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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한홍구TV, 거짓과 진실, 그리고 헛소리 10
진실에 대한 예의
강진욱  | 등록:2020-12-23 08:57:44 | 최종:2020-12-23 09:27:35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한홍구TV, 거짓과 진실, 그리고 헛소리 10
- 11월 26일 방송 ‘KAL 858기 폭파사건’에 대하여

강진욱 <1983 버마> 저자

10. 진실에 대한 예의

한 교수가 안기부를 두둔하고 안기부의 죄상을 감추게 된 것은 그의 무책임과 무성의, 나태함 때문이다. ‘걸어다니는 한국현대사 사전’이라는 말을 듣는(들었다는) 이, 한국 현대사에 뿌리박힌 거악(巨惡)을 발본하고 단죄하는 막중한 책임을 맡았던 이의 무책임과 무성의, 나태가 초래할 후과는 가늠하기 어렵다. 

[이거는 ... 베오그라드 .. 빈 ... 유럽을 다니면서 ... 공작원들이 사진을 찍었네요 ... 이 사진을 갖고도 말이 많았어요 ... 사진을 몇 장을 찍었느냐 ... 안기부가 숨기고 있는 게 있지 않느냐 했는데 .. 저희가 나중에 보도자료를 찾아보니까, 언론사에다가 ... 안기부가 확보한 사진이 스물 다섯 장인가 여섯 장이었는데, 그 사진을 다 공개를 했더라구요, 공개하기는 ... 그래서.. 그렇게 됐고 ... ]

한 교수가 “공작원들이 찍은 사진”이라고 말한 것은 김현희(하치야 마유미)가 오스트리아 수도 빈(Wien) 시내 ‘암 파클링’ 호텔 근처 쇼핑가에서 찍은 사진과, 바레인 공항에서 독약을 먹고 숨졌다는(안기부 주장 확인 불가) 김승일(하치야 신이치)이 유고 수도 베오그라드(Belgrade)의 ‘메트로폴’ 호텔 근처 공원에서 찍은 사진이다. 안기부가 공개한 것으로 사건 당시 신문과 방송에 대서특필됐던 것들이다.

( 1988.1.15 경향신문)

한 교수가 ‘안기부는 아무 것도 숨기는 것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누군가 지적한 사진에 대한 의혹을 부정하려는 것이지만, ‘안기부가 숨기는 것이 있네 없네’ 하기 전에 먼저 ‘KAL 858기를 폭파하기 위해 출정한 북한공작원들이 왜 여기저기 다니면서 사진을 찍었을까’에 대한 의문을 가졌어야 했다.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할 ‘대남 사업’에 나서는 이들이라면 절대로 해서는 안 될 일을 왜 하고 다녔을까? 왜 여기저기 가는 곳마다 ‘나 여기 다녀갔소!’ 하는 증거를 남기지?

사진 만이 아니다. 김현희가 갖고 있는 소지품은 무려 200여점. 오스트리아 트롤리버스 승차권부터 호텔비 정산 영수증에, 독일(동독) 동전에 ... 카메라 속에는 자신의 여정을 증명하는 사진이 수십 장!

김현희네는 폭파나 테러는커녕 무슨 공작원 레벨이 아니었다. 누군가의 지시에 따라 북한과 친교가 있는 나라들을 돌며 호텔과 항공권을 예약하고 쇼핑하고 관광하면서 곳곳에서 흔적을 남겼을 뿐이다. ‘북한 공작원들이 여기 다녀갔어!’라는 증거를 만든 것이다.

국정원이 제시한 ‘김현희 진술서’를 제대로 읽었다면 누구나 고개를 갸우뚱하게 된다. 그런데 국정원 과거사 진상 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 위원이라는 이는 왜 이런 초보적 문제의식조차 없었을까? 한 교수는 무슨 사건의 진상 규명과 같은 일에는 절대로 나서지 말아야 한다. 그에게는 이런 일에 필요한 회의(懷疑)하고 사유하는 능력이 결여돼 있다. 

이제 본론. 안기부가 사진을 공개하지 않았다고 지적한 이는 노다 미네오(野田峰雄) 씨다. KAL 858 사건의 진상 규명 작업에서 그 누구도 넘어설 수 없는 업적을 남기고 떠난 일본의 독립 저널리스트. 2004년 3월 국내에서 번역 출간된『김현희의 파괴공작 - 나는 검증한다』의 저자다.


