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주열의 異見] 피해자는 과연 누구일까?

긴 글이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답이 나온 이는 읽지 않으셔도 된다. 아직 명증한 답을 못 찾은 분들과 나의 좁은 소견을 나눈다.

요즘과 같이 흉흉한 시기에 대중의 정서에 반하는 이견을 가진다는 것은 마음 무거운 일이다. 걸핏 하면 2차 가해 운운하며 을러대는 이들이 주변이 넘치는 시제에 이견 제시는 2차 가해라는 낙인을 받기 쉬운 일인 것을 잘 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민주사회가 도덕주의적 자의에 세워지는 위험을 인권과 법치사회라는 이념으로 극복해 왔다고 믿는다. 법치가 최후의 보루는 아니다. 법의 판단이 무수한 희생자를 낳은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법치적 오류는 남아있는 증거들이 있지만, 도덕주의적 오류는 대중의 익명성 속에 자취를 감추기 때문에 심판하기 어렵다.

하나의 이견을 밝힌다.

1.
사람들은 박원순 시장이 성폭행이 아니라, 성추행을 한 사실이 너무 너무 부끄러워 스스로 목숨을 버렸다고 주장한다. A씨측 변호사가 찔끔 찔끔 피해사실을 밝히고 있으니, 그의 주장을 사실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며, 누군가는 그렇게 믿기를 의도하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미 고인이 되신 분이 자기를 방어하거나 변명하지 않는다고 하여 그대가 내리는 이런 일방적 판단에는 어떤 위험이 담겨 있을까?

과연 한 인간의 죽음에 대한 그대의 해석이 적절하고 옳은 것일까? 나는 욥의 친구들과 같은 경험적 사유의 오류를 이런 판단에서 보고 느낀다. 자신의 욕망, 판단, 경험에 맞추어 사랑하는 벗을 판단하고 실제로는 괴롭히며 버리는 것이다.

그대는 왜, 무슨 근거에서 박원순 시장의 죽음이 성폭력을 자인한 죽임이라고 간주하게 되었는가? 박원순 시장이 스스로에게 형벌을 내렸다고 주장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피해자 보호주의 원칙을 따르다 보니 피해자 편에서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아니면 그대의 경험에 비추어 그럴 것이라고 추정하여 판단하는 것인가? 박 시장을 옹호하다가는 젠더 인지도가 떨어지는 자라는 낙인과 비난을 받아 정치적으로 불리해질 것이 두려워, 누구보다 앞장서서 그리 주장하는 것인가?

박 시장이 이 세상을 떠나기 전에 고발자들이 어떤 주장과 항목들을 가지고 그를 고발하고 있는지 세세히 알고 있었을까? 그 모든 것을 다 인지한 후 스스로 용서할 수 없는 천인공노할 범죄라고 여겨 자신을 징벌한 것일까? 고발자들이 주장하듯 고의로 위압을 행사하며 그러한 범죄를 저지른 사실을 인정했기에 죽음을 택했을까? 

나의 판단은 “아니다.” 그는 고소 사건에 휘말린 것을 알았을뿐, 구체적으로 어떤 문제들이 고소되었는지 상세히 알 수 없었다. 다른 고소 사건들이 다 그러하듯이. 피고소인에게는 고소 사실이 뒤늦게 통보되는 것이다. (혹 그가 어던 경로로 고소인의 소장을 받아 보았을지 모르지만 나는 개연성이 없다고 본다.)

지금 우리 앞에서 A씨의 변호사가 거듭 거듭 “말할 수 없는 위압 속에서 4년간 지속적으로 성추행한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고 그대는 생각하는가? 그리고 그 변호사가 나열하는 범죄 리스트를 그가 충분히 인지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생각하는가?
- “위압”을 느낀 것하고, 위압을 행사한 것은 다르다. 졸병이 장군 앞에서 위압을 느끼는 것이 곧 장군이 졸병에게 위압을 행사한 것은 아닌 것과 같은 이치다. 이런 주장이 유통되면 군대는 즉시 해체되어야 한다.
- “4년간 지속적으로“라는 표현은 틀린 것이다. 지금알려진 바로는 A씨는 서울시에 2년 3개월 근무한 것으로 밝혀졌다.
- “지속적으로”, 라는 표현도 나는 동의하기 어렵다. 변호사가 내놓은 “주장”과 그 내용을 보면 더욱 그렇다. 
이런 주장에 박시장이 승복하여 스스로 자책과 회한에 싸여 세상을 버렸다고 생각했을까?
나의 생각에는 “아니다”이다.
그는 고발자들이 나열한 그 구체적인 내용을 알지도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그러니 죄책에 못 이겨 스스로 세상을 떠났다는 주장은 그를 거듭 억울하게 만드는, 그에게는 사후에 가해지는 제 2차 가해 행위다.
그렇다면, 그는 왜 스스로 세상을 떠났을까?

