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랑의 고전소통] 人物論, 神格化는 정권을 공고히 하는 전략

【영웅의 신격화】 인재는 만들어지기도 한다.

흔히 개국시조(開國始祖)에는 신화(神話)가 만들어진다. 이는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한 수단이다.

‘생사는 운명에 달려있고, 부귀는 하늘에 달려 있다’는 말은 봉건시대의 미신이라고만은 할 수 없다. 중국의 정통 천도관(天道觀)도 어떤 의미에서는 운명의 가치를 매우 중시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운명관에 기초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신비한 색채로써 인물을 꾸미고 형상화했던,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맹자가 제시했던 5백 년 주기의 역사 순환 발전론이다. 『좌씨전 左氏傳』=(공자의 『춘추』를 노(魯)나라 좌구명(左丘明)이 해석한 책)의 기록에 따르면 주 성왕이 상(商)을 멸망시킬 때, 천신에게 주 왕실의 천운을 물은 적이 있다고 한다. 그때 나온 해답이 주대는 30대까지 왕위를 이으면서 7백 년간 왕조를 유지한다는 것이었다. 이는 상고시대에 스스로 여론을 형성하는 매우 보편적인 방법이었으며, 이러한 천운(天運)사상은 맹자에 이르러 고도로 체계화되고 이론화, 되면서 후세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맹자는 일대 제왕의 흥망성쇠는 하늘이 내린 5백 년의 국운에 국한되기 때문에 이 기간이 지나면 다른 사람이 정권을 대신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른바 ‘5백 년마다 새로운 왕이 나타난다’는 말도 바로 맹자의 이런 주장에 근거한 것이다. 이러한 이론을 증명하기 위해 맹자는 일련의 역사 사실을 열거했다.

요순에서 상탕까지의 시기가 5백 년이었고 상탕에서 주 문왕까지가 5백 년이었으며, 주 문왕에서 공자에 이르는 시기 또한 5백 년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공자는 운명이 결정되어, 있는 사람이 아니라서 왕이 되지 못한 대신, 그 학문이 만대에 전해지면서 이른바 ‘소왕(素王-왕자다운 덕이, 있어 왕이 될 자격을 갖춘 사람)이라 불리게 되었다. 하지만 맹자의 시대에 이르러서도 주나라는 이미 7백 년의 연륜을 이으면서 여전히 왕조가 바뀌지 않았다. 이에 대해 맹자는 이렇게 해석을 내렸다.

“이는 하늘이 인간들이 평안하게 다스려지기를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면 자기 외에 또 누가 이를 책임지겠는가?”

물론 도의를 중시하는 맹자의 천도관은 어떤 의미에서 일종의 문화적 이상이라 할 수 있다. 문제는 그의 사상이 우아하고 고상한 상류층 문화의 범주에 속하기 때문에 사회적 심리로 내면화시킬 수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이런 사상은 인사(人事)를 외면하고 귀신을 따르는 음양가들의 손으로 넘어가 미신으로 변질, 되었고 이러한 미신은 또 종종 ’과학‘의 모습으로 나타나 민간 문화 범주의 보편적인 사회심리와 결합 되면서 강력한 설득력을 발휘했다.

기나긴 중국 역사의 흐름 속에서 기묘(奇妙)한 일들이 적지 않았다. 그리고 이 기묘한 사건들은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새로운 배열과 왜곡, 해석을 거치면서 기묘한 성질이 많이 희석되었다. 음양오행(陰陽五行)의 관념에 따르면 병오(丙午)년과 정미(丁未)년은 흉년이다. 전한의 예만 들어봐도 병오년과 정미년에는 내우외환이 특히 많았음을 알 수 있다.

한 고조가 병오년(BC 195)에 세상을 떠나자 대권은 여후의 손으로 넘어갔고, 여씨는 유씨 종족에 대해 피의 숙청을 단행하여 유씨 집안의 종묘를 거의 무너뜨렸다.

원광(元光) 원년(BC 134)은 정미년으로 하늘에 ’치우기(蚩尤旗)‘라는 혜성이 나타났는데, 이 해에 태자 유거(劉據)가 태어났다. 또 이 해에, 한은 흉노를 정벌했는데, 이때부터 약 30년 동안 쌍방의 전쟁이 그치질 않아 무수한 사상자를 냈다. 나중에는 진(陳) 황후의 무고 사건에 연루되어 정미년에 태어난 태자 유거가 그녀의 두 아들과 함께 피살되기도 했다.

한 소제(昭帝) 원평(元平) 원년(BC 74)도 정미년으로, 이 해에 소제가 죽고 창읍왕(昌邑王) 유하(劉賀)가 등극했다. 그러나 유하는 품행이 음란하여 오래지 않아 폐위되고 말았다. 한 성제(成帝) 영시(永始) 2년(BC 15)은 병오년이었고 영시 3년은 정미년이었다. 이 두 해 동안 후척인 왕씨 가문이 득세하면서 왕망(王莽)이 신도후에 봉해지고 조비연(趙飛燕)이 황후로 책봉되었다. 이는 한조의 기업이 왕망에게 완전히 빼앗기는 화근이 되었다.

