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위안부가 있었던 시대 - 2회

구일본군 위안부 제도는 일본 사회의 매매춘을 배경으로 삼아 탄생했다는 것은 그다지 알려지지 않았다. 이 글은 위안부 제도와 일본 사회의 매매춘의 관계를 본격적으로 파헤치기 전에 전전戰前과 전중戰中의 일본 사회의 매매춘과 단속의 실상을 자료에 의해 드러내고 있다. - 역자 주

위안부가 있었던 시대 - 2회
- 노예, 매매춘 시스템의 부패 -

구일본군 위안부 제도는 일본 사회의 매매춘을 배경으로 삼아 생겨났다. 양자의 관계를 파헤치고 들어가기 전에, 먼저 전전·전중의 일본 사회 매매춘과 단속에 대해 살펴보자. 주1) 정책을 담당하는 내무성과 내무성의 관료, 단속을 담당한 각지의 경찰과 경찰관들에 의해 작성된 자료를 중심으로 검토한다.

□ 연간 2,278만 명이 매춘

에도 시대에 성립한 각지의 유곽은, 메이지 유신 후에도 유지되었다. 빈한한 가정의 여성들이 미리 빌린 빚과 상환에 몸을 팔게 되어, 매춘을 강요당하게 되었다. 메이지 정부는 1872년에 예창기藝娼妓해방령을 내어, 여성들을 노예처럼 구속하는 것을 금지했지만, 실효성이 없었다. 반대로 1900년 내무성령 「창기娼妓단속규칙」으로 공창 제도가 확립되어, 패전 후인 1946년 2월까지 계속되었다. 주2) 창기가 될 수 있었던 대상은 열여덟 살 이상의 여성으로, 경찰서에 나가 등록하고, 경찰의 감독을 받으며, 경찰의 허가를 받은 유곽에서만 영업을 허용받았다. 건강 진단을 받아야 할 의무가 있었다. 표면상은 타인이 창기의 연락과 면접의 자유, 폐업을 방해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다.

업자와 창기는 서로 독립적이며, 고용 관계가 아니고, 메이지 이후, 인신매매는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에, 공창 제도는 인신매매의 폐해를 낳지 않는다는 것이 1920년대 중반의 내무성 공식 견해였다. 주3)

구체적인 운용은 지방 관청에 맡겨져서, 1930년대에 공창 제도 폐지를 단행하는 현縣이 잇달아 나타났다. 주4) 다만, 매매춘이 근절된 것은 아니며, 공창 제도에 근거하지 않는 ‘사창私娼’은 남았다. 1931년 2월 내무성 경보국이 정리한 「공창과 사창」은, 전국 경찰의 보고를 근거로 유곽과 창기, 사창의 상황을 415쪽에 걸쳐 상술하고 있다. 전쟁 시대에 돌입하기 직전의 일본 매매춘의 전모를 대충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주5)

이 자료에 따르면, 유곽 지정지는 전국에 541개소이며, 업자가 11,154명이었다. 창기는 1929년에 50,056명, 유곽을 이용한 고객은 2,278만 명이었다. 창기 한 명당 455명을 상대하고, 20~50살의 남성이 한 사람당 평균 1.9회 이용한 것으로 계산되고 있다. 대도시 창기는 기루의 주인에게 평균 1,409엔의 빚이 있었다. 당시 유명 대학에서 대기업에 입사한 사람의 초봉이 73엔 정도였으니까, 그 20배에 가깝다. 장사 기간을 4~6년으로 제한하고 있는 지방이 많았다. 창기가 되고나서도, 의상이나 잡다한 일상용품 등 다양한 명목으로 추가 빚을 지게 되어, 최초 계약기간 안에 변제를 끝내지 못해 매춘을 계속하게 되는 여성이 많았다.

사창은 창기 이외에 매춘을 하는 여성을 말한다. 사창굴의 여성들 외에, 기생, 작부, 유곽이나 음식점 하녀, 카페의 여종업원 등 가운데 있었다. 본래는 위법이지만, 아무리 단속해도 없어지지 않아서, 내무성·경찰은 지역을 한정하여 묵인하고 있었다. 방임했던 것은 아니며, 경찰은 성병 대책이나 영업 감독이라는 명목으로 관여했다. 빚을 짊어지고, 포주 밑에서 매춘을 강요당하는 구도는 공창과 마찬가지였다. 창기가 될 수 없는 열여덟 살 미만의 여성이, 사창의 17%를 차지했다. 도쿄의 다마노이玉の井, 가메이도亀戸 같은 사창굴이 전국에 207개소가 있고, 12,181명의 여성이 있었다.