2. 
우선 정리가 필요하다.
나는 A씨가 성폭력 피해 사실을 “미투(나도 당했어)”한 것이 아니라, 법에 고소하며 법적 판단을 의뢰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랬다면 아마도 박 시장은 목숨을 버리지 않았을 것이다. 이분은 변호사와 2달여 협의 과정을 거치며 “미투”보다는 법의 위하력을 동원해서 공인인 박시장을 공격하는 방식을 택했다.

피해자냐 고소인이냐라는 논쟁은 사실 부질없는 논쟁이다. 나는 고소를 제기한 당시 “법적인 신분은 고소인이 맞다” 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만일, 그녀가 고소를 제기하며 스스로 대중 앞에 나서서 “저 사람이 나를 위압으로 지난 4년간 성추행 했답니다. 여기 증거가 있습니다.” 라고 고발을 했다면 나도 A씨를 피해자라고 부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A씨는 처음부터, 2차 피해가 두려워 공공의 세계에 호소한 것이 아니라, 법에 호소했고, 법적 절차를 기다리고 있던 사람이며, 지금도 신분 노출을 두려워하며 대중 앞에 나오지 않고 숨어서 지낸다. 사람들이 박시장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그녀에게 물을까 두려워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정직하고 진실했다면 진실의 힘을 믿으면 된다. 고소로 인하여 온 세상이 그를 파렴치하다고 비난하며 달려들 것은 충분히 생각했을 터, 박시장 만큼 위험하지 않다.

그녀의 법적 대리인 변호사는 지난 5월 초 이 사건을 접하고, 장장 2개월 동안 이 사건을 가지고 있으면서, 고소 시점을 저울질 하다가, 법무부와 검찰의 갈등이 봉합 단계에 이르자 이 문제를 주도면밀하게 제기해 크게 이슈화하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그들(A씨와 그와 연대하는 이들은)은 대리 기자 회견을 자청하고, 마치 심판자나 된 것 같이 흥분한 어조로 박 시장을 성 추행범으로 심판했다. 그리고 2차 가해를 하지 말라며 우리 모두에게 거듭 거듭 경고하고, 2차 가해자를 고소했다는 사실도 밝히며 간접적으로 우리를 위협했다. 

2차 가해라니…
현재, 당시 1차 가해 사실을 법정에 물으며 판단을 의뢰한 상태이나 박 시장이 사망하여 공소제기가 안 되는 상황에 당황한 것일까? 이들은 집요하게 나(우리)에게 1차 피해를 인정하라고 강요하고, 이를 마치 인정받은 듯이 2차 가해(1차 가해가 확인 되어야 2차 가해라는 것이 성립한다)를 하지 말라고 위협한다.

내가 아는 판단의 형식은 굳이 윤리적 판단의 제 1 원칙으로 적용하는 “an ethic of fitness” 이론을 적용할 필요도 없이 그대라면 그대에게 고소를 제기한 자의 “주장”을 “사실 확인 없이 진실한 판단”으로 받아들이겠는가? “주장”은 일단 “그저 자의적 판단”일 뿐이다.

그런 자의적이고 일방적인 판단이 최종적인 판단으로 유통된다면, 왜, 우리 사회는 법률 전문가를 교육하고, 검·경을 두며, 법원의 판단을 단 한 차례가 아니라, 세 차례나 거듭하는 제도를 두고 사는가? 유, 무죄 판단의 신중함이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는 길이라는 것을 그대는 한 번도 배우지 못했는가? 목하, 세상은 불법적인, 일방적인 자의적 판단에 빠져있지만, 나는 민주사회가 법치사회인 한, 일방적인, 그리고 자의로 규정한 “피해자 중심주의”에서 나온 “의견”에 지나지 않는 내용을 최종 판단이라고 결코 받아들일 수 없다.

