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故 안병하 평전 ②

【1부 발포를 거부하다】

7. 보안사, 고문과 직위해제(5월 26일~6월 13일)

5월 26일 운명의 날이 밝았다. 이 날은 열흘간에 걸친 치열했던 항쟁의 마지막 날이었다. 신군부 수뇌부가 27일 새벽 0시 이후 ‘상무충정작전’, 즉 유혈소탕작전 감행을 결정한 상태였다. 계엄군 진입이 임박했다는 분위기가 광주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다.

26일 오후 1시 안병하 국장은 광주비행장 도경항공대 임시 막사에서 치안본부 요원 2명에 의해 서울로 압송됐다. 진압작전 개시 11시간 전이었다. 안 국장의 경질은 이미 어느 정도 예견됐었다. 5월 22일 전남북계엄분소장이자 전교사령관이던 윤흥정 중장이 갑자기 소준열 소장으로 교체되면서 안 국장의 거취도 시간문제로 보였다. 윤 사령관 역시 공수부대의 유혈 강경 진압에 내심 반발하여 공수부대 지휘관들에게 자제하라고 여러 차례 촉구했었다. 공수부대 현지 지휘관들은 윤 사령관에 대한 불만이 컸다. 신군부 지휘부는 그를 ‘체신부장관 영입’ 명분으로 전남북계엄분소장 자리에서 빼내버리고 시키는 대로 자신들의 말을 잘 들을 사람을 내려 보낸 것이다.

안병하 국장 역시 미리 무기소산을 지시함으로써 사실상 신군부가 경찰에게 암묵적으로 요구했던 발포지시를 거부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계엄사가 여러 차례 노골적인 ‘강경진압’을 요구하는 데도 시위진압의 원칙에 따라 ‘시민이 적이 아닌데 어떻게 발포를 할 수 있느냐’면서 경찰의 ‘시민 보호 임무’를 견지했다. 그러자 배후에서 실질적으로 강경진압을 주도하던 보안사의 감시가 노골화됐다.

윤흥정 전교사령관은 안병하 국장과 육사 8기 동기였다. 둘의 공통점은 어떤 경우에도 정치적 성향을 드러내지 않았다는 점이다. 육사 8기 동기생들 가운데 상당수가 5∙16쿠테타에 참여하여 정치적으로 출세가도를 달렸지만 윤흥정은 묵묵히 군인의 길만 걸었던 지휘관이다. 안병하 역시 경찰의 본분에만 충실했던 인물이다. 정권욕이 강했던 신군부는 ‘하나회’라는 사조직을 만들어 군의 주요보직을 장악하면서 세력을 키워왔었고, 급기야 그들이 5∙17비상계엄확대를 계기로 민주화를 요구하는 광주시민들을 향해 유혈진압을 주도했던 것이다.

합수부, ‘직무유기 혐의 연행’

26일 오전 도경찰국 경리계장이 안병하 국장을 옆에서 수행했다. 점심식사 때 평소와 달리 밥을 한 그릇 더 가지고 오라고 지시하면서 안 국장은 그에게 말했다. “이게 마지막 식사가 될 것 같다. 내가 서울로 떠나가는 것을 직원들에게 이야기하지 말라. 잘못하면 불상사가 일어날 수 있다.” 그래서였는지 안 국장이 서울로 압송되었을 때 이 사실을 알고 있는 경찰관은 거의 없었다. 마치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이 적군의 화살에 맞아 전사할 때 “내 죽음을 알리지 말라”는 마지막 당부와 같이 비장한 느낌이 묻어나오는 말이다.

26일 오후 1시, 치안본부 경찰 쎄스나 항공기가 광주공항에 도착했다. 신임 도경국장 송동섭 경무관이 내렸다. ▶송동섭은 안병하와 경찰고등교육반 제5기 동기생(23명)이라는 인연이 있었다. 안병하 국장의 후임으로 부임한 송동섭 국장은 당시 목포경찰서를 방문하여 이준규 서장에게 ‘만약 사태 시에 발포명령을 내릴 것인가?’라고 질문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준규 서장이 이에 제대로 답을 하지 못하자, 이 서장을 ‘직무유기’로 강력하게 제재를 가했다고 한다. (김태관 KBC PD, 다큐 ‘민주경찰 안병하’ 제작자)◀ 안병하 국장은 곧바로 그 쎄스나를 타고 치안본부 1부장과 공보주임 등 두 명의 호송을 받으며 치안본부로 향했다. 이때 안병하 국장의 비서였던 권문오 부속주임이 함께 따라갔다. 당시 광주비행장 경찰항공대 CP에는 직원 50여 명이 있었으나 안 국장의 연행 사실을 거의 몰랐다. 때문에 서로 이임 인사도 나누지 못한 채 떠났다. 서울에 도착한 안 국장은 김종환 내무부장관과 손달용 치안본부장에게 인사를 마친 후 치안본부 별관 정보과장실에 잠깐 들렀다. 권문오 부속주임은 정보2계장실에 남아서 약 2시간 정도 광주상황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 안 국장이 나타나지 않았다. 그 사이에 보안사 요원이 동빙고분실에 위치한 합동수사본부로 강제 연행해갔던 것이다. ▶권문오(안병하 국장 부속주임) 증언. 「순직진상보고」 161쪽, 2005. 안병하 국장이 압송된 날짜와 시각이 5월 27일 아침 계엄군에 의한 도청진압 직후인 것으로 알려졌으나 이는 사실과 다르다.◀ 당시 그의 나이 52세였고, 치안감 승진을 목전에 두고 있었다.

5월 28일자 신문에는 ‘안 전 전남도경 국장 직무유기혐의 연행’이라는 기사가 실렸다. 계엄사령부가 27일 안병하 경무관을 연행 조사 중인데, 21일 광주시 밖으로 물러나오면서 경찰병력을 제대로 지휘하지 못한 것 때문이라고 보도했다. ▶《조선일보》, 1980. 5. 28.◀ 미 국무성에도 안 국장의 연행 사실이 보고되었다. ‘5월 27일 16:00 현재 상황보고’라는 3급 비밀전문은 주한미대사가 서울에서 미 국무부장관에게 보낸 긴급 정보사항들을 담고 있다. 여기에 ‘상황이 통제 불능에 빠질 때까지 방치했다는 이유로 전라남도 경찰국장이 조사를 받고 있다는 보도도 있었음’이라고 기재되어 있다. <계속>

*저자 이재의
전남대 경제학과 졸업, 조선대 경영학 박사, 《광주일보》 ‘월간 예향’ 기자, 《광남일보》 논설위원.
1980년 5월 항쟁 당시 시민군으로 전남도청 상황실에서 활동, 그해 10월 체포, 1981년 5.18특사로 석방.
1985년 5?18 광주항쟁 최초 기록물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황석영 기록) 초고 작성, 2017년 전면개정판 공동 집필.
2000년 내외신 기자들의 5?18 취재기 The Gwangju Uprising(M.E, Sharpe)을 《뉴욕타임스》 특파원 헨리 스콧 스톡스(Henry Scott Stokes)와 함께 편집하여 미국에서 출판.
현재 5?18기념재단 비상임연구위원으로 활동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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