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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그들의 죽음이 ... 순국이었을까? 15
최병효 책 <그들은 왜 순국해야 했는가> 독후기
강진욱  | 등록:2021-09-01 09:56:48 | 최종:2021-09-01 11:32:44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연재] 그들의 죽음이 ... 순국이었을까? 15
최병효 책 <그들은 왜 순국해야 했는가> 독후기

<1983 버마> 저자 강진욱

15. 1981 : 전두환의 방미, 부시의 방한

박정희는 1972년 4월 비밀리에 국방과학연구소에 “1975년까지 200km 사거리의 국산 지대지 미사일을 개발하라”는 명령(일명 ‘백곰 프로젝트’)을 내린 지 7년, 1978년 9월 26일 국산 유도미사일 ‘백곰’ 시험발사에 성공한 지 불과 1년 1개월 만에 죽음을 맞이했다(「실록 박정희시대 (33)국산 미사일 개발」<중앙일보> 1997.11.13 https://www.joongang.co.kr/article/3553144). 박정희의 죽음은 버마가 비동맹운동에서 탈퇴한 지 불과 한 달 만의 일이었다.

버마의 비동맹 탈퇴는 조선(북한)을 겨냥한 한미 양국의 대북 적대와 공조의 ‘결실’이었고, 박정희의 죽음은 미국과 박정희 사이의 갈등의 결과물이었다. 전혀 별개로 보이는 두 개 사건이 동시에 벌어진 것은 필연이었다. 한미 양국은 1975년 9월 제30차 유엔총회에서 주한미군 철수와 유엔사 해체 등을 요구하는 공산측 결의안이 통과한 이후 조선을 겨냥한 비동맹 외교 공조를 강화했지만, 이 해 4월 30일 ‘사이공의 함락’ 이후 주한미군 철수론이 비등하고 박정희 대통령이 ‘자주국방’의 기치를 쳐들면서 한미 갈등의 골이 깊어지고 있었다.

버마를 비동맹 진영에서 이탈시킨데 이어 지배와 종속 관계에서 이탈하려는 박정희를 거세함으로써 미국은 알도 먹고 꿩도 먹은 셈이다. 그러나 한미의 비동맹 외교는 박정희의 죽음과 무관하게 면면이 이어졌다. 미국이 ‘새끼 밀리터리 보이’ 전두환의 5.18 광주에서의 학살을 방조하며 그의 득세를 돕고 마침내 그가 대통령 자리를 차지하기까지, 한국이 극심한 내부 혼란을 겪는 가운데서도 한미 양국의 비동맹 외교전선에는 이상이 없었다.

( 동아일보 1980.8.18)

남한 대통령 유고에 아랑곳하지 않는 한미 비동맹 외교전의 1순위 타깃은 물론 버마였다. 버마를 비동맹 진영에서 이탈시킨 미국은 필시 ‘남북한 동시수교국’인 버마를 ‘남한 단독 수교국’으로 만들어 조선을 고립시키려 했을 것이다. 그러나 1980년 한국이 극심한 혼돈의 늪에 빠져들고 있던 시기 버마는 조선으로 기우는 모습을 보였다.

전두환이 미국의 적극적인 방조 아래 정권 장악을 꾀하고 있을 때인 그 해 7월에는 버마 외상 우 레이 마웅이, 8월에는 공업상 탄트 스웨가 연이어 평양을 방문했다. 또 먼 훗날(1997년) 남한으로 넘어오는 황장엽(黃長燁) 당시 조선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이 김일성 주석의 특사 자격으로 그 즈음 인도와 방글라데시, 버마를 순방했고, 1981년 1월에는 조선의 이종옥(李鍾玉) 수상이 중공에 이어 버마를 방문했다. 이종옥의 버마 방문은 우 레이 마웅 버마 외상의 평양 방문에 대한 답방이었다.