3.
엄청난 권력자와 힘없는 여성 사이에, 시장과 비서(시장에게는 비서가 한 사람만은 아닐 것이다) 사이에 일어난 일이므로, 약자 편에 서야 한다는 당위는 나 역시 동의하는 바이며, 대학에서 그렇게 가르쳐온 사람이다. 그러나 고소장을 제출하는 즉시, 한 편을 무작정 피해자로 상정한다면 동시에 다른 편은 무작정 가해자로 규정되는 이런 현실을 인장하라는 것이 “피해자 중심주의”인가? “피해자 중심주의” 개념이 이런 억지 판단을 강요하기 위한 전제로서 성폭력 사건에서 중시 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피해자 중심주의”라는 개념은 “사실 확인 절차”에서 피해를 겪은 이의 고통이 충분히 배려되지 못하여 조사자나 심사자에 의하여 재차 성적 수치심이나 인격적 모독을 초래하는 경우를 방지하자는 데에서 나온 것이 아닌가?

사실 확인을 요구하는 소리 자체가 제 2차 가해라는 주장은 어불성설이다. 그것은 가해가 아니라 “함께 진실을 밝혀 피해자의 고통을 씻어주고 보상을 받을 기회를 만들자는 것”이며, 동시에 만의 하나 피고소인을 궁지에 몰아넣기 위한 계략으로 “과장되거나 허위의 사실로 한 개인을 공격하는 행위”일 수도 있을 것이라는 경험적 지혜를 통해 오판을 막자는 주장이다. 이를 통하여 피해자와 가해자 사이에서 “행위의 부당성”을 밝혀 그에 해당하는 징벌을 하자는 주장이다. 이런 주장이 어떻게 2차 가해가 된다는 것인가? 도무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4.
서울 시장의 죽음을 불러온 이 사건 앞에서 온 국민이 “도대체 무슨 일이냐?”라고 묻고 있을 때 A씨 편에 연대한 이들과 법률 대리인이 나와서 밝힌 내용을 내가 아무리 살펴보아도 “스스로 목숨을 내 놓을만한 범죄“라고는 특정 짓기가 매우 어렵다.

아니, 할 수가 없다.
그대가 남성이라면, 그대 자신에게 물어보라!
그대가 여성이라면, 그대의 남편, 혹은 아들이라 생각하고 스스로에게 물어보라…
A씨가 나열하는 죄목 때문에 그대가, 그대의 남편이, 자식이, 스스로 목숨을 끊을만한 충분한 이유가 된다고 정말 생각하시는가? 아주 낮선 남성과 여성 사이가 아니라, 평소에 시장과 비서 사이에서 있었던 일이다.

주장이 있으면, 반박도 있을 수 있다.

- 셀카를 찍으면서 접촉했다. 
박 시장이 고의로 성추행 했다고 생각한 것일까? 조그만 화면에 두 사람 혹 세 사람을 넣기 위해 포즈를 이리저리 잡아야 하는 셀카 사진을 찍기가 성추행이라 규정할 수 있는 것인가?

- 멍든 무릎에 호하며 입을 맞추었다.
박시장이 성을 착취하기 위하여 “X저씨”같이 행동한 것이었을까?

- 수면실에서 나를 안아 달라고 했다.
성추행을 목적으로, 나아가서 성폭행까지 일어날 수 있는 정황, 정말 그런 일이 있었을까? 

- 텔레그람 비밀 방에서 대화하자고 했다.
변호사는 심야라 대서특필하게 주장 했지만 실제는 오후 8시 대의 일이다. 이 대화가 성희롱을 일삼으려는 대화였을까?

- 속옷을 입은 사진을 내게 보냈다....
서민의 정황을 채험하던 박시장이 무더운 여름 부채를 들고, 그러나 전혀 성적 매력이 드러나지 않는 “아저씨 사진”은 여기 저기서 나오고 있다.

개인적으로 나 역시 박시장의 이런 일련의 행위에 대하여 다분히 유쾌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나는 묻는다. 다른 해석은 정말 불가능한 것일까?  