사실 어느 해든지 환란이 빈번한 시대에는 재난이 발생할 수 있다. 단지 여러 가지 재난들이 신비화, 되면서 사람들이 이에 대한 사회적 원인을 찾게 되고, 그 결과 천운의 작용을 과신하게 되는 것일 뿐이다. 문제는 이러한 사고방식이 봉건 통치 이데올로기에 이용되어 왕권신수론의 사상적 근거를 제공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고의 가장 부정적인 기능은 신격화이다. 신격화의 기본 방식은 제왕과 관련된 행위를 신격화하는 것과 제왕 자체를 신격화하는 두 가지 형태로 나타나는데 대부분 천인감응(天人感應-자연과 사회의 모든 변화나 국가의 흥망, 인간의 재앙과 복은 결국 하늘에 의해 결정된다는 설)을 그 내용으로 한다.

정사와 야사를 불문하고 황제에 대한 신격화는 거의 모든 중국 사서에 보편적으로 존재하고 있다. 특히 대단한 위업을 이룬 황제들이나 개국 황제들의 경우 더욱, 그렇다. 『삼국지』의 기록에 따르면 유비는 키가 7척 5촌에 손을 내리면 무릎에 닿고 고개를 돌려 자신의 귀를 볼 수 있었는데 이것이 가장 전형적인 제왕의 외모라고 한다. 그리고 그의 집 동남쪽 담장에 뽕나무 한 그루가 자라고 있었는데 높이가 다섯 장이라 멀리서 바라보면 마치 수레 덮개 같았다고 한다.

또 『수서 隋書』의 기록을 보면 수 왕조의 개국 황제인 양견(楊堅)의 외모는 마치 용과 같았고 이마는 다섯 개의 기둥이 똑바로 늘어서 있는 듯한 형상이었으며 태어날 때부터 가슴에 ’왕(王)‘ 자가 새겨져 있었다고 한다. 그가 태어날 때는 방안에 자줏빛 안개가 가득했고 아기의 머리에 뿔이 나 있는 데다가 온몸에 비늘이 돋아 있어 그의 생모가 놀라서 혼절했다고 한다. 이때 마침 비구니가 집 앞을 지나다가 황급히 뛰어 들어와 양견을 품에 안고는 “장차 천하를 얻게 될 징조이니 걱정하실 필요가 없습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구당서 舊唐書』=(940년에 편찬을 시작하여 945년에 완성, 당 고조의 건국(618)에서 애제의 망국(907)까지 290년 동안의 당나라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의 기록에 의하면 태종 이세민도 태어날 때 두 마리 용이 공중에 나타나 사흘을 떠돌다가 사라졌다고 한다.

이러한 황제의 신격화는 비교적 단순하고 소박한 심리적 요소를 지니는 것에 비해 유방의 ‘삼변 三變’ 설은 이데올로기의 성격이 농후하다. 유방의 첫 번째 변화는 신의 모습으로 이 땅에 나타났다는 것이다. 기록에 따르면 유방의 모친이 용과 사랑을 나누고 나서 그를 낳았다고 하는데, 이러한 ‘용모야호(龍母夜號)’의 전설이 그의 내력을 그럴듯하게 실증해준다. 유방이 뱀을 칼로 베고 기병한 후에 한 노파가 뱀을 벤 자리에서 울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는 찾아가 그 사연을 물었더니 노파가 “내 아들은 백제(白帝)의 아들인데 뱀으로 변해 길을 가다가 오늘 적제(赤帝)의 아들이 휘두른 칼에 잘려 죽고 말았다우.” 라고 대답하더라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유방의 두 번째 변화는 등극 직후 장창(張蒼) 등 대신들의 주도하에 진(秦)대의 제도를 그대로 계승하고, 검은색을 숭상하여 사제(四帝)에게 제사 지내던 것을 흑제(黑帝)를 추가하여 자신이 흑제의 후예임을 자만하면서 오제(五帝)에게 제사를 올리도록 제도를 바꾼 것이다. 이는 충분한 조직과 예비음모를 통한 행동으로 유방이 정치 이데올로기에 의해 한층 더 신격화되는 계기가 되었다.

세 번째 변화는 유향(劉向) 부자가 역사의 순서를 뒤바꾼 것이었다. 이들은 이른바 ‘용모야호’가 바로 유방이 적제의 후예임을 예시하는 것이므로 그가 적통을 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오행순환의 이론에 따르면 요임금이 바로 적색 제왕이었기 때문에 한 왕조는 요임금의 후예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로써 유방은 적제의 아들이라는 지위를 회복함과 동시에 깡패에서 천자의 자리에 오르는 기적을 연출하게 되었다.

이처럼 동시대 사람들의 손에 의해 신이 만들어 지면서 이상이 현실로 변화하는 과정에서 ‘신도(神道)’가 날조되고 ‘설교(說敎)’는 농간으로 변질, 되고 말았다. 그리고 이러한 날조와 농간으로 인해 사람들은 점차 자아의식을 상실하고 스스로 신을 만들어 내는 도구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러나 중국 민족은 실제로 매우 지혜로운 민족이다. 아무리 황당하고 우매한 일일지라도 중국인의 해석을 거치면 어느 정도의 합리성을 도출하게 된다. 이러한 중국인의 지혜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스스로 자기를 극복하는 것이다. 스스로 자신을 완전히 믿는다면 남의 의심을 의식할 필요가 있을까? 우리가 신을 의심하되 날조하지 않을 때, 역사는 비로소 순조롭게 발전할 것이다.

이정랑 언론인(중국고전 연구가,칼럼리스트)

경인일보/호남매일/한서일보/의정뉴스/메스컴신문/노인신문/시정일보/조선일보/서울일보 기자, 편집국장, 논설실장 등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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