[【랭군.AFP=연합】북괴 수상 이종옥은 중공 방문에 이어 4일 동안 버마를 친선방문하기 위해 14일 오후 수행원 23명과 함께 랭군에 도착했다고 버마 외무성이 발표 ... 우 마웅 마웅 카 수상을 비롯한 버마 고위 관리들의 공항 영접을 받았으며 이날 중으로 우 네 윈 대통령을 예방할 계획 ... 지난해 10월 6일의 북괴 노동당 6차대회에서 김일성이 발표한 남북한 통일을 위한 10개항 제의를 버마 지도자들에게 설명하는 것 등  ...] (<동아일보> 1981.1.15)

버마가 조선으로 기우는 듯한 모습을 보이자 미국과 일본 및 독일 등 서방국들도 버마에 대한 지원과 투자를 늘렸다. 버마를 친서방.친남 국가로 만들기 위한 물량 공세에 나선 것이다.

[【방콕=AP.합동】미국과 버마는 근 20년 만에 직접적인 경제협력을 재개했으며, 미 외교관들은 이같은 조처가 양국 간의 유대를 폭넓게 강화시키게 되기를 바라고 있다.] (「미-버마 경협 재개」<조선일보> 1980.9.5)

두 달 뒤인 1980년 11월에는 신임 버마 대사(일본 주재대사가 겸임)가 전두환에게 신임장을 제정했다. 특기할 것은 영부인 이순자가 버마 대사의 부인을 따로 만나 환담했다고 굳이 기사화했다는 사실이다. 영부인이 버마 대사 부인까지 각별히 챙겼다는 인상을 남기기 위한 것으로 비춰졌다. 서울 시장 박영수(朴英秀)가 버마 대사를 만난 것도 이례적이었다.

( 경향신문 1980.11.29)

또 새로 지은 남서울대공원 식물원에 버마가 보내왔다는 식물을 특별히 공개한 것은 차라리 애정 공세였다.

( 동아일보 1980.10.28)

이런 ‘버마 띄우기’는 어떻게든 버마를 끌어안고야 말겠다는 의지의 발현이었을 것이다. 문제는 그 의지가 대북 적대감과 결합돼 조선과 버마 사이를 갈라놓고야 말겠다는 악의로도 표출된다는 점이다.  

[【서울=내외】북괴는 아-아[아시아-아프리카] 지역 비동맹권으로부터 그들의 소위 통일방안 지지와 대남 고립화 획책을 목적으로 이 지역 국가들에 대해 각종 경제 및 기술 지원 약속을 남발해 놓고 이를 대부분 이행치 못함으로써 이같은 공약(空約) 남발과 대외적인 신용 실추로 많은 비동맹국가들로부터 비난을 면치 못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 지난 13일 버마의 건설기술대표단 일행이 평양을 방문, 지난 77년 네윈 버마 대통령이 북괴를 방문했을 때 북괴가 버마에 지원키로 약속한 섬유 주석 제련 공장 건설이 지연되고 있어 이의 조속한 이행을 촉구한 것으로 밝혀졌다.] (「버마 등에 공약 남발 - 비동맹국 북괴 비난」<동아일보> 1981.6.30)

이런 반북적대의 심리전은 미국의 대소대북 전략과 맥을 같이하는 것이었다. 버마를 비동맹 진영에서 빼 낸데 이어 박정희 체제를 전두환 체제로 바꾼 미국은 곧바로 전열을 재정비하며 숙적 소련 및 친소 국가인 조선을 겨냥한 ‘벼랑끝 전략’(brinksmanship)을 구사하기 시작했다. 이런 전략은 남한에서는 새로운 꼭두각시 전두환을 대통령 자리에 앉히는 작업과 동시에 진행됐고, 유약한 카터 정권을 1기로 끝내고 수 십 년 전부터 정계를 기웃거리던 헐리웃 배우 레이건을 백악관에 들이는 공작과도 병행됐다.

