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한홍구TV, 거짓과 진실, 그리고 헛소리 14

한홍구TV, 거짓과 진실, 그리고 헛소리 14
- 11월 26일 방송 ‘KAL 858기 폭파사건’에 대하여

강진욱 <1983 버마> 저자

 

14. 안기부-국정원의 ‘리은혜 스토리’ 조작 ②

앞글(13편)에서, 안기부의 KAL 858 공작 시나리오 속에는 이미 ‘리은혜=평양으로 납치된 일본인 여인’이라는 각본이 들어 있었을 것이라고 봤다. 이렇게 본 이유는 사건 발생 불과 석 달여 만인 1988년 2월 시점에 안기부가 리은혜에 대해 매우 상세히 묘사했기 때문이다.  

[김현희에 따르면 이[은혜]는 현재 30-31세로 지난 79년 피랍 당시 일본의 동경 지방[외곽.근교]에 거주했으며 당시 아들(3세)와 딸(1세) 등 두 자녀를 둔 이혼녀 ... 해변가를 산책하던 중 [납치]... 눈이 크고 쌍꺼풀이 져 얼굴이 서구적 ... 고교 졸업 후 결혼 ... 남매를 낳은 후 이혼 ... 동경에는 친척이 많이 살고 ... 일본 이름은 밝히지 않은 채 평소 술에 취하면 일본에 두고 온 자식 생각을 하면서 잘 울었다.](「“이은혜, 일본 자식 생각, 자주 울었다” - 김현희가 밝힌 일인화(日人化) 교육, 초대소 생활」<동아일보> 1988.2.8)

안기부와 김현희가 떠벌리는 ‘리은혜 스토리’가 이처럼 매우 구체적이라는 이유를 들어 리은혜는 일본 내에서 암약하던 ‘KAL 858 공작조’에 의해 일본 내 모처에 억류돼 있었을 것이라고 추리했다. 그런데 이 ‘리은혜 스토리’가 다른 사람의 이야기일 수도 있다는 해석도 가능하다. 1988년 2월 7일 안기부가 공개한 ‘리은혜 몽타주’가 14년이 지난 2002년 9월 말 이북의 지도자 김정일 국방위원장에 의해 ‘납북자’로 확인되는 다구치 야에코(田口八重子)의 모습과 ‘꽤나 흡사’하다는 이유에서다.

(안기부는 1988년 2월 7일 ‘리은혜 몽타주’(좌)를 제시했고, 3년 3개월 뒤인 1991년 5월 15일 안기부와 일본 경시청은 ‘리은혜’가 일본인 실종자 다구치 야에코로 확인됐다고 발표하면서 다구치의 학창시절 사진(우)을 공개했다.)

몽타주와 사진 속 인물이 ‘꽤나’ 흡사하다고 해서 둘이 동일인물이라고 단정할 수 없고 그럴 이유나 근거도 없지만, 이 몽타주가 훗날 공개될 다구치 야에코의 사진을 보고 그렸을 수도 있다(어떤 경위에서건, 안기부가 처음 밝혔던 ‘리은혜 스토리’가 다구치 야에코의 이야기였고, ‘리은혜 몽타주’가 ‘다구치 사진’과 동일인물이라면, 리은혜는 허구의 인물이라고 볼 수도 있다).

1988년 2월 제시된 몽타주가 1991년 5월 처음 거명되는 다구치 야에코의 사진을 보고 그렸을 개연성은 안기부가 1985년 6월 체포했다는 이북 공작원 신광수(辛光洙)에게서 유추할 수 있다. 앞글에서도 거명된 이다.

안기부는 1985년 6월 - 아마도 일본 공안당국으로부터 - 신광수의 신병을 확보한 뒤 그가 하라 타다아키(原敕晁)라는 일본인 남성을 납북했다고만 밝혔다. 또 훗날(2002.10) 타다아키가 1984년 10월 - 아마도 평양에서 - 다구치 야에코와 결혼했다고 밝힌다. 신광수가 타다아키를 납북했고 그가 다구치와 결혼했다는 안기부(및 일본 공안당국의) 발표가 사실이라면 신광수가 다구치에 대해 알았을 개연성이 있고, 안기부도 다구치의 신상에 대해 일찌감치 알았을 수 있다는 말이다.  
 