박 시장에게 분노하는 그대, 그대라면 이런 일로 정말 스스로 목숨을 끊겠는가? 성폭력의 모든 동기는 여성을 성적 호기심, 욕망의 대상으로 바라보며 성 착취하려는 내심의 동기와 목적에서 작동된다. 이런 행위는 개인의 습관적 행위를 유발한다. 내심의 동기와 목적을 가지지 않았다고 하여 합리화할 생각은 없다. 만일 그런 동기가 아니라면 민감한 젠더인지도의 결핍에서 나온 행위다. 이런 행위는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

“악의적 해석 그리고 선의적 해석.” 

대부분의 악의적 해석은 사건 현장에서 “그 때” 일어나지 않는다. 사후에 악의적으로 해석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들은 악의를 감추는 대신 상대를 악마화 하는 입장을 강화한다.
내가 묻는다.

위의 내용을 가지고 그대가 남자라면 스스로 목숨을 버리고, 그대가 여성이라면 그대의 남편이나 아들에게 스스로 죽으라 하겠는가?

5.
다른 해석도 있다. 박원순 시장과 함께 일한 O작가는 위의 사실들과 유사한 경우들을 들어가면서도 그 내용을 성폭력이라고 해석하거나 읽지 않았고, 오히려 박 시장을 존경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 똑같은 여성이지만 해석이 이렇게 다르다.

진혜원 검사는 성폭력 사건 전담 검사로 일한 경험을 바탕으로 “성폭력 피해를 입었다고 주장하는 측의 진정성”은 반드시 검증되어야 한다는 당위를 알려주었다. 이런 검증적 절차를 언급한 것이 2차 가해라며 진 검사를 징계하자는 웃지 못 할 사건도 일어났다. 진 검사는 이렇게, 우리에게, 실무적 진실을 알려 준다.

“고소 사건의 절반 정도는 기소하고, 절반 정도는 불기소하고, 불기소 사건의 절반 정도는 무고죄로 기소하거나, 무고는 인정되더라도 초범이라는 사유 등으로 기소유예의 불기소 결정을 한 것이라고 상세히 기록해서, 무고를 당한 피해 남성이 나중에 민사소송을 하거나 국가배상청구를 할 때 활용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진 검사의 페북 글에서 인용)

고소한다고, 피해를 호소한다고 모두 “피해자”가 아니라는 현직 검사의 합리적, 실무적 해명이다. 평균 4명 중 2명은 “실제로” 피해자고, 그 중에서 한 명은 남성을 무고하게 가해자로 몰아 법적 처벌을 받게 할 목적으로 음해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도대체 A씨 편에 선 이들은 무슨 근거로 A씨가 피해자임이 입증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이며, 정치인들은 앞 다투어 A씨를 “피해자”로 확정해 주고 있는 것일까? 이런 행위가 재판 없이 사람을 여론 재판하는 근거가 된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하는 것일까?  “성”인지도만이 아니라 “정의”인지도도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Gender Justice는 성 인지도만이 아니라 정의 인지도도 요구하는 개념인 것을 모르는가? 이런 어리숙한 바보 게임에 나는 속을 생각이 없다. 속아 주지도 않을 것이다.

검증절차 없이 A씨가 4명 중 2명에 속할 가능성은 지금 그들이 하는 모양을 보아 더욱 그 개연성이 적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니 내가 믿을 수 있는 객관적인 검증 절차를 통해 사실을 확인해 주기 바란다. 성희롱, 성추행을 내가 가볍게 보기 때문에 아니다. 무겁게 보면 볼수록 가해자로 지목된 이는 더 가중된 범법자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김학의도 살고, 전두환이도 시퍼렇게 살아 있는 데, 왜 박원순 시장은 왜 우리와 같이 산자 중에 있지 않은 것일까?

부가적인 요인들도 있겠으나 일단 나는 “A와 그녀의 법률 대리인 변호사가 제기한 고소”가 직접적 요인이라고 판단한다. 나는 이들이 “가해자“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100% 배제할 수 없다.

이 고소는 겉보기엔 “권력자와 힘없는 자 사이에서 벌어진 성추행 고소”라는 성격을 가지지만, 사실은 무척이나 민감한 정치적인 사건이다. 단순한 이들은 “성추행” 주장의 진실성을 확인하지 않고 마치 자기가 겪는, 겪었던 일처럼 간주하고 분노를 드러낸다. 그 사이에 이 사건은 일파만파 엄청난 정치적 사건으로 확장되어 거대한 소용돌이 속으로 이미 우리를 삼키고 있다.