( 조선일보 1980.9.5)

레이건 정권 8년과 부시 정권 4년은 미 군산복합체가 베트남전 패퇴로 이완된 동북아 반공체제를 재구축하고 실추된 미국의 위신을 되살리면서 군사 패권주의를 재정비한 시기였다. 전두환 정권 7년 동안 무려 네 차례의 국가조작테러가 자행되고 그 모두를 ‘북괴의 소행’으로 모는 자해공갈극 거기서 유래된 것이다. 레이건을 대통령으로 뽑는 1980년 미국 대선 전부터, 전두환의 학살 만행을 방조하며 그를 새 정권의 수장으로 만들려는 뒷공작을 벌일 때부터 저들은 소련을 ‘악’으로 규정하며 모종의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

[최근 일본에서 베스트셀러가 된 ‘악의 논리’란 책에는 지정학적으로 소련의 세력 침투 방향과 그것이 미칠 영향을 예리하게 분석하고 ... 특히 지난 봄 소련이 아프가니스탄 침공을 예언한 것이 이 책의 성가를 높이고 ... 소련은 옛날부터 부동항을 얻기 위한 남하정책에 혈안 ... 아라비아반도 서남단 남예멘국의 공산화와 ... 에티오피아에서의 공산 정권 성립 ... 소말리아 분쟁과 오만에서의 해방전선의 소요 등은 페르시아만 입구인 호르무즈해협과 홍해 입구의 바베르만데브 해협에 대한 소련의 봉쇄 가능성의 증대 ... 서방 측에 석유 수송로 차단이란 실로 사활에 직결되는 ... 만약 소련이 만주를 점령했을 때 야기될 가공할 사태를 예상 ... 만일 미군이 한반도에서 철수한 뒤라면 북괴는 소련의 군사 원조를 받아 남한을 침공하게 될 것이고, 한반도가 적화된다면 일본 열도 정복이 곧이어 나타날 것으로 보고 ... 이런 사태를 방지하기 위해 일본은 자신의 안보를 위해서 한반도의 안보 문제에 적극 협조해야 한다고 이 책은 강조 ... 한반도가 만일 적화되었을 때는 북괴병을 시켜 일본, 대만, 필리핀, 그리고 태평양제도를 제압할 것으로 내다보고 ... 미국이 우물쭈물하고 있는 동안 .. 소련의 호전성과 야만성은 약육강식의 19세기 제국주의 침략을 재연하고 ... ] (「지정학의 시사」<경향신문> 1980.8.22)

1983년 9월 1일 대한항공(KAL) 여객기가 소련 영공에 침투했다 격추당하면서 ‘악마의 제국’(Evil's Empire)이라는 말이 퍼지기 3년 앞서 이미 일본에서 ‘악의 논리’라는 제목의 책이 발간돼 소련을 악마화하는 공작이 시작됐다는 뜻이다. 그랬다면 3년 뒤 한국민들을 희생양 삼아 소련을 악마화하는 사건이 벌어지고 ‘북괴’를 겨냥한 끔찍한 국가조작테러가 연발한 것은 정해진 수순이었던 셈이다.

소련과 조선이 스스로를 악마화하기 위해 무슨 사건을 저지를 것을 미국이 미리 알고 그렇게 예언한 것이 아니라면 레이건 정권은 일찌감치 소련과 조선을 ‘악’으로 선전하면서 실제로 이들 둘을 악마로 만들 사건을 조작한 것이다. 레이건 정권 출범 후 백악관에 초청된 첫 외빈이 전두환이었던 이유도 바로 그것이었다.

( 경향신문 1981.1.28)

전두환은 1981년 1월 28일 미국에 가 2월 2일 백악관에서 ‘레이건 당선 이후 첫 외국 정상’으로 미 대통령 레이건을 만났다. 전두환은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비동맹 순방 외교를 구상했고 자신이 직접 노신영 외무장관을 불러 순방 외교를 지시했다고 허풍을 떤다.