[▲다구치 야에코, 하라 타다아키 = 78년 6월 미야자키시 해안에서 공작원이 신분 위장을 위해 대상자를 물색하던 중 다구치가 ‘사흘 정도면 북한을 관광하고 싶다’고 말해 연행했다. 84년 10월 하라 다다아키와 결혼했으며, 1986년 7월 30일 승용차로 귀가 중 트럭과 충돌 사고로 사망했다. ‘이은혜’와는 관계없다. 하라 다다아키는 공작원에게 일본 호적등본을 취득할 수 있게 하는 대가로 100만 엔과 북한 입국을 약속했다. 1986년 7월 19일 간경변으로 사망했다.](「일본인 피랍자 납치 및 사망 경위」<연합뉴스> 2002.10.2)

위 기사는 2002년 9월말부터 10월 초 사이 평양을 방문한 일본 정부의 북일수교 협상단에게 북측이 밝혔다는 일본 신문을 인용한 것으로 북측이 이들 중 누구에 대해 뭐라 해명했는지를 확인할 수 없다. 결국 리은혜와 다구치를 동일시 할 수 없다는 지적이 나온다.

[최근 북한이 일본에 넘긴 납치자 신상 정보 가운데 북한에서의 다구치의 행적과 김현희가 ‘리은혜’라고 증언한 인물의 북한 행적이 일부 다른 것으로 알려지면서 동일인이 아닐 가능성도 있다는 주장이 제기돼 관심을 끌었다.](<연합뉴스> 2004.12.14)

안기부와 일본 공안의 협잡에도 불구하고 끝내 리은혜가 다구치 야에코인지는 확신할 수 없다는 말이다. 안기부가 김현희의 진술을 앞세워 ‘리은혜=다구치 야에코’라는 공식을 만들고 이를 일본 공안이 동조하게 만들었지만 돌고 돌아 또 오리무중인 셈이다.  

1988년 2월 ‘리은혜 몽타주’를 제시했던 안기부가 ‘리은혜=다구치 야에코’라고 주장한 1991년 5월 15일 상황으로 되돌아 보자. 이처럼 3년 3개월 만에 리은혜와 다구치 야에코를 동일시하기까지 한일 양국 공안 세력의 협잡이 있었을 것이다. 이름하여 ‘공동조사’. 일본 경시청은 이날 저녁 6시 30분, 안기부는 이날 밤 자정이 다 될 무렵 각각 기자회견을 열었다(안기부가 발표 시간을 자정께로 늦춘 것은 다음날 조간신문부터 기사가 실리게 만들려는 언론플레이였을 것이다).

안기부는 KAL기 폭파 사건 이후 김현희의 진술을 토대로 안기부와 일본 경찰이 1988년 2월부터 3년 3개월 동안 공조해 수사한 결과, 도쿄도(東京都) 도요시마구(豊島區)에 주소를 둔 다구치 야에코가 바로 김현희가 말하는 리은혜로 확인됐다고 떠벌렸다. 다구치는 1978년 경 납북됐으며 사이타마현 가오구치시 출신으로 여상을 중퇴한 뒤 음식점(술집) 종업원으로 일하면서 ‘치도세(千歲)’라는 별명을 갖고 있었다고도 했다.