(*국정원은 가히 세기적 역작이라 할 수 있는 이 책이 나오자 출판물에 의한 명예훼손이라며 즉각 판매금지가처분신청과 거액의 배상금을 요구하는 소송을 내 출판사와 번역자를 오랫동안 괴롭혔고, ‘국정원 발전위’ 활동 당시 KAL 858 사건 유족들의 요청으로 입국하려던 노다 씨의 입국을 불허했다. 그렇게 사건의 진상 규명에 반드시 참여해야 할 사람들의 손과 발을 묶어놓고 한 교수같은 이들을 시켜 ‘KAL 사건은 북한 소행이요!’ ‘김현희는 북한 공작원이요!’ 한 것이다.)    

먼 훗날 안기부가 국정원이 된 뒤 나머지 사진을 공개한 것은 사실이다. ‘KAL 858기 가족회’나 ‘KAL 858기 사건 진상규명 시민대책위’ 등이 무려 5년 가까이 지리한 항소심과 대법원 판결을 거친 뒤의 일이다. 그러면 안기부가 결백해지나? 이전에 숨기고 내놓지 않던 사진을 뒤늦게 내놓으면 숨기는 게 없었던 것이 되나? 

안기부가 사진을 다 공개했느냐 안 했느냐는 논란은 ‘사진 문제’의 지엽말단일 뿐이다. 노다 씨가 지적한 ‘사진 문제’는 사진 두 장을 원판대로 공개한 것이 아니라 좌우상하를 싹둑싹둑 잘라내고 가운데 부분만 공개했다는 사실이다.

한 교수가『김현희의 파괴공작』을 읽었다면 위 두 장의 사진이 왜 문제가 되는지를 모를 리 없다. 알고도 모른 척 할 이유도 없다(KAL 858 사건을 자행한 안기부 등과 한 패가 아닌 이상). 그는 책을 읽지 않았기에 ‘사진 문제’가 무엇인지 몰랐던 것이다. KAL 858 사건의 진상을 규명하겠다며 ‘국정원 발전위’에 들어간 이라면 가장 먼저 읽었어야 할 책을! 그는 국정원 발전위 민간조사위원으로서 마땅히 갖춰야 할 ‘진실에 대한 예의’가 없었다.     

그는 유튜브 강의 중 국정원 발전위에서 함께 일했던 민간 조사위원을 ‘OOO 선수’라고 칭하며 그에게 KAL 858 사건의 의혹들을 나열해 보라고 시켰다고 밝혔다. 이 ‘OOO 선수’는 KAL 858 사건 가족회 편에서 함께 일했고 노다 씨의 책을 숙독했으며 노다 씨가 제기한 ‘사진 문제’의 요점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따라서 그가 한 교수의 요청에 따라 작성한 ‘KAL 858 사건 의혹 리스트’에는 이 문제도 포함됐을 것이다. 그런데도 한 교수가 이 문제를 모른 체 한다면, ‘OOO 선수’가 한 교수에게 문제의 핵심을 제대로 설명하지 않았거나(의혹 리스트를 엉터리로 작성했거나), 한 교수가 그 설명을 듣고도 무시했거나, 아니면 둘이 ‘노다의 주장은 논외로 하자’고 담합했거나 셋 중 하나다. (*이 ‘OOO 선수’는 국정원 발전위 활동을 끝으로 KAL 사건 유족들과의 관계를 끊었다. 유족들이나 사건의 진상을 쫓던 이들은 이 ‘OOO 선수’가 국정원에 자신의 영혼을 판 것으로 여긴다.)

그렇게 정리된 의혹을 갖고 한 교수 등은 국정원 조사위원들에게 물었을 것이다. “안기부가 사진을 전부 다 공개하지 않았나요?” 국정원 조사위원들은 이런 저런 경로로 사진 문제에 대해 조사한 뒤 “아닙니다. 사건 당시 안기부가 다 공개했습(답)니다”라는 답을 줬을 것이다. 그러자 한 교수와 KAL 858 조사위원들은 “아, 그렇군요” 한 것이다. 그랬으니 지금까지도 자다가 봉창 뚜드리는 소리를 늘어놓고 있지! 문제의 핵심이 뭔지 모른 채!