[1981년 2월 7일 하와이의 미 태평양사령부 방문을 끝으로 방미 일정을 마치고 ... 대통령으로서의 첫 외국 방문이 기대 이상의 성과 ... 들뜬 마음을 가라앉히고 지체 없이 수행해 나가야 할 차후의 외교 과제가 무엇인지 생각했다. ... 한미동맹 관계는 이번 방미로 더욱 굳건해졌지만, 유엔을 비롯한 외교 무대에서 북한의 도전은 갈수록 강화되고 ... [강조]나는 우선 북한이 주력하고 있는 비동맹 제3세계에 대한 외교부터 강화해 나가야 한다고 생각[강조] ... 나는 우리와 지리적으로 먼 거리에 있는 아프리카나 중동 지역에 앞서, 먼저 동남아시아 국가들과의 관계를 강화해 나가기로 ... 내가 직접 나서서 각국을 순방하며 정상외교를 펼치는 것이 효과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 ... 나는 바로 실행에 들어갔다. 하와이를 떠난 특별기가 급유를 위해 잠시 괌도에 기착했을 때 나는 노신영 외무부 장관을 불러 지시 ... “인도네시아는 국토도 넓고 자원도 풍부한 나라일 뿐 아니라 제3세계에 막대한 영향력을 가진 나라니, 인도네시아를 첫 방문국으로 해서 아세안 순방 계획을 짜보도록 하시오.” ... 한미 정상회담을 마치고 귀국길에 구상한 아세안 국가 순방 계획은 순조롭게 추진 ... 4개월 후인 6월 25일 등정 길에 ... ] (『전두환 회고록-2권』 376-379쪽)

전두환이 아세안 순방 일정을 자신이 직접 구상해 노신영에게 지시했다고 떠벌리지만, 노신영은 자신이 아세안 5개국 순방을 전통에게 건의했다고 말한다.

( 노신영 책 246쪽)

노신영은 전통의 순방 외교가 시작되기도 한참 전, 전두환의 대통령 취임 두 달여 만인 11월 15일부터 서아프리카 6개국을 순방한 일도 있다.

[노신영 외무장관이 서부 아프리카 6개국 순방을 마치고 7일 하오 ... 귀국 ... 대통령 특사 자격으로 ... 노 장관은 그간 가봉, 코트디부아르, 카메룬, 세네갈, 감비아, 가나 등 서부 아프리카의 비동맹 6개국을 순방, 각국 국가원수 등 고위지도자들과 만나 전두환 대통령의 친서를 전달하고 우호협력 증진 방안을 협의했다.] (<경향신문> 1980.12.6)

그러면 1981년 비동맹 정상외교를 노신영이 발의했을까. 노신영은 전두환 정권 출범 후 첫 외무장관에 임명된 뒤 비동맹 진영에 속한 여러 나라를 돌아다녔다. 그가 미국의 지시 (또는 그 비슷한 어떤 신호) 없이 대통령에게 비동맹 순방 외교를 권유 또는 건의했을까.

한국의 외교는 2021년 오늘까지도 미국의 외교전략의 일부로 작동한다. (한국의 외교관은 철두철미 친미(+친일)  성향을 지녀야 하며 만약 그에 반하는 성향을 보이는 경우 그의 외교관 인생은 그날로 끝이다. 특히 외무장(차)관이나 북미국장을 위시한 외무부의 주요 보직 및 각국 대사는 뼛속까지 ‘친미’임을 검증받은 이들이다.) 특히 조선을 주적으로 하는 비동맹 외교에는 미국과 한통속으로 움직여왔다. 노신영은 이런 미국의 외교전략의 일개 도구였을 뿐이다. 전두환과 노신영이 서로 자신이 비동맹 순방외교를 발의했다고 떠벌리는 것은 그 둘이 각각 누군가로부터 어떤 지시 내지는 귀띔을 받았음을 시사한다.

전두환이 방미 직후인 1981년부터 3년 연속 비동맹 순방 외교에 나서고 그때마다 ‘북괴의 전두환 시해 음모’ 시나리오가 가동됐다. 동남아 순방 때는 필리핀에서(1981년 7월), 아프리카 순방 때는 가봉에서(1982년 8월), 두 번의 리허설을 거쳐 마침내 서남아.대양주 순방 첫 방문국인 버마에서(1983년 10월) 일을 벌인 것이다.