[안기부에 따르면 김현희는 일본 경시청 측이 이날 긴급 파견한 경찰관 3명으로부터 사진 16장을 건네받아 자신의 개인교사였던 일본 여인을 가려내는 과정에서 7번째 사진의 ‘다구치’ 여인을 집어낸 뒤 “어릴 때보다 살이 조금 찐 모습이지만 바로 이 사람이 ‘은혜’가 틀림없다”고 확인했다. 김은 확인 과정에서 “은혜의 나이는 자신이 주장한 것보다 2-3세 정도 많은 것 같았고 칠월 칠석이면 곧 잘 감상에 젖었기 때문에 자신의 생일과 관계가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으며, 출생지는 사이타마현으로 형제 관계가 복잡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함으로써 일본 경찰의 내사 내용과 완전히 일치했다고 안기부는 밝혔다. 안기부는 특히 김이 증언한 내용 중 ‘은혜’의 키(163-165cm)와 체중(56kg), 피부(약간 검은색), 머리카락(검은색), 목소리(약간 허스키), 성격(깜박하고 잊는 일이 자주 있음), 취미(양재) 등이 일본 측 조사 내용과 합치됐다고 덧붙였다.](「김현희 일본어 교사 ‘은혜’ 신원 확인 - 음식점 종업원 지낸 ‘다구찌’, 78년 일 해안서 북한에 납치돼」<연합통신> 1991.5.15)

어디까지가 참이고 어디서부터 거짓인지 가늠하기 쉽지 않다. 앞글(13편)에서도 지적했듯이 김현희는 리은혜의 일본 이름만 빼고 그녀의(그 누군가의) 모든 것을 다 알고 있었다. ‘이름 빼고 다 안다’는 말은 리은혜에게 실제로 납북된 일본 여인의 이름을 갖다 붙이면 ‘리은혜 = 납북 일본 여인’이 된다는 말이다. 1988년 2월부터 3년 3개월 동안 이름 없는 몽타주로만 존재했던 ‘리은혜’는 1991년 5월부터 ‘다구치 야에코’가 된 내력이다.

위 기사는 ‘김현희가 알고 있는 리은혜에 관한 모든 것을 다구치 야에코의 가족들이 다 그렇다고 인정했다’는 투다. ‘리은혜의 모든 것’에 대한 김현희의 진술이 일본 경찰이 내사한 내용과 합치했다는 말. 그럴듯하다. 그러나 이는 안기부의 발표일 뿐이다.

[안기부에 따르면 그동안 김현희 씨의 진술을 토대로 일본 경시청과의 공조 수사를 벌인 끝에 일본 수사팀이 15일 내한, 김 씨를 만나 야에코 씨의 사진을 보이자 김 씨가 “이 여자가 내게 일본어를 가르친 ‘은혜’라는 여자가 틀림없다”고 확인했다는 것.](「김현희 일어 교사 일 실종 여인 치도세 - 일 수사팀 방한, 사진으로 확인」<경향신문> 1991.5.16)

‘리은혜 = 다구치 야에코’의 최초 발설자는 김현희였다. KAL 858 사건은 시종일관 김현희로부터 시작해 김현희로 끝나는 사건, 국정원의 꼭두각시 김현희가 ‘솔로몬’인 사건이다. 그런데 김현희는 아무 사진이나 갖다 주면 “아, 얘 나 맞아요” “어릴 적에는 볼이 통통했어요” “귀를 보세요” ... 이런 식으로 거짓말을 밥 먹듯 했고, 안기부도 옆에서 거들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김현희가 일본인 납북자들의 사진을 보다 ‘아, 이 사람이 리은혜예요’ 했다는 말 역시 안기부와 김현희의 농간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리은혜가 칠월 칠석이면 곧 잘 감상에 젖었기 때문에 자신의 생일과 관계가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이 기사 내용이 모두 사실이라면 이날까지 안기부가 ‘7월7석’ 얘기를 숨겨 놨을 리 없다. 김현희는 지난 3년 3개월 동안 ‘7월7석’ 얘기를 한 적이 없다. 이때 처음 풀어놓는 이야기를 김현희가 오래전부터 해 온 이야기인 양 조작한 것이다. 사전 작업이 있었을 것이다. 아마도 안기부는 다구치 야에코의 생일(7월 4일)을 일본 측에서 전해 듣고 김현희가 일본 수사관들을 만났을 때 해야 할 모범답안을 미리 줬을 것이다. “그렇게 말함으로써 일본 경찰의 내사 내용과 완전히 일치했다고 안기부는 밝혔다.” 김현희의 모범답안에 일본 수사관들이 ‘뿅’하고 가버렸다는 얘기다. 