여성과 여성에게 매춘을 시키는 유곽이나 음식점, 포주집 등의 사이를 중개하는 소개업자가 전국에 5,630명이 있었다.

□ 매춘을 장려하는 국가

공창 제도에 대한 비판이 고조되어, 제도의 폐지를 요구하는 여론이 비등해지고 있던 1932년 9월 ~ 1933년 2월, 전국 경찰 간부들로 꾸려진 경찰협회의 잡지 『경찰협회잡지』에 내무성 사무관 고스게 요시지小菅芳次가 쓴 「공창 제도 재검토」라는 기사가 연재되었다. 주6) 고스게는 경시청 보안 과장 등을 역임한 내무성 관료이다.

고스게는 연재 1회에서 공창 제도의 역사를 회고하고, 2회에서 제도와 실태를 파헤쳐 간다. 인신을 구속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계약이 민법 규정에 비추어 무효임을 지적한 후, 고스게는 매춘업자와 창기는 독립, 대등한 사업자이고 주종 관계는 아니라고 하는, 정부가 내건 명분을, “겉으로 드러난 현실을 호도한 구차한 변명에 불과하다”고 비판했다. 

창기가 쓰라린 매일을 견딜 수 없어 폐업을 결심하고, 유곽에서 도망친 경우, 경찰이 여성을 붙잡아 업자에게 인계하는 일이 잇달아, 경찰에 대한 비판이 고조되고 있었다. 경시청은, 고스게가 보안 과장으로 근무하던 1931년 6월, 폐업을 신청하는 창기와 업자 사이에 경찰이 개입하는 것은, 창기단속규칙의 취지에 반할 우려가 있다고 하여, 문제가 없는 신청은 바로 접수하여 폐업하게 하도록 각 경찰서장에게 통첩을 보냈다. 창기단속규칙에서는, 경찰은 신청을 수리하면 바로 폐업하게 한다, 누구도 폐업을 방해해서는 안 된다고 정하고 있었다.

내무성으로 돌아가서, 전국의 풍속 단속을 주도하는 입장이었던 고스게는, 논문 속에서, 경시청 관내에서 규칙에 반하는 실태가 있었던 사실을 인정한 다음, 그러한 업자 밀착 대응을 “불필요하고 불합리하다”고 비판하고, “아직도 멍청하게 그 유풍을 답습하고 있는 지방도 있다”고 폭로하며, 업자에게 붙잡힌 여성에 대해 “유형무형의 사적 처벌도 있다”고 지적했다. 더욱이 규칙이 보장하는 통신, 면접 등의 자유의 혜택을 누리고 있는 창기는 적다고 하며, 제도가 형해화되고 있는 점을 인정했다.

고스게는 3회에서 비판의 방향을 국가로 돌렸다.

국가가 공창 제도를 인정하는 것은, 결국 국가가 인신매매를 인정하는 게 된다. (생략) 현재의 공창 제도를 유지하는 한, 일본이라는 국가는 매음을 장려하는 듯한 모습을 드러내는 결과가 된다.

고스게는 사창도 공창과 마찬가지의 폐해를 안고 있다고 지적했다. 공창 제도를 폐지하면, 사창이 늘어나거나 성병이 만연하거나 한다는 이유로 제도의 존속을 요구하는 세력에 대해, 그 근거가 정당성을 얻고 있지 않다는 점을 설파했다.

최종회인 4회에서, 고스게는 공창 제도 폐지를 주장하는 오사카·도쿄 아사히신문, 호치報知신문, 고쿠민國民신문 등 각 신문의 논조와 세계적인 공창 폐지 흐름을 소개하고, “대세는 이미 결정되어 있다”고 결론을 맺었다.