고소인과 그녀의 대리인은 이런 여파가 일어날 것이라는 사실을 충분히 예측했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래서 그들은 몇 시간 조사하면 되는 문제를 2달 넘게 품고 있었고, 적시를 기다렸으며, 폭로행위를 시리즈로 하고 있는 것이 아닌지 나는 묻게 된다. 이들의 목적은 무엇일까? 2년 3개월 근무 기간에서 일어난 기억을 소환하는 일, 세세히 기록해 두지 않았다면 쉽지 않은 일이다. 우리의 기억은 감정과 해석에 의하여 간혹 왜곡되기도 하는 것이다.

6.
나는 박 시장이 오랜 기간 약자로 몰린 여성, 그리고 억울함을 호소하는 이들의 편을 들어가며 살아온 사람이라는 것을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더욱 철저하게 젠더 평등성을 실천하지 못한 여러 흔적이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 결과 시장 - 비서의 관계에서 서로 허물없이 지낸다는 것이 결과적으로 A씨에게 혐오와 성적 수치감을 주는 행위가 될 수도 있다는 점도 인정한다. 박시장이 성 착취를 목적으로 그런 행위를 했는가 아닌가의 문제에 대해서는 우리가 악의로 혹은 선의로 해석할 수는 있으나 그것이 진실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하지만, 내가 앞서 그대들에게 물었듯이, 법률가로 살아온 그가 스스로에게 죽음을 선고할 만한 성범죄 리스트를 인정하고 “자책과 책임”을 느껴 스스로 목숨을 버렸다고는 도저히 판단할 수 없다. 

추가로 더해진 내용,

새벽에 나와 같이 뛰자.
내가 혈압을 재면 자꾸 높게 나오니 A씨가 재 줘…
운동 후 샤워실에 속옷을 가져다주고, 벗은 옷을 집으로 보냈다… 과연 박시장이 그렇게 요구하고 시켰을까? 왜 이런 일은 못하겠다고 하지 않았을까?

부끄럽지만, 이런 일은, 교회마다 부흥사를 불러 부흥회를 열 때, 집회 때마다 흠벅 젖은 부흥사의 속옷과 와이셔츠를 갈아 대 주는 일은 정말 흔한 일이다. 나는 이런 행위를 비판해 온 사람이다. 하지만, 기독교인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런 일은 교회에서 비일비재 하다.  
이런 사실에 대하여 분개하며 박시장을 고발하는 것, 그것은 가능하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는 “주장”을 사실로 확정하는 것은 이미 악의적인 해석을 받아들인 것과 다를 바 없다.

그래, 그렇다고 치자.
다시 묻자.

그대라면 이런 일이 세간에 알려진다 하여 목숨을 끊겠는가?
그대의 남편이, 그대의 아들이 이런 일로 목숨을 끊어도 당연하다 여길 것인가?
말하는 것도 2차 가해라더니, 이젠 침묵도 또 다른 가해라고?
말을 하면 그것이 곧 “사실 확인 없이” 의미를 가진다고 그대는 생각하며 살고 있는가?

법을 공부한 사람이라면, 평생 이 사회를 위하여 공헌하며 살아온 사람에게 이런 일을 열거하며 사형을 선고하겠는가? 권력을 탐하고, 쾌락을 쫓으며 치부해온 어느 검사처럼 박원순 시장이 지극히 이기적인 개인주의자라면 나는 어느 정도 그의 혐의보다 더 큰 혐의도 있을 것이라 간주할 수도 있다, 그러나 부유한 목사들도 버리지 못한 탐심을 그는 버리고 살았고, 일하다가 과로사로 죽기를 원했던 사람이다. 그는 가족을 위한 여지도 남겨두지 않고 보다 나은 사회를 위하여 모든 것을 내 놓고 살아온 사람이다. 그는 개인주의자라기보다는 공동체주의자의 면모를 보이며 그가 가진 것을 더 큰 일을 위해 기꺼이 내놓던 사람이다.