두 나라 공안기관의 콤비플레이 또한 완벽했다. 용의 그림을 완성해 놓고 마지막에 둘이 동시에 양쪽 눈동자를 그리는 화룡쌍정(畵龍雙睛)! 발표 당일인 1991년 5월 15일 일본 경시청 수사관 3명이 김현희를 만나 그에게서 ‘이 사람이 바로 리은혜예요’라는 말을 듣자마자 곧바로 일본으로 날아가 오후 6시 도쿄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안기부는 그로부터 3-4시간 뒤 서울에서 기자회견을 연 것이다. 최소 몇 주, 길게는 몇 달 동안 두 기관이 얼마나 내밀한 관계를 유지했는지 상상할 수 있다. 1988년 2월 양국 공안당국이 리은혜의 신원 확인에 나서는 장면부터 수상쩍었다.

[이은혜는 일본 해안에서 북괴 공작원에 의해 배에 태워져 강제로 북에 끌려[간] ... 일본 여인이라는 사실이 일본 수사당국에 의해 재확인됐다[?]. 국가안전기획부는 [1988년 2월] 18일부터 22일까지 5일 간 일본 경찰청 외사과 소속 와타나베 다쿠미 경사 등 2명의 수사관이 방한, 김현희 면담 1회, 한일 양국 수사요원 간 접촉 3회에서 이같은 사실을 확인했다고 [2월 24일] 밝히고, 앞으로 한국 측이 이은혜의 신원 확인과 관련된 추가 자료를 일본 측에 제공하는 등 상호 협력키로 했다고 발표했다.](<조선일보> 1988.2.25)

흡사 안기부가 일본 경찰을 음모에 끌어들이는 모양새다. 일본 수사관들은 김현희를 한 번 만날 때 안기부 요원들과는 세 번이나 접촉해야 했다. 김현희는 어차피 안기부의 꼭두각시였고 김현희의 진술은 모두 안기부의 사전 각본에 따른 것임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일본 경찰은 처음에는 리은혜가 일본인이라는 김현희와 안기부의 말을 온전히 믿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 때문에 안기부와 김현희는 리은혜가 일본인이라는 점을 납득시키는데 무진 애를 썼다.

[김현희는 또 일본 수사관과의 면담에서 이은혜가 일본인이라는 사실은 본인은 물론, 초대소에 있던 여러 사람들에 의해서도 확인됐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은혜와 접촉했던 초대소의 식모아주머니도 “이은혜는 일본인”이라고 했고, ... 어렸을 때 조선 여자들이 치마저고리를 입은 것을 보고 “나도 입고 싶다”며 어머니에게 졸랐는데, 어머니로부터 “그건 조선 사람이나 입는 옷”이라는 핀잔을 받기도 했다는 얘기를 전했다는 것이다. 특히 북으로 온 귀국동포는 대부분 북조선을 ‘조국’이라고 부르나, 이은혜는 ‘조국’이란 말을 쓰지 않았고, 일본을 “우리 일본”으로 말해 일본인임을 자주 강조했다고 했다. 조선어 구사 능력도 귀국동포에 비해 아주 떨어졌으며 ‘폭포’라는 단어는 발음조차 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김현희는 이밖에 이은혜는 “통일이 되지 않으면 일본에 돌아가지 못할 것”이라고 비관했고, 초대소 생활 중 면도하다 “나는 일본 사람이기 때문에 조선 사람에 비해 얼굴에 털이 많다”는 말을 했다고 전하면서 “이은혜는 틀림없는 일본 여인”이라고 일본 수사관들에게 답변했다는 것이다.](「일경, ‘이은혜 전단’ 백만장 뿌려」<조선일보> 1988.2.25)

당시 일본 경찰 당국은 리은혜를 일본에서 이북으로 돌아간 ‘귀국동포’가 아닌지 의심했음을 알 수 있다. 또 안기부와 김현희는 리은혜가 정말로 북한에 있었는지를 의심하는 일본 수사진에게 온갖 꾸며낸 이야기를 늘어놔야 했다.