노다 씨는 KAL 858 사건 이듬해인 1988년부터 1991년까지 모스크바(소련)→부다페스트(헝가리)→빈(오스트리아)→베오그라드(유고)→바그다드(이라크)→아부다비(아랍에미리트연합)→마나마(바레인)으로 이어지는 ‘안기부의 파괴공작 여정’를 쫒아가며 김현희와 김승일을 기억하는 이들을 찾아냈다.

그리고 이들에게서 김현희와 김승일의 수상한 행적들을 청취, 안기부와 김현희가 떠벌리는 말이 모두 거짓임을 입증하는 새로운 사실들을 들춰냈다. 그가 밝혀낸 사실만 제대로 짚었어도 KAL 858 사건의 진상은 벌써 규명되고도 남았다. 노다 씨가 남긴 불후의 역작을 한 번도 제대로 읽지 않는 무책임하고 불성실한 이들이 국정원 발전위 조사위원이 되면서 KAL 858 사건의 진상은 다시 구천 물길 속으로 처박힌 것이다. 

[저희가 국정원 과거사위 활동을 하면서 국정원 조사 기록을 보니까 ... 으음 ..김현희의 진술에 의거해서 그 진술이 맞는가 틀리는가 ... 김현희의 행적이 맞는가 ... 그거를 확인하는 게 조사의 대부분이었어요.]

대체 김현희의 행적 가운데 뭘 조사했기에 ‘김현희는 북한 공작원 맞아요∼’ 한단 말인가! ‘두 장의 사진 문제’는 노다 씨가 밝혀내고 확인한 많은 사실들 중 하나일 뿐이다. 노다 씨가 들춰낸 진실들의 단 하나만이라도 한 교수가 제대로 인지하고 제대로 조사했더라면 ‘김현희는 북한 공작원 맞아요∼’ 소리를 할 수가 없다.

노다 씨는 김현희와 김승일이 사진 한 쪽 구석에 치우쳐 있다는 사실에서 두 사진 모두 원판에서 좌우 또는 상하가 잘렸다는(트리밍됐다는) 사실을 간파했다. 그리고 그는 김현희와 김승일이 서 있던 곳에 두 사람과 체형이 비슷한 사람을(김현희 대역은 여성, 김승일 대역은 남성을) 세워 놓고 김현희 진술서에 나오는 것과 똑같은 C35AF2 기종의 카메라로 사진을 찍었다.

( 김현희 사진은 좌우상하 모두 잘렸고, 김승일 사진은 좌우와 하단이 많이 잘렸다.『김현희의 파괴공작』292/298쪽)

왜 사진을 잘랐을까? 어느 때 사진을 자르나. 보여(줘)서는 안 되는 것(사람 또는 사물)이 찍혔기 때문이다! 그 ‘보여(줘)서는 안 되는 것’이 무엇이었는지 대충 짐작이 가지만 이야기를 조금 풀어보자.

노다 씨가 안기부가 발표한 ‘김현희의 파괴공작’ 여정을 따라가면서 만난 이들 중에는 김현희가 사진을 찍는 장면을 목격한 이도 있었다. 안기부가 내놓은 사진에는 없지만, 노다 씨가 찍은 사진에 보이는 ‘PAWLATA'라는 가게(도자기.액세서리 취급)의 여자 점원. 그는 김현희가 1년여 전 가게에 들렀다 밖으로 나가 사진을 찍은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녀에게 일행이 있었냐”는 노다 씨의 질문에 이 점원은 “늙은 남자하고 젊은 남자, 일행이 세 사람이었다”고 대답했다. 노다 씨가 김현희와 함께 있던 김승일의 사진을 보여주며 “이 남자를 본 적이 있느냐”고 묻자 그 점원은 “아뇨”라고 대답했다(『김현희의 파괴공작 』293쪽).

김현희는 누군지 알 수 없는 2명의 남자와 함께 쇼핑가를 걸으며 사진을 찍은 것이다. 그러면 안기부가 원래 사진에서 상하좌우를 싹둑싹둑 잘라낸 이유가 분명해진다. 사진에 김현희 외에 다른 일행(최소 1명)이 함께 찍혀 있었던 것이다! 그 1명이 김승일일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만, 김현희의 사진 속에는 오직 그녀 혼자만 찍혀야 한다. 안기부는 김현희와 김승일 둘이 쇼핑과 관광을 다녔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김현희 사진을 찍은 사람은 김승일이어야 하고, 김승일의 사진을 찍은 사람은 김현희여야 한다.