현역 관료라고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심한 말을 구사한 고스게는, 나중에 히로시마현, 나가사키현, 교토부의 경찰부장, 가가와香川현 지사 등을 역임했다. 이런 경력으로 보면, 연재의 논조는, 즉각 관공서에서 쫓겨날 만큼 내무성·경찰 내부의 분위기와 동떨어진 것은 아니며, 그 시점에서는 일정한 공통 인식이 확산되어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다만 연재 후인 1934년 11월 12일, 일본성병예방협회가 개최한 좌담회에 출석한 고스게는, 공창 폐지가 “현실성을 지녀왔다”고 토로하면서도, 공창과 사창의 여성들의 인신매매 여부에 대해서, “상당히 난처한 설명입니다만, 인신매매는 아니라고 되어 있습니다”라고 답한다. 주7) 연재의 확고함에 비해 후퇴한 인상이 있지만, 그 저변의 사정을 해명하는 것은 앞으로의 과제로 미뤄둔다.

고스게와 같이 좌담회에 나온 경시청 의무과장 가토 간지로加藤寬二郞는, 기생의 성병 검사를 하는 의사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하며, 실제로는 열 명 가운데 대략 네댓 명이 성병에 감염되어 있는데, 여성들이 일하지 않게 되면 딱하기 때문에, 한두 명만 보고하는 실태가 있다고 밝히고 있다. 경시청은 사창의 성병 대책에도 나서고 있었는데, 실제로는 당시의 표준적인 의료 수준에 못 미치는 자의적인 운용이 이루어지고 있었던 듯하다.

『경찰협회잡지』에는, 같은 내무성 사회국 사무관 다케시마 가즈요시武島一義도 1935년 7~8월에 「자녀 인신매매 방지와 경찰」이라는 제목으로 기고하고 있다. 고스게가 있던 경찰국이 전국 경찰을 총괄하는 곳인데 비해, 사회국은 노동·복지를 관장하는 부서였다. 다케시마는 도호쿠東北의 가난한 농어촌에서 여성들이 기생과 창기, 작부 등으로 인신매매되고 있는 실상을 호소하며, 국가 차원에서 유효한 대책을 내놓지 않는 상황을 비판한 다음, “인신매매의 폐풍이 여전히 허용되어 좋은가 나쁜가, 갑론을박하는 것은 어리석기 짝이 없는 것이다”라고 단정했다. 주8)

횡행하는 위법 행위

국립공문서관은 내무성 내부 자료를 대량으로 소장하고 있다. 꼼꼼히 읽어가노라면, 경보국警保局이 조직 차원에서 공창과 사창의 문제점을 인식하고, 공식적으로 기록하고 있었던 사실을 알 수 있다.

1926년 5월의 「공창 개황」에서는, 매춘업자와 창기의 관계에 대해, “매춘업자 밑에 노예 관계에 처하는 것이 일상화되어 있다”고 술회하며, 독립, 대등, 자유의사라는 제도의 명분이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 업자와 창기 측이 교환한 계약에 포함된 바람직하지 않은 규정으로, 업자 합의 없이 폐업하지 못한다(야마구치山口현), 면접 제한(경시청) 등의 경우를 들고 있다. 이 규정들이 실행으로 옮겨지면, 창기단속규칙을 위반할 가능성이 나올 것이다. 기부岐阜현 조사에서는, 업자가 창기의 매상·지출의 계산을 속여서 부정한 이득을 취하거나, 업자가 부담해야 할 조합비와 세금을 창기에게 내게 하거나, 학대하거나 한 위법 의심이 있는 사례가 다수 발견되었다. 후쿠이福井현, 고치高知현에서도 같은 형태의 문제가 발견되고 있었다. 주9)
 
앞에서 소개한 「공창과 사창」에는, 한 발 더 들어가 명분과 실태의 괴리를 솔직하게 인정한 기술이 있다.

법제의 원칙이라는 입장에서 말하면, 금전 소비대차와 창기 직업과는 별개의 문제이지만, 사실상으로는, 유감스럽지만 그렇지 않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서로 관계가 없는 것인 금전 대차와 매춘은 실상은 한몸인 것을 내무성은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민간인끼리의 계약에 경찰 권력이 어디까지 개입하는 것이 가능한가 여부는 차치하고서도, 공창 제도가 얼마나 궤변 위에 성립하고 있었던 제도인가를 알 수 있다.