그렇다면 레이건 정권은 전두환의 미국 방문을 기점으로 조선을 겨냥한 모종의 테러 음모를 획책했고 지시한 것이 틀림없다. 전두환의 미국 방문 뒤 ‘캐나다 교포 최중화의 전두환 시해 모의극’이 시작됐고, 곧이어 미국과 한국 및 버마 내부에서 일련의 수상한 움직임이 연발했으며. 이런 일련의 수상한 움직임들이 ‘1983 버마 사건’으로 귀결된 것이다.

캐나다 교포 최중화의 ‘전두환 시해 모의극’은 전두환의 방미 한 달 전인 1981년 1월 시작된 것으로 돼 있지만 이는 전두환의 방미를 기획하고 준비하면서 최중화 시나리오를 가동했다고 보면 무리가 없다( 앞글 10편 ).

그렇게 전두환네와 레이건 정권이 ‘필리핀 사건’을 준비할 때 안기부의 유학성(兪學聖) 부장과 김근수(金瑾洙) 정치정보국장, 김태서(金泰瑞) 북한국장, 이상열(李相悅) 해외공작국장 등이 비밀리에 미 CIA 본부를 방문했고(앞글 9편), 그로부터 석 달 뒤(‘최중화 사건’ 한 달 뒤)인 1981년 8월 수도경비사령관 박세직(朴世直), 정보사령관 이상규(李相珪), 보안사령관 박준병(朴俊炳) 등 육사 12기 핵심 멤버들이 동원돼 비밀리에 대북 공작인 ‘812 계획’이 시작됐다(앞글 6편).

이때는 버마의 네 윈 체제를 무력화시키는 공작이 시작된 때이기도 하다. 네 윈을 대통령 자리에서 밀어내고 그의 심복인 산 유 전 참모총장을 대통령에 앉히는 공작이었다(앞글 12편). 1981년 11월 네 윈의 양위 이후 ‘북한의 도발’을 기정사실화하려는 전두환 정권의 여론몰이는 가속화됐다.

[북한은 지난해 10월 조선노동당 6차대회 이후 ‘고려연방’안을 봉남평화 공세의 중심 내용으로 활용, ... 비동맹국과 우리 정부를 이간시키려는 선전 활동을 강화하고 ... 정일 시대의 북한은 ... 모험적은 아닐지라도 과격하고 극단적인 행동을 취할 가능성이 높다.] (「북괴 전략과 고려연방제 ... 이동복, “연방안은 대남적화 술책”」<경향신문> 1981.11.23)

전두환 정권은 이북의 고려민주연방제 통일 방안을 폄훼하면서 ‘세습 체제의 불안정으로 인한 대남 도발’을 기정사실화하려 했다.

( 동아일보 1980.10.14)

남한 군사독재정권의 대북적대 여론 조작은 일상화된 병리적 습관이었지만, 이 시기 전두환 정권과 미국 레이건 정권의 움직임은 일상적 습관을 넘어 1983 버마 공작을 겨냥해 기획된 심리전이었다. 1981년 11월 말 시점에 ‘평통 주최 국제학술회의’가 열리고 이동복 같은 이들이 나서 대북 적대 여론을 조작한 것도 그 맥락일 것이다.

( 경향신문 1981.11.23)

앞서 미국과 전두환네는 1980년 10월 이북에서 고려민주연방제 통일 방안을 내놓은 지 두 달 만에 남북한 최고당국자 상호 방문을 제의하고(1.12 제의), 다시 다섯 달 뒤 ‘제3국에서라도 만나자’며 1.12를 제의를 재탕하면서(6.5 제의) 통일 의제를 선점하려 기를 썼다.

(사진 좌 : 조선일보 1981.1.12) (사진 우 : 동아일보 1981.6.5)

이렇게 애드벌룬을 띄우면서 동남아 5국 순방에 나섰고 가는 곳마다 ‘북한과의 대화’를 주장하면서 북측의 연방제 통일방안을 비난했다. 가장 현실적인 통일 방안은 정치 공세라고 폄훼하면서 대단히 비현실적인 이야기만 늘어놓았던 것이다.

