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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그들의 죽음이… 순국이었을까? 24
누구를 살리고 누구를 죽이려 했을까 ②
강진욱  | 등록:2022-01-28 09:50:45 | 최종:2022-01-28 14:26:19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연재] 그들의 죽음이… 순국이었을까?
최병효 책 <그들은 왜 순국해야 했는가> 독후기

<1983 버마> 저자 강진욱


24. 누구를 살리고 누구를 죽이려 했을까 ②

1983년 8월 5일 전두환의 서남아.대양주 순방 발표 때 거명된 공식 수행원은 20명이지만,  출국 전날인 10월 7일 최종 발표 명단에는 육사 8기 출신의 김종호(金宗鎬) 건설부 장관과 하동선(河東善) 해외협력위원회 기획단장(차관급)이 추가돼 공식 수행원은 22명으로 늘어난다. 둘이 추가된 내력은 알려진 바 없다.

‘공식 수행원’ 가운데 아웅 산 묘소 헌화식에 두 줄로 도열할 사람은 16명이었고, 이중 15명이 폭탄 세례를 받아 13명이 죽고 둘은 가까스로 살았다. 사망한 13명은 서석준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장관, 이범석 외무부장관, 김동휘 상공부장관, 서상철 동력자원부장관, 함병춘 대통령비서실장, 이계철 주버마대사, 김재익 대통령비서실 경제수석비서관, 하동선 해외협력위원회 기획단장, 이기욱 재무부차관, 강인희 농림수산부차관, 김용한 과학기술처차관, 심상우 민정당 총재 비서실장(국회의원), 민병석 대통령 주치의 등이다. 폭탄 세례를 받고도 살아난 두 사람은 두 열 맨 끝에 서 있던 이기백 합참의장(앞줄)과 최재욱 공보비서(뒷줄)였다. 최재욱은 이기백 뒤에 서 있어 도열자들 가운데는 가장 상처가 경미했다.

( 도열 순서 83.8.5)

두 열로 도열했던 16명 모두 폭탄 세례를 받아야했다면 이 도열 명단은 사실상 ‘살생부’였던 셈이다. 이들 중 장관 모두와 차관 여럿은 석연찮은 개각 인사를 통해 발탁된 이들이었음을 앞글(23편)에서 살펴봤다. 그런데 수상한 점은 발탁 인사만이 아니었다. 전두환의 1981년 6월 동남아 순방 및 1982년 8월 아프리카 순방 때 공식 수행원 명단과 비교해 봤다.(*1981년부터 내리 3년 간 미국과 전두환네가 일종의 대북적대공작의 일환으로 비동맹 순방 외교 행각을 벌였으며, 그때마다 ‘북괴의 전두환 대통령 시해 음모’가 조작됐다는 사실은 앞서 설명했다.)
 

우선, 앞글에서 논한 여섯 차례의 ‘수상한 인사’ 중 맨 마지막인 7.13 차관 인사 때 재무차관이 된 이기욱이 눈에 띈다. 1981년과 1982년에는 공식 수행원 명단에 없던 ‘재무차관’이 1983년에 들어간 것이다. 그의 차관 임명에 대한 의구심이 더 깊어질 수밖에 없다.

또 재무차관 대신 재무장관이 갈 수는 없었을까. 1982년 6.24 개각 때 재무장관이 된 강경식(姜慶植)은 아웅 산 폭거 닷새 뒤 함병춘 후임으로 전두환의 비서실장이 되고, 이후 민정당.민자당.신한국당 국회의원을 지내다 김영삼 정부 말년에 또 재무장관이 돼 IMF 사태를 맞는다.

이기욱 재무차관만이 아니었다. 1981년이나 1982년 명단에는 들어있지 않았던 직책이 1983년에 여럿 들어갔다. 과학기술처 차관과 해외협력위 기획단장, 청와대 공보비서, 민정당 총재 비서실장. 이런 저런 이유를 붙이면 누구라도 공식 수행원이 될 수 있지만, 억지로 수행단 규모를 키웠을 수 있다. 그런 이들은 전두환 패거리나 이들의 상부 조직과 선이 닿지 않는 ‘비실세’들일 것이다. 차관 셋과 언론 출신 정객 둘 등 다섯 모두 아웅 산 묘소 앞에 도열했다 폭탄 세례를 받을 사람들이었다.