「공창과 사창」도 위법·부당한 의혹이 있는 계약의 사례를 들고 있다. 나아가 32개 현이 공창과 사창 소개업자의 문제적 행위를 보고하고 있고, 이 가운데 10개 현은 유괴와 사기, 사문서 위조, 외설과 같은 범죄 의혹이 있는 사례를 보고하고 있다. 여기까지 오면, 역시 궤변이라는 차원이 아니라, 일본의 매매춘 시스템은 범죄와 깊게 연계되어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공창 제도의 존폐 문제는 제국의회에서 자주 다루어졌다. 내무성은 그때마다, 입장을 정리한 자료를 준비하고 있었다. 1933년부터 1938년에 걸친 자료 주10)에서, 국내 차원에서 즉각 폐지는 단행하지 못한다는 기본적인 자세를 유지하면서도, 스탠스가 미묘하게 변해 가는 것을 간파할 수 있다.

1933년 12월 ~1934년 3월 제65회 제국의회 자료에서는, 공창 제도 존속에 집착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면서, “공창 제도를 인신매매에 의한 노예 제도로 보는 것은 오류”라고 하고 있는데, 66회(1934년 11 ~ 12월)에서는, “만약 정부가 공창을 폐지한다고 하면”이라고 에둘러서 표현하면서 폐지 방향성을 드러냈다. 67회(1934년 12월 ~ 1935년 3월)에서는, “매음을 공적으로 허용하는 것은 (생략) 부녀 매매를 촉진시킨”다고 한 걸음 더 나아가고 있다. 중일 전쟁이 시작되고, 위안부가 속속 중국으로 송출되고 있던 시기인 73회(1937년 12월 ~ 1938년 3월)에 공창 제도에 대한 한층 강한 표현이 등장한다.

이런 존재는 오히려 국민 풍기 문란을 불러오고, 인신매매를 촉진하며 (생략) 정부에서는 공창 제도를 폐지, 곧 법에 의한 매음 제도의 공인 철폐를 간절히 바라며(생략)

내무성은 1934년부터 1935년에 걸쳐서, 물밑으로 도쿄를 포함한 부府· 현縣 단위로 공창 제도를 없애가며, 음식점이나 작부로 전향하게 하는 등으로 매춘을 묵인하는 방향으로 검토하고 있었던 듯하다. 주11) 『도야마富山현 경찰사史 상권』은 1935년 4월에 이런 방침이 내무성에서 전달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상세한 내용은 불명이다. 주12) 내무성·경찰 내부에서, 어떤 논의를 거쳐, 무엇이 결정되고, 실태에 어떤 영향을 끼쳤던 것일까. 더욱 심층적인 규명이 기대된다.

야쿠자와 결탁하는 업자

매춘 단속을 직접 담당했던 지방의 경찰이 주로 전후에 정리한 공식 자료 안에도, 전전·전중의 공창 제도와 사창의 문제점을 언급한 기술이 다수 있다.

후쿠오카福岡
창기는 미리 빌린 돈前借金에 속박되어 있어 전혀 자유롭지 않고, 새장 속의 새로 불리고 있었다.
주13)

효고兵庫
자유 의지 존중이라는 명분도, 실질상으로는 미리 빌린 돈이라는 형태에 유명무실화되어 버렸다. (생략) 공창 제도는 여성 인권 무시 위에 성립하고 있다.
주14)

고치高知
창기는 업자에게 완전히 돈으로 속박된 상태에 처해, 엄격한 감독을 받으며 창기 직업에 종사하고 있었다.
주15)

덧붙여, 기묘하지만, 효고의 기술과 똑같은 표현이 아오모리靑森에 있다. 기부에도 후쿠오카, 효고와 비슷한 표현이 있다. 비슷한 표현의 조합은 다른 데도 있다. 다른 현의 기술을 베껴 쓰는 것이 횡행하고 있었던가, 누군가가 기초가 되는 문장을 준비하고 있었다고 생각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소개업자에 의한 범죄와 부정이 있었던 것을, 아오모리, 아키타秋田, 야마가타山形, 후쿠시마福島, 가고시마鹿兒島 등 각 현의 경찰이 명기하고 있다. 야마가타에서는, 유곽을 경영하는 폭력단 두목이 적발되어, 공갈, 횡령 등의 죄로 기소, 1931년 유죄 판결이 확정되었다. 주16)