[일본 경찰청 수사관들이 확인한 사실은 대부분 김현희가 평양 동북리 초대소에서 이은혜로부터 일본어를 배울 때 직접 들은 것으로, 김은 이은혜가 지난 78년 일본 해안에서 며칠 동안 배를 타고 북에 끌려왔고 심한 배 멀리 때문에 몸이 수척해져 꼭 맞던 옷이 헐렁해졌고 몰골이 형편없어졌다는 말을 했었다는 것이다. 특히 이은혜는 자신이 북에 도착했을 때 가진 것이라고는 입고 있던 원피스와 핸드백뿐이었고, 배에서 내리자 지도원이 벤츠 차에 태워 초대소로 데려왔다고 얘기했다는 것... ](<조선일보> 1988.2.25)

앞서 지적했듯이, 안기부가 김현희의 말이라며 들려준 ‘리은혜 이야기’는 모두 3년 3개월 뒤 이름이 처음 공개되는 다구치 야에코의 이야기일 수 있음을 염두에 둬야 한다. 아무튼 일본 경찰은 곧바로 ‘이 여인을 모르십니까’라는 제목의 포스터와 전단 145만 장을 제작해 일본 전역에 뿌리며 ‘납북된 여인’을 찾아 나섰다.

( 1988.2.25 조선일보)

일본 수사당국은 그로부터 약 3년 뒤 ‘치도세’라는 별명을 가진 여인이 1978년 어느 날 행방불명됐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김 씨는 초대소에서[?] 은혜라고 불린 일본어 강사가 “나는 78년 일본 해변가에서 북한 사람들에게 납치된 치도세[千歲]라는 일본인”이라는 말을 자주 해 왔다는 것. 일본 경시청은 77년 이혼한 야에코 씨는 동경도 도시마구에 3살 난 아들, 1살 난 딸과 함께 캬바레의 호스티스로 생활을 영위했으며, 어린이[아이]들을 집 근처 베이비호텔에 맡겨 둔 채 행방불명됐다고 밝혔다.](<경향신문> 1991.5.16)

일본 경찰이 ‘치도세’라는 이름(별명)을 찾아내자 안기부는 곧바로, 김현희가 리은혜로부터 “나는 78년 일본 해변가에서 북한 사람들에게 납치된 치도세라는 일본인”이라는 말을 자주 들었다고 맞받았다. 마치 김현희가 이미 오래 전부터 ‘치도세’라는 말을 했다는 듯이. 앞에서 언급했던 ‘7월7석 이야기’와 마찬가지다. 이전에는 들어보지도 못했던 이야기를 다시 ‘김현희가 오래전부터 했던 말’로 둔갑시킨 것이다.

앞서 안기부와 김현희는 리은혜의 일본인 이름조차 모른다고 뻗댔다. 리은혜가 말을 안 해줬다면서. 그런데 그의 별명은 들어 알고 있었다? 김현희가 ‘치도세라는 별명’을 발설했다면 ‘치도세’라는 단어가 1991년 5월 15일 처음 등장할 리 없다. 1988년 1월 15일과 2월 7일, 안기부가 두 차례에 걸쳐 KAL 858 사건 수사 결과를 발표할 때, ‘리은혜’가 누구인가를 둘러싼 공방이 한창 뜨거웠을 때 안기부나 일본 경시청은 ‘치도세’의 ‘치’자도 내뱉지 않았다. 당시 김현희와 안기부가 밝힌 것은 ‘리은혜가 술집 종업원 출신 같았다’ ‘아이들 생각에 자주 울었다’ 등이다.