김용한(金容瀚)은 1982년 1월 차관이 됐다 살을 맞았다. 과기처는 왜 장관이 아닌 차관이 가야 했을까. 이때 과기부 장관은 1980년 9월 전두환 정권 출법 초기부터 1985년 3월 물러날 때까지 무려 4년 6개월 재임하며 전두환 곁을 지킨 이정오(李正五). 역시 실세였다. 육사 13기이기도 했다.

[신임 이정오 장관은 한국과학원 교수에서 지난달 26일 한국과학기술연구소장, 한국과학원장 및 과학재단이사장 등 세 직책의 장(長)을 한꺼번에 맡았다가 일주일 만에 다시 장관으로 기용 ... 57년 육사를 졸업하고 다시 서울대에서 이학석사 학위 ... 67년 미국 터프[터프스]대학에서 기계공학으로 박사학위 ... 육사.중앙대에서 교편을 잡은 다음 73년부터는 한국과학원에서 지난달까지 재직 ... ] (<동아일보> 1980.9.2 / 같은 날짜 <경향신문>은 그가 1971년 중령으로 예편했다고 썼다.)

이정오는 또한 아웅 산 공작이 성공한 뒤 단행된 개각 때도 자리를 지켜 ‘최장수 장관’(3년 1개월) 소리를 들었고, 1985년 2.19 개각 때 물러난 뒤 그해 3월 일해재단 2대 이사장이 돼 전두환과 영욕을 함께한다.

( 조선일보 1983.11.30 / 이정오 과기처 장관이 미국 대통령 과학고문의 초청으로 미국을 방문한다는 소식.)

하동선(河東善) 해외협력위원회 기획단장도 수행원 늘리기의 희생양이었음이 분명하다. 서울대 법대를 나와 재무부 이재2과장, 금융제도심의관, 이재국장, 재산관리국장, 세정차관보를 거쳐 제2차관보로 일하다, 1983년 2월 1일 현판을 단 이 조직의 기획단장이 됐다.

이 조직 역시 비실세의 몫이었다. 당초 이범석 외무장관이 외무부 해외협력청 신설 구상으로 시작됐지만, 이후 1년여 동안 지루한 부처 간 논쟁 끝에 경제기획원 산하 해외협력위원회로 낙착을 본 조직이었다. 이런 분란 속에 출범한 조직은 오랜 기간 이리저리 치받치게 돼 있다. ‘과도기’ 냄새를 풍기는 ‘기획단장’도 하 씨가 ‘비실세’였음을 말해준다.

(사진 좌: 매일경제신문 1983.2.1) (사진 우: 매일경제신문 1983.2.2)

조직이 출범한 뒤 이렇다 할 역할을 못 하다 하 단장이 폭사한 뒤, 강신조(姜信祚) 국방부 제2 관리차관보를 거쳐 1984년 3월 김기환(金基桓) 청와대 정무2수석이 단장을 맡고 나서부터 각광을 받기 시작했다. 김기환이 단장이 될 때 강신조는 조폐공사 사장으로 영전했고, 김기환은 1986년 2월까지 단장으로 일하다 일해재단 3대 이사장이 된다.

최재욱(崔在旭)은 <동아일보> 정치부 기자로, 박정희가 죽고 전두환이 12.12 쿠데타로 힘을 키울 때 청와대를 출입하다 1980년 말 청와대 공보비서로 들어갔다. 1981년과 1982년 전두환의 해외 순방 때는 수행원 명단에 끼지 못하다, 1983년 순방 때 공식 수행원 명단에 끼었다. 그도 ‘덤’이었을 것이다. 또 비공식 수행원이면서 현장에 있다 폭살당한 청와대 공보비서관 이재관(李載寬, 한국일보 기자 출신)도 마찬가지였다. 청와대 대변인 겸 공보수석(황선필. 黃善必)과 그 아래 직급인 공보비서관 둘까지 셋이 함께 헌화식에 참석해야 할 이유가 없다.

1983년 3월 31일 민정당 총재 비서실장이 된 심상우(沈相宇)가 포함된 것도 역시 ‘덤’일 것이다. 심상우는 광주서중과 광주일고를 졸업했고 미 몬태나주립대에서 공부한 뒤 호남전기 사장, 전남매일신문 사장, 광주일보 회장 등을 지낸 광주 재력가의 아들로, 11대 국회의원 선거(1981.3.25)를 통해 광주 지역구에서 금배지를 단 정치 신인이었다.