과연, 그가 원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가 믿고, 헌신하고, 모든 것을 바쳐서 함께 일한 시민사회와 여성들, 그들의 우월성은 어디 있었을까? 그것은 동지들과 함께 웃으며 일할 수 있는 근거, 곧 도덕성이다. 그의 공격자들은 박 시장의 아킬레스 건, 그의 도덕성을 치명적으로 겨냥한 것이다.

서울 시청 뒤에서 “박원숭이”라고 조롱하며 그의 아들의 병역 면제를 병역 비리라며 쉬지 않고 공격하던 이들은 “십여년 동안 지속적으로 그를” 괴롭혔고, 배현진이는 지금도 그를 괴롭히고 있지 않은가? 법적 판단, 의학적 판단, 합리적 판단, 그것이 그의 적대자들을 설득할 수 있었던가?

그런데 이번에는 함께 일하던 동지들이, 그가 위하던 여성들이 그를 적대자, 아니 성추행범으로 몰아가는 현실을 직면했다. 나는 이 엄중한 현실 앞에서 그의 팔과 다리가 다 잘려 나간 것과 같은 절망을 상상한다. 그래도 그는 이렇게 마지막 인사를 남겼다.

“ 내 삶에서 함께 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린다.”

여기에, A씨도 들어 있을 것이라면 내가 너무 “낭만화”하는 것일까?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의 말은 낭만적인 권고였을까?

7.
그대, 어떻게 생각하시는가?
과연 세상이 그를 공정하게 대하고 있는 것 같은가?
손에 돌을 들고 있는 그대 너무 경솔하지 않은가?  

그는 일하다가 죽기를 바란 사람이었다. 서울 시정을 위하여 “나인투화이브“ 깔끔하게 일하고 칼 퇴근하는 그였다면, 그가 서울 시장실에 마련되어 있는(사택이 교회에 붙어있는 경우가 아니라면, 어느 정도 규모의 교회 목사 집무실 한 귀퉁이에도 “침실”이 아니라 “수면실”이 있다) 수면실에서 예순 다섯 살아온 몸을 쉬게 할 필요가 있었을까? 

그가 매일매일 그대처럼, 그대의 남편처럼 사생활을 중시하며 집에 들어와 오순도순 살아간 사람이라면, 그가 가족이 있는 공관이 아닌, 시장실에서 이른 아침 조깅도 하고, 샤워를 할 필요가 있었을까? 

그는 자기 목숨을 그대들처럼 아까와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그대들처럼 강남에 집을 두고도 또 한 채 집을 가지려는 이도 아니었다. 그는 오히려 가진 것을 모두 내 놓고 살아간 사람이었다. 그는 목숨보다도 돈을 위해 사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가 마지막 인사에서 정말 미안해 한 대상은 그의 가족이었다. 떠나려니 가족에게 정말 미안했던 것이다.

“오직 고통밖에 주지 못한 가족에게 미안하다.”

8.
그가 사랑한 대한민국 서울을 위해 일하는 것, 그가 평생 여성과 약자 편에 서서 사는 일, 그가 꿈꾸며 하고 싶었던 일들을 더 이상 할 수 없다는 판단에 이르렀을 때, 그의 앞에서 조중동과 정치적 적대자들이 이구동성 던질 온갖 모욕과 조롱을 직면할 것을 예상하지 않았을까?  

어둠의 세력을 직면해야 할 운명을 직감했을 때 그는 무슨 생각을 할 수 있었을까? 그들 앞에 던져진 먹잇감이 되어 끝없이 상처받으며 변명으로 일관해야 할 그의 남은 삶, 함께 일하던 민주 진영에 회복할 수 없는 상처와 고통을 안겨줄 정황을 예측하지 않았을까?  

왜 살아서 결백을 입증하지 않았느냐고 나는 그에게 물을 수가 없다. 조중동한경의 비방 일색의 도배도 모자라, 지금 그의 죽음 앞에서 앞 다투어 대중의 비위를 맞추려 드는 정치인들과 배현진 부류의 인사들을 보면 내 판단이 그르지 않았다는 생각이 든다.

성희롱을 당한 여성 편에서 그 여성의 권리를 지켜주던 인권 변호사로 살아온 그에게, 자기가 위하던 여성들이 자기와 함께 일해 온 비서를 앞세우며 적이 되어 비난하며 칼을 겨누는데, 예순 다섯 된 노병 보고 칼을 들고 그 여성들과 피터지게 싸우라고?