(사진 좌 : 조선일보 1981.6.27) (사진 우 : 조선일보 1981.7.8) 

이런 술수 아래 진행된 전두환의 1차 비동맹 순방 외교 마지막 기착지(필리핀)에서 “캐나다 교포 최중화가 전두환을 살해하려 했다”는 이야기를 조작했고, 동남아 순방을 마치고 돌아온 직후 박세직 수도경비사령관의 강제 예편 쇼를 시작으로 ‘8.12 공작’(1981.8.12)에 착수했으며, 곧이어 버마에서 네 윈의 양위 공작(1981.9∼11월)이 전개됐던 것이다. 

( 동아일보 1981.10.11)

1982년 새해에 들어서도 ‘북괴의 남침(도발)’ 여론 조작질은 계속됐다. 한 해 전의 1.12 제의를 상기시키고 미국에서 통일 관련 심포지엄을 열기도 했다.

(사진 좌 : 경향신문 1982.1.12) (사진 우 : 동아일보 1982.1.20)

며칠 뒤에는 남북통일헌법 제정을 제의했고 또 며칠이 지나서는 노태우 정무2장관을 내세워 남북한 고위대표자 회담을 열자고 주장했다. 전두환 정권은 노태우를 대표로 하는 9명의 남북협상 대표단 명단까지 발표하는 쇼를 연출했다.

(사진 좌 : 경향신문 1982.1.22 / 사진 우 : 동아일보 1982.2.25)

지금도 ‘1.22 제의’를 대단한 통일방안이었던 것처럼 이야기하는 이들이 있다. 광주학살과 12.12 정권 찬탈과 내란 음모, 천문학적 액수의 뇌물 수수 등 온갖 추악한 면모를 겸비한 전두환 정권도 민족사적 과제인 남북통일에 있어서만큼은 제 할 일을 하려 했다는 식이다.  1980년대 남북관계 이면사를 전혀 모르는 소치다.

1.22 제의라는 것은 전두환을 대통령으로 만든 패거리들에게 ‘민족통일협의회의’의 남측 대표 자격을 부여하고 이런 자들이 나서서 ‘통일헌법’을 만들겠다는, 또 전두환의 민정당 패거리를 내세워 남북 전역에서 총선거를 실시하고 ‘통일 국회’와 ‘통일 정부’를 구성하자는, 현실적으로 논의할 가치조차 없는 헛소리였다. 전두환네의 이런 제의는 남북의 상이한 체제를 서로가 인정하고 공생 공영을 도모하자는 북측의 연방제 통일 방안에 어깃장을 놓겠다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전두환 정권이 1981년에 이어 1982년에도 통일의제 선점을 노린 마구잡이식 제의를 쏟아낸 데는 1981년 9월 30일 ‘바덴바덴의 낭보’(88서울올림픽 유치 확정 발표)와 두 달 뒤의 86아시안게임 유치에 따른 대북 우월감도 작용했을 것이다. 88올림픽 등의 유치는 분단체제적 관점에서는 ‘대북 승리’이고 대개가 ‘쾌거’로 인식하지만, 민족사적 관점에서는 남북 분단체제적 갈등을 극대화시켰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전두환 정권은 조선이 86아시안게임과 88올림픽을 방해하려 한다는 말을 퍼뜨린 뒤 ‘김포공항 테러’(1986.9.14)와 ‘KAL 858편 여객기 폭파’(1987.11.29)를 자작했다. 아시안게임 개막 6일 전 일어난 김포공항 사건은 ‘아시안게임을 방해하기 위한 북괴의 소행’으로, KAL 858편 사건은 ‘북한이 서울올림픽 단독 개최를 방해하기 위해 김현희를 보낸 것’으로 조작됐음은 주지하는 바다.

1981년 1.12, 6.5 제의에 이어 1982년 1.22 제의 등 대북 제의를 쏟아내면서 한편에서는  ‘최중화 공작’을 뒤늦게 이슈화했다. 1981년 1월부터 모의를 시작해 이 해 7월 전두환의 필리핀 방문 때 전두환을 살해하려 했다는 이야기를 1982년 2월부터 퍼뜨렸던 것이다.

