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 안병하 치안감과 경찰청 이야기 ⑧

https://tv.naver.com/v/8494970/list/294185

기억록을 보시면 한혜진씨가 장롱 밑에서 몇 장의 종이를 꺼내며 먼지 터는 장면이 나온다. 안병하 치안감이 사망하던 해인 1988년에는 5.18 청문회가 열기가 뜨겁게 달굴어져 있었고 안국장은 증인으로 채택되어 많은 고뇌에 빠져 있었습니다. 치안본부에서 증인 채택한 것이 아니라 군쪽에서 한 것으로 알고 있다.

그 당시 조그마한 가게를 하고 있었는데 많은 분들이 아버지를 찾아오셨다. 찾아 오신 분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청문회에서 이야기 하는 모습을 텔레비젼을 통해서 보았다. 그 당시는 아버님이 모 기관으로 부터 밀찰 감시당하던 때입니다.

아버님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어디에다가도 하지 못했고 조용히 집에서 아무도 없을 때 몰래몰래 조금씩 작성하셨습니다. 그리고 누가 볼까 봐 장롱 밑에 넣고 혼자서만 작성하셨다. 이 당시 아버님의 모습을 상상하니 마음이 아프다.

아버님께서 돌아 가시고 장롱속을 정리하다 보니 장롱속에 보자기에 싸인 검정색 정복이 있었습니다. 1980년 치안본부에서 강제해직은 되셨지만 공직자로서 양심적 본분을 다하셨기에 언제 가는 복직되시리라 희망을 놓지 않으셨던 것 같다. 그러나 1988년 돌아가실 때 까지 연락 한번 없었고, 장례식에는 문상 조차 오지 않았다.

안국장은 돌아 가실 때까지 3가지 일을 가슴 품고 괴로워하셨다.

80년5월 광주에서 전남경찰관은 혼신을 다했으나 힘이 없어 광주시민을 제대로 지키지 못했다.
80년5월 자신을 무조건 따르던 전남경찰관을 지켜주지 못했다.
80년5월부터 집안의 가장으로서 가족을 돌보지 못했다.

80년 신군부에 적극 동조하여 개인의 영달을 취한 경찰수뇌부들이 승승장구할 때 광주시민을 목숨 걸고 지킨 전남경찰관들은 강제해직, 파면 등으로 고통의 늪에 빠져들었다. 39년이 지난 지금도 명예회복은 커녕 억울함을 안고 한 분 한 분 세상을 등지고 계시다. 내가 전남경찰청에서 80년 전남경찰관 유족들에게 아버님을 대신해 큰절을 올리고 죄송한 마음을 표하는 사유이다.

올해 광주 관련 행사에서는 아버님을 대신해 호남인들에게 큰절을 올렸다. 80년5월21일 광주에서 2,000여 명의 전남경찰관을 수십만 명의 광주인들이 경찰을 지켜준 일이 있다. 아버님 비망록 첫 귀절을 보면 ‘호남인들에 감사’라는 것이 있다. 이 뜻을 아는 사람이 별로 없다.

이 귀절은 5월21일 벌어진 일에 대한 표현이다. 수 많은 경찰관들을 지켜 주었으면 경찰청에서 감사의 표현을 해야 하나 하지 않기에 내가 대신하는 것이다.

경찰청에서는 이야기 한다. 故 안병하 치안감 정신을 이어 받아 위민정신을 함양하고 민주경찰의 표상으로 삼겠다고 한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는 안병하에 대한 정확한 연구 없이 단순한 업적 평가로 안병하 정신을 계승한다는 발상이 어처구니 없다.

어느 토론장에서 이름이 알려진 평론에 유명한 작가와 공개 토론을 하였다. 능숙한 진행과 언변 부러웠다. 그러나 실상은 모르고 인터넷에 올라와 있는 이야기들을 아름답게 묘사한 것이었다.

토론 분위기에 맞지 않게 틀린 부분을 설명하고, 중요한 사실을 설명하였다. 안병하 관련 강연이 경찰관계자 모인 자리에서 가끔 있다고 들었다. 그러나 어느 강사 한 명이라도 우리 집에 자문을 구하고 자료 요청한 적이 한 번도 없다. 무엇으로 안국장 정신을 강연하는지 의아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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