1943년에 간행된 『오이타大分 경찰사』에 따르면, 1938년 10월, 현縣 경찰부는 유곽과 같은 상행위를 하고 있는 요정과 음식점에 고용된 기생과 작부가 쉽게 빚을 갚을 수 없을 뿐 아니라, 도리어 잔액이 늘어서 매춘을 그만둘 수 없고, “사람의 도리로는 용인할 수 없는 어린 부녀자들에게 매춘을 강요하여”, 성병에 전염된다거나, 학대한다거나 하는 폐해가 오랜 세월 계속되고 있다고 하며, 여성의 나이와 계약 내용, 추가 빚 등을 규제하고 단속하도록 통첩을 냈다. 주17) 전후, 시간이 경과한 후 편찬된 것이 아니라, 거의 실시간으로 쓰인 경찰 자료 가운데, 기생·작부의 비참한 상황이 기록되어 있다는 게 된다.

경시청 직원들로 꾸려진 자경회自警會와, 경찰협회 도쿄 이외의 각지 지부는, 각각 회원용 잡지를 발행하고 있었다. 거기에는 구체적인 체험에 기초한 매매춘과 단속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기술과 생생한 움직임이 다수 기록되어 있다. 보다 현장에 가까운 경찰관들의 육성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934년 8월의 『자경自警』은 경시청이, 공창 제도 폐지를 짐작하고, 이미 제도를 폐지한 군마群馬, 아키타현에 담당자를 파견해 조사하게 한 외에, 요시와라吉原와 가메이도亀戸 등 유곽과 사창굴이 있는 지역의 경찰서장들을 모아서 처음 논의를 가진 것을 전하고 있다. 같은 호에는, 「공창 폐지와 장래의 매음 문제」라는 주제로 모집한 현상 논문의 입선작품이 게재되어 있다. 1~3등의 경찰관 6명 전원이 공창 제도가 폐지되는 전제 위에서 논문을 쓰고 있다. 3등인 스가모巣鴨 경찰서 순사 사토 하루오佐藤春雄, 같은 3등인 우에노上野 경찰서 순사 나루치 히데오成智英雄는 공창제도를 “인신매매” “부녀를 마치 상품처럼 실질적으로 매매”라고 표현하며, 나루치는 나아가 사창굴에 약취略取, 유괴, 인신매매, 자유 박탈, 폭행, 상해, 공갈, 협박을 하며 생활하는 자가 창궐하고 있다고 경종을 울렸다. 주18)

1930년 12월에는, 경시청 보안과 담당자가 소개업자의 종업원 가운데, 여성에 대한 외설 행위, 사기, 유괴 등의 범죄를 저지른 자가 있다고 기고하고 있다. 주19) 당시의 과장은, 후에 공창과 사창 문제를 지적하는 논문을 쓴 고스게 요시지小菅芳次이다.

『자경』은 1930년대 들어서 1934년까지는 공창 폐지에 관련된 주장과 움직임을 적극적으로 게재하고 있지만, 다음 해는 단숨에 누그러지고, 1936년에는 공창 제도 존속론이 게재되었다. 공창 제도의 존폐를 둘러싸고 경찰 내부의 분위기가 흔들리고 있었던 사실을 엿보게 한다. 1935년 전후의 공창 존폐 문제를 둘러싼 움직임에 대해서는, 다시 언급한다.

나가사키현은 1934년 7월에 공창 제도를 폐지했다. 매춘을 전면적으로 금지한 것이 아니라, 사창은 존속시켰다. 직후인 8월, 경찰협회 나가사키 지부의 잡지 『경고警鼓』는 현縣 경찰부 경무과 후지오카 아키오藤岡章男의 「공창 폐지론」이라고 제목을 붙인 연재를 시작했다. 후지오카는 이 연재 속에서, 창기가 되는 여성들은 미리 빌린 돈이라는 경제적인 이유로 창기가 될 것을 강요당한 것이어서, 자발적인 의사에 의할 리가 없다고 하며, 공창 제도를 “인신매매에 유사” “노예적 대우”라고 비판하며, 폐지해야 한다고 호소했다. 주20) 깡패가 유곽을 출입하기도 하고, 매춘업자와 결탁해 창기의 폐업을 방해하고 있다고도 지적했다. 주21) 야마가타 사건과 도쿄 『자경』의 기술을 합해 생각하면, 매춘업계와 야쿠자, 폭력단과의 밀접한 연계는 전국에 확산되어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할 수 있다.