만약 사진 속에 둘이 함께 있거나 다른 누군가가 있으면? KAL 858 사건을 조작했다는 의심을 받게 된다. 그 1명이 김승일이라면 김현희와 김승일 외 누군가 또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나고, 김승일이 아닌 다른 사람이라면 ‘이 남자는 또 누구냐’는 의혹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베오그라드 공원에서 찍힌 김승일의 사진 좌우와 하단이 잘린 이유도 마찬가지다.

한 교수가 학자로서 또는 국정원 발전위 조사위원으로서 최소한의 진지함만 갖췄더라면, 그래서 노다 씨의 책을 읽고 ‘사진 문제’를 제대로 알았더라면, 마땅히 국정원에 사진 필름 원본 공개를 요청했을 것이다. 또 필름 원본을 내놓지 않으려는 국정원의 비협조를 계속 지적했어야 하고, 종국에는 기본적인 사실조차 확인할 능력이 없는 국정원 발전위 따위는 당장 해체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어야 했다. 그랬다면 그가(또한 진보 또는 민주 진영을 대표하는 이들이) ‘이거 북한이 한 거 맞아요 ∼’ ‘김현희는 북한 공작원이에요∼’하며 뒤틀린 남북관계사를 또 한 번 비트는 일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노다 씨는 또 사진 속 김현희와 김승일의 모습이 어딘가 어색하고 부자연스럽다는 사실을 놓치지 않았다. 오랜 기간(최소 몇 달) 부녀 행세를 하고 다녔을 둘이 번갈아 카메라를 잡았다면 그렇게 어색하고 부자연스러운 모습으로 사진을 찍지 않았을 것이다. 카메라를 든 이는 ‘제3의 인물’임에 틀림없다. 노다 씨는 김현희를 따라다녔을(데리고 다녔을) ‘제3의 인물’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밝혔다.

[빈 서역(西驛)에서 최초로 ‘제3의 인물’의 흐릿한 그림자가 보였다. 다음으로 그는 케른트너 거리에 있는 ‘PAWLATA’ 도자기점 여점원의 기억에 남고, 오스트리아항공의 타운오피스에서도 목격되었다. 김승일의 스냅사진이 강하게 시사하고 있는 것도 ‘제3의 인물’의 존재이다.](『김현희의 파괴공작』299쪽)

노다 씨는 김현희 등을 대신해 누군가 빈 서역 인포메이션에서 호텔을 예약할 때 직접 그 업무를 대행한 마르기타 슈라이처를 만나 김현희 일행의 행적을 거듭 확인했다. 마르기타는 자신의 근무 시간표까지 확인해가며 노다 씨의 취재에 응했다.

[- 1987년 11월, 당신은 어디에서 근무하고 있었습니까?
“빈 서역의 호텔 인포메이션입니다.”
- (김현희와 김승일의 사진을 내밀며) 이 두 사람을 기억하고 있습니까?
“아니오 ... 거의 아무 것도 ... 하지만 제가 KE858편 사건의 범인이라고 언급되는 사람의 호텔 예약을 받은 것은 분명해요. 이렇게 말씀드리는 까닭은 사건이 일어나고 얼마 안 돼 (오스트리아) 내무부 사람이 와서 ‘그들이 암 파클링’ 호텔을 예약한 것은 이곳(빈 서역의 호텔 인포메이션)이다‘고 말하기에, 바우처(예약 때의 선불금 증명서)를 봤더니... 제가 처리한 것이었어요.”
- 호텔 예약을 신청한 사람이 남성이었습니까, 여성이었습니까?
“남성 ... 이었던 것 같아요. 많은 손님들 가운데 혼자 ... 당시 내무부 사람에게서도 똑같은 질문을 받았지만 ... 그 남성은 말(영어)을 잘 하지 못했다, 그런 인상이 남아 있어요. ... 여성에 관한 기억은 없어요.”](『김현희의 파괴공작』252-254쪽)

노다 씨는 빈 서역 인포메이션에 ‘바우처’가 보존돼 있다고 밝혔다. 김현희는 소위 ‘자필 진술서’에서 자신들이 묵은 호텔 이름을 영문자로 ‘AM PARKING’이라고 적었다.