아무리 세상이 험해도 격이 있어야 하는 법이다.

9.
그들은 한 여성을 향한 “성추행 사건”이라고 말을 하고 있지만, 사실은, 그의 부주의와 오류를 악의적으로 확대 해석하여 정치판에 던지기만 하면, 그의 적대자들이 무리지어 나서서 “사실과 해석의 진실성”을 확인하려는 합리성 따위는 아랑곳 하지 않고 그를 산 채로 잡아먹으려 들 것이라는 것, 누군가는 충분히 예측 했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종군위안부들을 대리한다며 민족적 자존심과 피해 여성의 권리를 간과하며 일본과 적당히 타협했던 박근혜 정부의 ‘위안부 화해·치유재단’의 이사였던 그녀, 그녀가 이번에는 여비서의 법률 대리인이 되어 전면에 나섰다. 2015년 대한 송유관 공사 여직원 강간피살 사건 피해자 모친 유미자씨와 대면한 자리에서 그녀가 냉철하게 했던 말이 있다. 피해자 중심주의, 그때는 없었다.

“한쪽 말만 듣고 판단할 수 없으며 여가부는 징계권한이 없다.”

여가부 국장 시절 강간 당하고 피살 당했던 여성의 모친에게 김재련 변호사, 그녀가 했던 말이다.

박 시장은 “그들이” 요구하는 대로 싸울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멈추어 서야 한다고 생각했기에 그는 우리에게 “안녕”이라 작별의 인사를 하고 초연히 세상을 떠난 것이다.
나의 가슴은 그의 쓸쓸한 죽음을 위로하고 싶고, 지금은 한없이 슬프고 아프다.

10.
피해자가 과연 누구일까?
나도 피해자 보호주의를 따른다. 

( 이 글 내용은 추후 수정될 수 있습니다.)
(박충구님글 모심)

* 정주열님의 페이스북에 올라온 글 입니다



본글주소: http://poweroftruth.net/m/mainView.php?kcat=&table=byple_news&uid=4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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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   고양이  2020년7월23일 08시23분    
절대다수의 사람들이 자신은 믿지 않으면서 하는 말들이 있다.
진실의 힘따위의 말이다.
그 비슷한 말이 있다.
정의는 승리한다고.
한마디로 진실이나 정의운운은 개소리다.
현실에서 정의가 승리하는게 아니라 정의는 승리자의 편이다.
현실에서 진실이 승리하는게 아니라 진실은 승리자의 편이다.
다른 사례를 들어보자.
천안함 사건을 생각해보라.
과연 진실은 누구의 편일까 ?
심지어는 진실자체를 모른다.
난 박원순을 알지도 못하고 굳이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그저 개한미gook 인이려니 한다.
박원순이란 사람이 성추행을 했을수도 있고, 안했을수도 있다.
박원순의 자살시점이 그대로 개한미gook 체제의 현주소를 증명한다고 생각한다.
개한미gook 정치란 알기쉽게 말하면 내편아니면 너는 네편이라는 것이다.
난 살아오면서 편가르기를 할때마다 항상 하는 말이 있다.
난 누구의 편이 아니라 난 내편이라고.
누구의 편에서가 아니라 내편에서 내가 판단하고 내가 결정한다고
그래서 나는 종종 어떤 사람은 나를 마사오부류라고 하고, 또다른 어떤사람은 나를 개놈현부류로 치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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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2]   양평농부  2020년8월3일 03시25분    
박시장 사건이나 안희정 사건이나 유사점이 많다. 안사건은 밀애 8개월만에 최악 범인을 만들며 매장 되었다. 박시장 사건은 피해자 모습도 드러내지 않는다. 이는 57년간 집권하면서 끈끈한 동지애가 신라족 남이가식 단합으로 핵심은 정권 되찿기에 올인한 싸움의 시작으로 보인다. 이제 여비서가 마음먹으면 고자 상사도 성폭행 범인으로 제게 할수가 있게 되었다. 참더러운 세싱이 되었다. 이걸 간파한 많은 국민이 있어 더이상 당나라근성의 정당은 영구히 집권이 불가능하게 된걸 다행히 여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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