한편으로 후지오카는, 사창의 여성들이 손님을 선택하거나, 손님으로부터의 성교 요구에 응할지 말지를 자신의 의사로 결정하거나 하는 것이 가능하여, 이런 점이 공창과 근본적인 차이라고 지적한다. 공창을 폐지하고 사창을 남긴 현縣의 정책에 따르는 주장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후지오카는, “사창의 경우에 있어서도, 때로 혹은 포주 또는 고용주를 위한 음행을 강제당하는 일도 없는 것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고 술회하고 있어서, 매춘을 강제당하는 사창의 여성이 있는 것도 인정하고 있다.

없앨 수 없는 이유

공창 제도의 폐지를 요구하는 여론이 비등하고, 내무성과 경찰 내부에서도 이 정도로 많은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는데, 왜 정부는 발본적인 대책에 나서지 않았던 것일까. 유곽에서 여성에게 매춘을 시키고 대여금을 회수하는 것을 전제로 돈을 대여하는 계약을 유효하다고 인정한 판결이 많이 나오고 있는 것이, 자주 인용으로 제출되는데, 경찰이 눈앞의 범죄 피해자를 못 본 체하고, 때로는 업자 편이 되는 이유는 그것만인 것일까. 핵심에 다가가는 자료는 내가 본 것에서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내무성과 경찰의 자료에서 관계가 있을 것 같은 몇 가지 기술을 소개하고자 한다.

후쿠시마 경찰부장 우타가와 사다타다歌川貞忠는 1929년 11월의 현 의회에서 공창 폐지를 요구받고, 이렇게 답변했다.

폐지하고자 하는 경우에 있어서는, 또는 이 제도에 의해 영업을 하고 있는 바의 매춘업자의 기득권을 어떻게 할까, 또한 공창 계약을 하고 있는 바의 미리 빌린 돈을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경제상의 문제가 수반하며, 이런 것들이 공창 폐지라는 여론을 실현할 수 없는 하나의 원인은 아닐까(생략) 주22)

사유재산제하에서, 국가 권력이 민간인의 경제적인 권리 관계에 강권적으로 개입하는 것을 주저한 것은 사실일 것이다. 미리 빌린 돈의 취급은, 전쟁 말기 궁지에 몰린 일본 정부가 마침내 매춘 관련 업계를 강제적으로 축소시켰을 때도, 내무성과 경찰의 입장에서 골칫거리였다. 주23)

야마가타현 경찰부 보안과 풍기계風紀系의 경부보警部補 나가오카 만지로長岡萬治郞는, 1930년대에 심각한 현내의 젊은 여성 인신매매를 줄이려고 동분서주한 경찰관이었다. 나중에 야마가카 서장을 역임한다. 전후 자서전 가운데, 공창 제도 폐지를 요구하는 단체의 인신매매 방지 운동에 냉정한 태도를 취한 동료가 있었던 사실을 언급하며, 이렇게 지적한다.

매춘업자와 경찰과의 특별한 관계가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우란분재와 연말의 선물, 꽃놀이라든가 뭔가 행사가 있을 경우의 기부, 경찰관이 가면 환대하고, 특히 형사 사건에 있어서는, 매춘업자는 조사에 관한 정보 제공자인 점 등, 그런 점에서 업자에 대한 미움을 갖지 않는 경향이 있다. 주24)

나가오카의 회고담은 국가 차원의 정책 결정에 직접 관련된 이야기는 아니지만, 일선 경찰관 가운데 단속 대상인 업자와 친밀한 관계에 있는 인물이 있다면, 경찰이 하나가 되어  의연하게 대응을 하는 것은 어려웠을 것이다.

경시청의 『자경』은, 폭력단이 풍속업계에 기생해 자금원으로 삼고 있고, 나아가 그 배후에 있는 정당 관계자와 지방자치단체의 유력자가 단속에 간섭해 온다고 적고 있다. 주25)

공창 제도의 존폐 문제가 아니지만, 경시청 고마고메駒込 경찰서장 스즈키 에이지鈴木榮二는 1934년 4월, 『경찰협회잡지』에 기고하여, 많은 기생이 매춘을 하고 있다고 지적한 다음, 기생에 대한 성병 검사를 철저하게 할 수 없는 사정에 대해, 이렇게 술회한다.