( 김현희 진술서 “남역(南驛)에서 호텔 (AM PARKING) 예약을 김 선생이 해 가지고 돌아온 다음 우리는 (택시를 타고 호텔로 갔다.)” *‘암 파(르)클링(AM PARKLING)’라고 써야 할 것을 ‘호텔 (AM PARKING)’이라고 쓸 수 있을까? 호텔 이름이 ‘주차장’이야? 그것도 자필 진술서에? 한 교수는 이를 ‘단순 실수’로 여기겠지만, 이 오기(誤記)는 안기부의 누군가가 써 준 ‘진술서 원본’을 김현희가 지루하게 베끼다 저지른 실수다. 김현희가 스스로 진술서를 썼다면 문장의 한 줄을 빼먹었다 나중에 부기(附記)하는 실수를 저지를 수 없다. *빼먹었다 부기한 한 줄 = ‘(려)권을 지도원에게 넘겨주고 일본 려권을 받았다’)

노다 씨는 또 오스트리아항공 타운오피스의 매니저 게오르그 게르하르트 씨로부터 “남자와 여자와 노인” 이야기를 듣는다.

[... 게르하르트 씨는 말했다. ... “그 사건은 이제 끝난 것 아닙니까? ... 본사의 허가가 없으면 곤란합니다. 게다가 사건 관계 서류는 (오스트리아) 내무부 사람이 모두 가져가 버렸습니다.” ... 잠시 옥신각신 하는 사이에 게르하르트 씨는 낮은 소리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남자와 여자와 노인이었는데 ... 그들은 테러리스트로 보이지 않았어요.”](『김현희의 파괴공작』294쪽)

김현희는 오스트리아에서 김승일로 보이는 어떤 노인과 젊은 사내 등 두 남자와 함께 돌아다닌 것이 틀림없다. 국정원 발전위는 노다 씨가 확인한 이 사실은 외면한 것일까, 아니면 애초부터 몰랐을까(후자라라면 KAL 858 사건을 담당한 조사위원들 누구도 노다 씨의 책을 보지 않았다는 말이 된다)?  김현희와 김승일이 베오그라드에서 묵었던 메트로폴 호텔 도어맨 요바노비치 씨와 노다 씨의 대화는 더 놀랍다.

[“두 사람이 이 호텔로 오고 사흘이나 나흘이 지났을 무렵, 로비의 소파에서 여성(김현희)과 세 동양 남자가 무슨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그 시간은 10분에서 15분, 그다지 길지는 않았습니다. ... 그 사람(김승일)은 없었습니다.”
-몇 시쯤입니까?
“내 근무 시간이 끝나갈 무렵이었으니까, 오후 1시 반이나 2시 쯤입니다. 그들은 잠시 이야기하다 갔습니다만, 그때 여성이 현관까지 배웅했습니다.”
- 세 동양 남자의 용모를 기억하고 있습니까?
“아니오, 다만 세 사람 모두 똑같이 짙은 감색 양복을 입고 있었습니다. 안경은 끼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 가방에 관해 뭔가 기억나는 게 있습니까?
“누구의 가방인지는 몰랐습니다. 그런데 내가 그들(김현희와 세 동양 남자)을 보았을 때 이미 네 사람 사이에 가방이 놓여 있었습니다. 가로 50cm 높이 30cm 정도의 크기 ... 그것을 세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 가지고 갔습니다.”](『김현희의 파괴공작』309-311쪽)

안기부가 내놓은 ‘김현희 진술서’는 이렇게 돼 있다.

[(사건 발생 이틀 전인 11월 27일) 저녁 7시에 호텔 정문에서 최 과장, 최 지도원을 만나 함께 호텔 방에 올라갔다. 방에서 10분 간 최 과장은 가지고 온 폭파용 라디오와 약주를 넘겨주고 우리가 가지고 있던 여행용 가방 1개(기타 불필요한 물건)를 가지고 떠나갔다.]

