 이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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