[“리은혜는 끝내 일본인의 이름을 밝히지는 않았지만, 때로 술에 취하면 멍하니 앉아서 일본에 두고 온 자식을 생각하며 신세타령을 하거나 눈물을 흘리곤 했다. ... 일본인답게 리은혜는 남들에게 자상한 편이었다. 지도원들과 함께 술을 마실 때면, 쉼 없이 술잔을 채워준다든가 안주를 집어주는 등 술 시중도 잘 했다. 술의 종류도 꽤나 많이 알았다. 우울할 때면 곧 잘 위스키같은 독한 술에 사이다를 타서 마시곤 했다.](1988년 2월 21일 자 <주간조선>, 『KAL 858, 무너진 수사발표』136-137쪽에서 재인용)

( 1988.2.8 동아일보)

안기부는 1988년 1-2월 수사결과 발표 때로부터 2년여가 지난 1990년에 와서야 일본 공안당국과의 긴밀한 정보 공유를 통해 리은혜의 별명이 ‘치도세’라는 사실을 파악한 것이 분명하다. 안기부와 일본 경시청 발표가 어떻게 조작됐는지 그 과정을 추리해 보자.

[안기부는 또 “그동안 ‘은혜’의 신원을 밝혀내기 위해 일본 공안당국과 긴밀한 정보 협조 체제를 유지해 왔다”고 말하고 [강조]“은혜 어머니의 고향은 ‘사도(佐道)’섬으로[강조] 아버지는 치질로 고생하고 있고 언니는 테니스선수이며, 70년대 후반 회사원인 오빠가 방글라데시로 출장을 떠난 사실이 있다는 [강조]지난해 3월 김의 증언이 ‘은혜’의 신원을 확인하는데 결정적인 작용을 했다”고[강조] 말했다. 일본 경찰은 그동안 김의 증언 내용과 우리 측이 작성한 ‘은혜’의 몽타주를 전단과 포스터로 다시 만들어 일본 전역에 공개수배를 했으며 ‘은혜’의 출신 지역으로 추정되는 동경 전 지역의 중.고교 출신 여학생들을 대상으로 신원을 추적해 왔다고 안기부는 밝혔다.](「김현희 일본어 교사 ‘은혜’ 신원 확인 - 음식점 종업원 지낸 ‘다구찌’, 78년 일 해안서 북한에 납치돼」<연합통신> 1991.5.15)

김현희가 “지난해(1990년) 3월”의 리은혜의 부친이 치질로 고생했고, 오빠는 방글라데시로 출장을 갔고, 언니는 테니스 선수고 ... 하는 등등의 가족사를 시시콜콜 ‘증언’(?)했다는 것으로 보아 안기부는 1990년 3월 일본 공안 당국으로부터 실종된(납북된) 여인 다구치 야에코의 가족사를 상세히 전해들은 것이 틀림없다. 그렇게 다구치 야에코의 신원 정보를 확보한 뒤 ‘그녀가 바로 리은혜’라고 강변한 것이다. “다구치 야에코의 어머니의 고향은 ... ”이라고 할 것을 “은혜 어머니의 고향은 ... ”으로 조작한 것이다. 위 <연합통신>의 “지난해(1990년) 3월”을 <조선일보>는 “작년(1990년) 6월” “지난(1991년) 3월”로 서술했다.

[김현희 씨는 북한에서 ‘새로운 생활’을 꾸리고 있는 ‘은혜 선생’에 대해서는 처음에는 상세한 증언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 후 [강조]일본의 수사와 김현희 씨의 추가 증언이 본격적으로 맞아떨어진 것은 작년 6월 무렵[강조]부터라고 한다. 치도세[千歲]라는 일본 이름[별명]과, 어머니가 사도(佐渡) 출신임이 재확인됐다. 이어 [강조]‘은혜’가 다구치 씨라고 확신한 것은[?] 올 들어 지난 3월.[강조] 호스티스 경력이 있다는 등 결정적인 제보를 받았던 것이다. ... 객관적인 인적 사항은 딱 들어맞았다. 더구나 어머니와 언니 동생들이 “틀림없다”고 말했다.](「일 경찰, “납치”로 일단 결론 - ‘다구치 사건’ 당국의 시각」<조선일보> 1991.5.17)