( 경향신문 1982.2.26)

‘북한에 의한 대남 테러(전두환 살해)’ 시나리오와 함께 ‘북한의 남침’설을 퍼뜨리는 심리전은 전두환네 만의 장난이 아니었다. 미군 심리전 조직과 연계돼 있을 ‘일본의 군사전문가’가 일본과 홍콩 찌라시에 수시로 등장했다.

[【홍콩=연합】북괴가 한국에 대한 침략을 감행할 경우 3개 군단 병력을 주력부대로 하여 2.3 방향에서 서울을 향해 내려올 가능성이 가능 크다고 향항(香港)시보가 일본 군사전문가들의 말을 인용, 15일 보도했다. 이 신문은 북괴가 지금이야말로 한반도를 무력 적화하는데 가장 적합한 시기로 판단하는 쪽으로 기울고 있기 때문에 한반도에는 암류가 흐르고 있다고 ... ] (「홍콩지(紙), 북한 2.3 방향서 남침 가능」<동아일보> 1982.3.16)

조선이 중공에 ‘남침 지원’을 요청했다 거절당했다는 ‘소설’도 나왔다.
 
[【동경=정구종 특파원】북괴는 올해 한반도에서 또 다시 전쟁을 획책, 이를 위해 중공의 지원을 요청했으나 거절당했다고 산케이신문이 10일 보도 ... 이 신문에 따르면 작년 11월 북괴 정치국원인 김영남이 중공을 방문, 서울올림픽에 참가하지 말도록 중공에 요청하는 한편 “82년 제2차 한반도 전쟁이 발발할 때 군사원조를 해 달라”고 요청했으나 거절당했다는 것 ... 그러나 북괴는 그 직후인 11월 하순 정규군 12개 사단과 특공대, 노농적위대 등을 동원한 사상 최대 규모의 대군사훈련을 실시, 이에 놀란 중공이 12월 20일 조자양(趙紫陽) 수상을 북한에 보내 진의를 타진했다는 것 ... ] (「“북괴 올해 전쟁 획책 - 중공, 지원 요청 거절” 일지 보도」<동아일보> 1982.4.10)

<경향신문>가 전한 ‘산케이 소설’은 더 가관이었다.

[【동경=황병렬 특파원】산케이는 이날 특집기사를 통해 북괴 권력 암투가 극도의 경제 혼란 속에서도 이상할 정도로 군사력 강화에 힘을 쏟아 온 그동안의 정책과 어떤 관계를 갖는지 아직 명백하지 않으나, 제2의 남침을 획책하는 김정일파의 모험주의와도 관련, 주목을 끈다고 지적했다. 산케이는 특히 세습체제에 대한 경고와 비판의 의미로 원유 공급을 한때 줄였던 중공이 작년 말부터 김정일 후계 문제를 인정하기 시작한 것은 북괴의 모험주의를 두려워한 때문이라고 분석 ... ] (「“경제난 가중되면 남침 가능성” 일지(日紙) 보도 - 북괴 권력투쟁 표면화 예상」<경향신문> 1982.4.10)

해괴한 남침론을 설파하는 것은 일본 극우 매체나 수상한 전문가들만이 아니었다. 주한미군 사령관 위컴이 자기네 국회 증언에서 ‘북한의 남침’을 들먹였고, 어떤 미국 교수는 소련이 북한의 남침을 사주할 것이라고 떠벌리고 다녔다.

[【동경=연합】존 위컴 주한미군사령관은 16일 미 하원 군사위원회에서 북괴가 한국의 후방에 제2전선을 설정할 것을 임무로 하는 세계 최대의 기습 부대를 창설하고 있음을 증언했다고 일본지지(時事)통신이 워싱턴 발로 18일 보도 ... 위컴 사령관은 또 북괴의 목표는 한국을 공산화 통일하는 것이라고 지적하면서 과거 2년 간 임전태세 확립에 박차 ... 공격 연습도 실시하고 있음을 강조 ... ] (「“북한 기습부대 강화” ... 위컴 증언」<동아일보> 1982.3.18)