( 김현희 진술서)

김현희의 가방을 갖고 간 이들은 김현희가 주장하는 ‘두 명의 최 가’(최 지도원과 최 과장)이 아니라 짙은 감색 양복을 입은 정체불명의 세 동양 남자일 것이라고 노다 씨는 추리한다. 그의 추리가 맞을 것이다.

메트로폴 호텔 도어맨 요바노비치 씨는 김현희와 다른 3명의 동양 남자를 보았을 뿐 김승일로 보이는 노인은 보지 못했다고 이야기했다. 실제로 김현희는 김승일이 아닌 다른, 그것도 젊은 남자와 메트로폴 호텔에 있었다는 보도가 있었다.

[일본 경시청 조사에 의하면 ... 베오그라드의 한 호텔 종업원은 “하치야 마유미와 함께 툭숙한 사람은 40대의 건장한 남자였다”고 밝히고 있다. 또 바레인의 현지 소식통도 이 남자의 나이가 35세 가량이었다고 말했다.](<한국일보> 1987.12.3 /『KAL 858, 무너진 수사발표』 222쪽에서 재인용)

진실에 대한 예의의 첫 번째 덕목은 진지함, 두 번째는 집요함(간절함), 세 번째는 겸손함이다. KAL 858 사건의 진상을 논하는 한 교수의 태도는 한 마디로 ‘띄엄띄엄’ ‘엄벙덤벙’ ‘대충대충’이다. 뭔가를 밝혀내고야 말겠다는 비장한 각오는커녕 다른 이들이 이미 다 밝혀낸 사실조차 인정하지 않는다.

[(유튜브 강의 중 댓글을 보며) ‘김현희 진술이 실제 상황과 다른 것들이 많이 있는데’(댓글 질문) ... 인제 ... 이런 것들이에요. ... 그 ... 그 부분이 다 조작된 거라 하더라도 .. 그럼 ... 안기부 전체가 .. 요 부분의 팩트를 확인을 못 했다 뿐이지 ... 내가 4시에 갔느냐 5시에 갔느냐 ... 두 명이 갔느냐 세 명이 갔느냐 ... 엘레베이타를 타고 갔느냐 계단으로 갔느냐 .. (하아)... 뭐 이런 부분에서.. 디테일에서 팩트가 확정이 안 된 부분들이 많지만 ... 그게 ... 그걸 밝혀내지 못했다고 해서 .. 그게 차이가 있다고 해서 ... 아주 .. 중요한 원칙적.. 그 정말 본질적인 부분이 달라지느냐 하는 ... 그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김현희의 진술도 왔다갔다 하는 등) 디테일에서 팩트가 확정이 안 된 부분들이 많지만 본질적인 부분(북한의 소행이라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는다.” KAL 858 사건의 조사위원이라는 사람의 무성의하고 무책임한 이 말에 대해 노다 선생은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처럼 작지만 각각의 장면에서 매우 요긴한 역할을 수행하는 허위, 착오, 위장을 검증하고 연결시켜 나가는 작업이 아닐까. ... 이같은 작은 허위와 착오와 위장의 세류(細流)야말로 끝내는[결국에는] 사건 그 자체를 기묘하고 이해하기 어렵게 만들어 버리기 때문이다.](『김현희의 파괴공작』257쪽)

노다 씨의 이 지적은 김현희네가 실제로는 빈 서역(西驛)에서 호텔을 예약했으면서 남역(南驛)이라고 말하는 등 “아주 작은 에피소드처럼 여겨”지는 김현희의 허위 또는 착오들을 언급하면서 한 말이다. 진지함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이 ‘작은 에피소드’를 한낱 김현희의 ‘인위적 실수’ 정도로 ‘퉁’쳐버리는 한 교수 같은 이들에게는 절대로 기대할 수 없는 ... 노다 씨의 진지함은 계속된다.
 