메이지 유신 이후, 우리나라의 거의 모든 정치가가 요정 정치에 몰두하고 있었던 결과 (생략) 화류계에, 겉으로 드러나지 않게 정치적 사회적 세력을 심은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 (생략) (정치가가) 기생집 대변자가 되어, 공정한 직무를 집행하려고 하는 경찰관에게 뭔가 압박 또는 견제를 가하는 듯한 태도는 공사 혼동도 이만저만이 아니다(생략) 주26)

화류계란, 기생과 창기 업계, 화려한 밤거리와 같은 의미로 사용되는 말로, 여기서는 주로 기생에 대해 말하고 있다. 메이지 유신 이후 정계의 관행이 화류계와 유착을 불러오고, 정치가가 경찰에 압력을 가해 오는 것을 고발하고 있다.

범죄와 기만투성이 일본 매매춘 시스템은, 일본의 세력 확대와 함께 아시아에 널리 퍼지고, 이윽고 전쟁 시대를 맞이한다. 다음 회 이후, 그 경과에 주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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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이 분야에는, 여성사를 중심으로 연구가 축적되어 있다. 1990년대 후반 이후로 한정하더라도, 후지미 유키藤目ゆき의 『성의 역사학』, 후지노 유타카藤野豊의 『성의 국가 관리』, 오노자와 아카네小野澤あかね의 『근대 일본 사회와 공창 제도』, 세키구치 스미코關口すみ子의 『근대 일본 공창제의 정치 과정』, 하야시 요코林葉子의 『성을 관리하는 제국』 등 뛰어난 업적이 있다.

주2) 『후생성 50년사(기술편)』, 798쪽

주3) 『부인 아동 매매 문제 제3권』(아시아역사자료센터)

주4) 『유엔 부인 아동 문제 1건/ 부인 매매에 관한 동양 관계국 간 회의 관계 제2권』(아시아역사자료센터)

주5) 『다네무라種村 씨 경찰참고자료 제17집』,「공창과 사창」(국립공문서관 소장, 이하 다네무라 씨 경찰참고자료는 모두 국립공문서관 소장)

주6) 『경찰협회잡지』, 고스게 요시지小菅芳次 「공창 제도 재검토(1)~(4)」, 제385~390호

주7) 『体性』제22권 제2호(1935년 2월), 「공창 및 성병 예방에 관한 좌담회」

주8) 『경찰협회 잡지』제 421, 422호, 다케시마 가즈요시武島一義 「자녀 인신매매 방지와 경찰」

주9) 『다네무라種村 씨 경찰참고자료 제3집』, 「공창 개황」

주10) 『다네무라種村 씨 경찰참고자료 제25집, 48집, 60집』, 「제65의회 참고 자료」, 「제66회 제국의회 참고 자료」, 「제67의회 참고 자료」, 「제73의회 참고 자료」

주11) 『매매춘문제자료집성 [전전 편] 제5권』, 217쪽,  후지노 유타카藤野豊 『성의 국가 관리』 105쪽. 『일본여성운동자료집성 제9권』, 220쪽

주12) 『도야마현 경찰사史 상권』, 785쪽

주13) 『후쿠오카현 경찰사史 쇼와 전편』, 182쪽

주14) 『효고현 경찰사史 쇼와편』, 50쪽

주15) 『고치현 경찰사史 쇼와편』, 848쪽

주16) 『야마가타현 경찰사史 하권』, 462쪽

주17) 『오이타현 경찰사史』(1943년), 122~142쪽

주18) 『自警』제180호 114, 122~142쪽

주19) 『自警』제136호 25쪽

주20) 『警鼓』 제13권 제8호, 후지오카 아키오藤岡章男의 「공창 폐지론(1)」

주21) 『警鼓』 제13권 제9호, 후지오카 아키오藤岡章男의 「공창 폐지론(2)」

주22) 『후쿠시마 경찰사史 제2권』, 929쪽

주23) 『다네무라種村 씨 경찰참고자료 제113집』, 「경찰과장회의자료」

주24)  나가오카 만지로長岡萬治郞의 『내 젊은 날의 기록』, 33쪽

주25) 『自警』제145호 2쪽

주26) 『경찰협회잡지』제405호,  스즈키 에이지鈴木榮二 「기생 검매론檢黴論(매독 검사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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