[【홍콩=연합】미-소 관계의 성격이 점치 변함에 따라 소련은  ... 북한의 남침을 사주할 가능성이 많으며 이것이 한국 안보의 가장 큰 위협으로 등장하고 있다고 홍콩에서 발행되는 파 이스턴 이코노믹 리뷰 지가 18일 보도했다. 이 영자 주간지는 미국 뉴햄프셔대학교의 버나드 고든 교수가 지난해 아시아와 태평양 8개국을 순방하면서 정부, 학계, 민간인 지도자들과 폭넓게 가진 의견 교환의 결론을 소개 ... ] (「“소, 북괴에 남침 사주 위험” ... 홍콩지 보도」<조선일보> 1982.3.20)

( 조선일보 1982.3.30)

3월 29일에는 미 국방장관 와인버거가 서울의 조선호텔에서 열린 ‘한-미 수교 100주년 기념 강연회’에서 미제 무기를 팔아먹으려는 속셈을 드러내며 헛소리를 늘어놨다.

[캐스퍼 와인버거 미 국방장관은 29일 “1945년 이래 줄곧 변치 않고 있는 미국의 핵심적인 대한 정책의 하나는 미국이 한국의 안보를 고수하고 있다는 사실”이라면서 ... “미국의 도움으로 더 많은 정밀 군사장비가 한국에서 생산될 것이나 한국으로서는 일부 정밀 군사장비는 계속 미국으로부터 사들여 사용하는 것이 경제적으로 도움이 될 것”이라고 ... “미국은 이같은 장비 구매를 위해 대외 군사판매차관(FMS) 등을 통해 계속 재정적 원조를 제공할 것”이라고 다짐 ... ] (<조선일보> 1982.3.30)

한 달 뒤에는 버마 대사(도쿄 주재, 주한대사 겸임)가 대통령 전두환에게 신임장을 제정했고, 닷새 뒤 미국 부통령 부시가 방한(일.한.중 3국 순방)하며 전두환에게 ‘레이건 친서’를 전달했다.
 

( 매일경제신문 1982.4.20)

대사가 주재국에 신임장을 제정하는 것을 시비할 이유는 없지만, ‘버마 공작’이 한창 진행 중일 때였다는 점에서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또 버마 대사의 신임장 제정은 1980년 11월에 이어 1년 5개월 만의 일이었다. 다른 나라 주재 버마 대사들도 이 시기 이동이 잦았을까.

( 경향신문 1982.4.26)

특히 부시의 방한을 눈여겨봐야 한다. 그의 방한 시기가 미국 국방장관과 주한미군사령관 등이 대놓고 북한의 남침설을 흘리고 일본과 홍콩 매체들이 해괴한 이야기를 퍼뜨리는 때였다는 점이 그 하나. 또 부시는 1981년 5월 말 유학성 안기부장 등 남한 정보부 내 대북공작 책임자들을 미국으로 불러 소위 ‘모(스크바) 프로젝트’를 지시했었다(앞글 9편). 이 프로젝트에 관여했던 안기부 해외공작국장 이상렬과 도쿄거점장 이상구 등이 ‘1983 버마 사건’에 연루돼 있다.

닉슨.포드 정권 시절 CIA 중국지부장을 거쳐 CIA 국장을 지냈던 부시가 부통령이 돼 대통령 레이건의 친서를 전하기 위해 한국에 왔을까. 무슨 친서길래 주한미국대사가 아닌 부통령이 직접 전할까. 그와 전두환의 밀담이 수상했다.
  
[부시 부통령은 전 대통령과 인사를 나눈 후 미 측 수행원과 한국 측 고위 관리들이 배석한가운데 요담을 할 예정이었으나 전 대통령의 배려로 당초 계획을 바꾸어 단독으로 전 대통령과 55분 동안 요담했다.] (「부시 美 부통령 訪韓 ... 당초 계획 바꿔 단독 요담」<연합통신> 1982.4.27)

전두환은 통역자 없이 영어로 의사소통이 가능하다. 부시와 무슨 이야기를 나눴을까. 이후 어떤 일이 벌어질까. (16편으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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