[그녀는(김현희) 이곳 베오그라드 호텔 메트로폴에 관해서도 암 파르크링(오스트리아 빈의 호텔)과 쏙 닮은 위증을 반복하고 있었다. 분명히 이것은 사소한 일이다. 그렇지만 왜 그녀는 간간이 같은 위증을 벌이는 것일까? 이 위증은 ‘빈 서역의 위증’과 호응하고, 나아가 ‘부다페스트의 시시한 암호 전화번호의 위장’과 연결되어 있는 것이 아닐까?](『김현희의 파괴공작』307쪽)

P.S.
김현희 진술서에는 ‘암 파(르)클링(AM PARKLING)’라고 써야 할 것을 ‘호텔 (AM PARKING)’이라고 쓴 것 외에도 호텔 이름이 잘못 표기된 예는 또 있다. 유고 베오그라드에 있는 호텔 ‘메트로폴’. 처음에는 ‘메트로폴’이라고 제대로 기재했다가 나중에 두 자를 끼워 붙여 ‘메트로폴리탄’으로 고쳐 쓰고 손도장을 찍은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KAL 858 사건을 다른 소설『배후』의 작가이면서 KAL 858 사건 진상규명 시민대책위 조사팀장을 지낸 서현우 씨의 지적이 설득력이 있다. 서 씨는 KAL 858 사건의 정황이 제대로 알려지기 전에 안기부가 언론플레이에 나서면서 신문과 방송을 통해 ‘메트로폴리탄 호텔’이라는 잘못된 이름이 널리 알려지자 안기부가 ‘김현희 진술서’에 두 글자를 슬쩍 끼워 넣었을 것이라고 설명한다. 국정원은『김현희의 파괴공작』만이 아니라 그보다 전에 나온 소설『배후』에 대해서도 거액의 손해배상금 청구소송을 제기했다.)

(사진 좌,우 : 국정원이 훗날 추가로 공개한 김현희 사진(오스트리아 빈)도 상하좌우가 잘린 것이 분명하다. 김승일(하치야 신이치)의 사진은 온전하다. 1987년 11월 30일 바레인을 모처를 여행하며 여유 있게 포즈를 취했다. 안기부가 이 사진을 공개하지 못한 이유는 바레인공항에서 독약 앰플을 먹고 자살했다는 이의 하루 전 모습이 너무 평화로워 보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 역시 김현희와 마찬가지로 KAL 858 공작의 들러리였을 것이다. 그렇게 들러리로 이용당하다 공작조에 의해 살해당했을 것이다. / 두 사진은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글 「20년 만에 베일 벗은 KAL 858 사건 수사기록」(2007.11.29)에서 가져왔다.)

(11편으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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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   파르티쟌  2020년12월23일 14시02분    
분석글 잘 읽었습니다~~~
(12) (-4)
 [2/2]   stevan  2020년12월27일 12시55분    
저도 노다 미네오의 <김현희의 파괴공작>에 있는 사진 부분을 의미 있게 읽은 기억이 있습니다만,
기자 정신이 덤뿍 담긴 강 기자님의 설명을 읽으니 이해에 더 많은 도움이 됩니다. 연재 글 기대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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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02 [오영수 시] 부활과 윤회
10035 도널드 트럼프의 위험한 거짓말
7468 [기고] 한 해외동포의 평양 일기 1
7295 유럽 국가들, 영국 변종 코로나 확...
6179 [데스크에서] 조선일보·서울경제 ...
5213 추미애 장관이 인간의 도덕성에 관...
                                                 
[여인철의 음악카페] 들녘이 황금...
                                                 
[연재] 홍콩의 벤처이야기 “홍콩...
                                                 
철학 없이 살아도 된다고요?
                                                 
김사복, 5.18 진상을 세상에 알리...
                                                 
왜 당신은 계란을 바위에 던지시나...
                                                 
공기업 적자, 정치인-자본-관료의 ...
                                                 
미국 경찰 또 ‘목 누르기’로 아...
                                                 
도널드 트럼프의 위험한 거짓말
                                                 
문재인 대통령님께 드리는 여섯 번...
                                                 
청소노동자의 외침 “차별받아도 ...
                                                 
文대통령 지지율 47% 상승세… 민...
                                                 
김진애의 서울시장 출마로 직장을 ...
                                                 
천안함의 진실을 지킨 사람들과 박...
                                                 
백기완 선생의 추억
                                                 
거짓말 연습, 공갈 검사
                                                 
[이정랑의 고전소통] 용중무이(用...
                                                 
전두환 비서출신 이용섭 사건 재정...
                                                 
“귀환” KAL858기 사건 33주기 추...
                                                 
안병하 공직자 바로 세우기 운동본...
                                                 
[오영수 시] 중국에 고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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