김현희가 1990년 6월이든 언제든 리은혜의 별명이 ‘치도세’라는 사실을 털어놨다는 말은 안기부의 거짓말이라고 앞에서도 지적했다. 일본 경시청은 실종 신고 된 이들의 신원을 전수조사하는 과정에서 ‘치도세’라는 별명을 가진 여인이 다구치 야에코라는 사실을 파악했고 이 정보를 안기부에 전한 것이다.

“치도세라는 일본 이름[별명]과, 어머니가 사도 출신임이 재확인됐다” 해 놓고 “‘은혜’가 다구치 씨라고 확신 ... ” 운운함으로써 ‘치도세(다구치 야에코) = 리은혜’로 조작한 것이다. 김현희는 이때까지 리은혜의 모친이 사도 출신이라고 말한 적이 없다. 일본 경시청으로부터 입수한 정보를 마치 김현희가 오래 전에 이야기했던 것처럼 거짓말을 한 것이다. 앞서 언급한 ‘7월7석’ ‘치도세’와 마찬가지다. 그래야만 리은혜가 치도세가 되고 다구치 야에코가 되기 때문이다.

“올 들어 지난 3월 호스티스 경력이 있다는 등 결정적인 제보 ... ” 새빨간 거짓말! 김현희는 이미 3년 3개월 전에 리은혜가 술집 종업원 출신이라거나(일 것이라거나) 호스티스였다고(였을 것이라고) 밝혔다.

[일본 경찰청 등 공안당국은 8일 ‘은혜 신원확인반’을 경찰청 내에 설치하고 전국의 경찰을 통해 가출 신고가 되어 있는 행방불명자들을 중심으로 ‘은혜’의 신원 확인을 서둘기로 했다. 공안당국은 ‘은혜’가 술 종류에 대해 자세히 알고 있고, 술자리에서의 시중 등이 능숙했고, 다리를 꼬고 앉는다는 등 기호품과 생활 태도 등으로 보아 술집이나 음식점과 관련 있는 직업을 가졌던 게 아닌가 보고 있다. 공안당국은 또 ‘은혜’가 북한에 납치된 일본인 부부를 만난 적이 있다고 말한 점을 중시하고, 이들 부부가 지난 1978년 일본에서 납치된 세 쌍의 일본인 남녀 중 한 쌍이 아닌가 보고 조사하기로 했다. 지난 1979년 일본 전국에서 가출 신고된 여성은 5만2천 명이 넘으며 이 중 주부는 약 1만2천 명이고 발견되지 않은 채로 있는 사람은 수백 명이다.](일 ‘은혜’ 신원 파악 총력 - 경찰청에 ‘확인반’ ... 가출 신고자 조사 나서<동아일보> 1988.2.8)

[【동경=교도.dpa.AFP.연합】김현희에게 일본어를 가르쳤던 일본 여인 리은혜는 도쿄에서 태어났으며 ... 납치되기 전까지 콘도미니엄에서 살았다고 ... 일본 언론은 최근 김현희를 면담한 경시청 수사관들의 말을 인용, 이은혜가 도쿄에서 태어나 남녀공학 고등학교를 다녔으며, 고교 시절에는 테니스부원이었다고 말했다고 ... 이은혜가 도쿄에서 호스티스로 일했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고 ... ](「“은혜는 동경서 출생” - 일 매스컴 일제 보도」<경향신문> 1988.2.26)

이미 공개된 ‘호스티스’ 이력은 ‘결정적 제보’일 수 없다. “(다구치 야에코의) 어머니와 언니 동생들이 (치도세=다구치 야에코임이) ‘틀림없다’고 말했다”가 ‘결정적 제보’였다. 이는 ‘치도세’로 알려진 다구치 야에코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치도세가 바로 우리 딸(언니.동생) 맞아요”라고 확인했다는 말이다. 이처럼 ‘치도세=다구치 야에코’임을 확인한 것을 “‘은혜’가 다구치 씨라고 확신”했다고 왜곡, 조작한 것이다.

[당초 일본 경찰은 동경 등을 중심으로 행방불명된 사람들을 조사한 결과 다구치의 가명인 치도세라는 이름이 수사선상에 떠올랐다. 그러나 가족들이 완강히 본인이 아니라고 주장, 일단 손을 뗐으나 [강조]금년 3월 치도세가 이은혜라는 유력한 정보가 들어와 가족들을 설득한[강조] 결과 마침내 시인, 사실을 확인한 것으로 알려졌다.](「일경(日警), 일인(日人) 납북 수사 본격화 - 김현희 일어 교사 신원 확인」<경향신문> 1991.5.17)

위 기사에 트릭이 있다. ‘리은혜 = 치도세 = 다구치 야에코’로 만들려는 안기부의 트릭.  “금년[1991년] 3월 치도세가 이은혜라는 유력한 정보가 들어와 가족들을 설득했다”는 말이 무슨 의미일까? 여기서 ‘유력한 정보’는 앞에 언급한 ‘호스티스 경력’일 것이다.
3년 3개월 전 이미 다 공개됐던 사실을 왜 ‘결정적 제보’ ‘유력한 정보’라고 떠벌릴까. 뒤에 나오는 ‘다구치 야에코의 가족들을 설득, 시인케’하기 위함이다. 유력하지도 않고 결정적일 수도 없는 정보 또는 제보로 설득했다는 말도 거짓말이다. 왜 거짓말을 할까.

이때까지 일본 경찰 또는 다구치 야에코의 가족들은 ‘치도세’와 ‘리은혜’가 동일 인물이라고 보지 않다가 1991년 3월에야 비로소 ‘치도세=리은혜’라는 안기부(김현희)의 주장을 수용했다는 말이다. 이렇게 주장하려니 ‘결정적’이니 ‘유력한’이니 하는 말을 가져다 붙인 것이다.

결국 안기부와 일본 경찰 당국은 3년 3개월 만에 가까스로 가족들을 ‘설득’(강요?)하고서야 리은혜와 다구치 야에코를 억지춘향으로 동일시하는데 성공한 것이다. 둘이 동일 인물이라면, 또 실제 모습과 ‘매우 흡사’한 몽타주까지 나도는 상황에서 둘이 같은 사람이라고 확인하는데 3년여가 소요될 까닭이 없다.

일본 정부(경찰) 당국이 3년 3개월 만에 ‘치도세(다구치 야에코)=리은혜’라는 안기부의 주장에 동조한 이유가 무엇일까. 아마도 이즈음 급피치를 올리던 북일 수교 교섭을 파탄내기 위해 늘 한통속으로 노는 미.일.한 3국의 대북적대 그룹이 움직이지 않았을까.

실제로 1991년 1월 평양에서 시작된 북일 국교정상화 회담은 결국 이 ‘리은혜의 벽’을 넘지 못해 1992년 11월 8차 회담을 끝으로 중단된다. 4년 9개월이 지난 뒤인 1997년 8월 말 다시 국교 정상화를 위한 예비회담이 시작됐지만, 또 ‘리은혜 문제’로 아무런 결실을 보지 못한 채 중단됐다.

북일 수교 교섭이 다시 재개되기까지는 또 5년여의 시간이 필요했다. 2000년 남북정상회담과 6.15공동선언이 나온 지 1년여가 지난 뒤인 2002년 9월말, 고이즈미 총리가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만나 ‘평양선언’에 서명할 때였다. 이때도 ‘리은혜 문제’가 전면에 부상한다. 처음 안기부와 김현희가 만든 ‘리은혜 문제’는 미.일.한 3국이 대북적대노선을 유지하고 보수하는 분단관리 매뉴얼의 핵심 항목인 것이다. (15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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