( 경향신문 1983.4.1)

그는 정치 신인이면서 국회 문공위 간사를 지낸 수완가로 소문이 나 있었지만, 그의 수완은 거기까지였던 모양이다. 그의 전임자인 남재두(南在斗)는 10개월 전 5.21 개각과 동시에 이뤄진 당직 개편 때 총재비서실장이 된 이로, 부친의 뒤를 이어 대전일보 사장을 지냈다. 그런 남재두를 그만두게 하고 광주일보 회장을 지낸 심상우를 당 총재비서실장에 임명한 이유가 무엇일까. 남재두도 ‘살림당한’ 것일까. 이 또한 남재두의 이력이 말해줄 것이다.

1985년 제1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정의당 후보로 충청남도 대전시 동구 선거구에 출마해 당선된 것을 시작으로, 13.14.15대까지 내리 4선을 하며 전두환과 노태우의 곁을 지켰다. 2000년에는 새천년민주당으로 당적을 갈아탔다 낙선했다.

강인희 차관처럼 2년 연속 전두환의 순방에 따라갔다 변을 당한 이들이 이범석 외무장관과 함병춘 비서실장이고, 1981년부터 내리 세 번을 수행했다 목숨을 잃은 이들은 청와대 경제수석 김재익(金在益)과 대통령 주치의 민병석(閔炳奭)이다.

김재익은 흔히들 말하는 ‘아까운 인재’의 대표격으로 거명되며, 또 전두환이 그를 각별히 아꼈다거나 그에게 ‘경제는 당신이 대통령이야’라고 했다는 둥 그럴듯한 말이 돌지만 모두 지어낸 말이다. 전두환네 군부독재 정권의 들러리 비실세들을 죽여 놓고 ‘북괴가 아까운 우리 인재들을 죽였다’고 선전하기 위해 이런저런 말들을 만들었을 것이다.

이처럼 공식 수행원 명단에는 전두환 정권의 ‘비실세’들이 다수 포함돼 있었다는 사실과 함께, 그 명단에 들어갔을 법한 ‘정권 실세’들이 빠진 정황도 있다. 1981년 동남아 순방 때 포함됐던 허삼수(許三守) 사정수석(육사 17기), 1982년 아프리카 순방 때 포함됐던 이학봉(李鶴捧) 민정수석(육사 18기) 등 전두환의 쿠데타 공범들이 그들이다.

1980년 9월 9일 대통령 비서실 사정수석에 임명됐던 허삼수는 1982년 12월 20일 허화평(許和平) 정무수석과 함께 물러났다지만, 이학봉은 1980년 9월부터 1986년 1월 안기부 2차장이 될 때까지 장장 5년 간 민정수석 자리에 앉아있었다. 그는 왜 버마 행각에 빠졌을까. 또 허화평과 허삼수 대신 들어온 정순덕(鄭順德)과 정관용(鄭寬溶)도 있었지만 이들도 가지 않았다.

역시 이들도 실세였다. 정순덕은 청와대 경호실장 장세동의 육사 동기(16기)로, 1984년 8월 총선을 앞두고 민정당 공천을 받고 나간다. 정관용 역시 3년 동안 자리를 지키다 1986년 1월 총무처장관으로 영전한다.

실세는 빠지고 비실세들이 대거 공식 수행원단에 포함된 듯한 정황은 더 있다. 1982년에도 공식 수행원으로 전두환을 따라 아프리카를 돌았고, 1983년 버마에 따라갔다 폭살당한 강인희(姜仁熙) 농림수산부 차관. 그는 1960년대부터 농업 분야에서만 일해 온 한국 농정의 산 증인 같은 이였다. 박정희 정권 말년에는 농수산부 식량차관보로 식량과 물가 문제 정책에도 관여했고, 1980년 7월 19일 최규하 대통령에 의해 농림수산부 차관에 임명돼 3년 넘게 자리를 지켰다. 그런데 변을 당했다.

( 매일경제신문 1980.7.21)

그는 왜 2년 연속 전두환의 순방에 따라가야 했을까. 1982년 5.21 개각 때 고건 후임으로 농림수산부 장관이 된 박종문(朴鍾汶)은 왜 계속 빠졌을까. 1982년에 차관이 갔다면 1983년에는 장관이 갈 수도 있었다. 그런데 박종문은 실세였고, 강인희는 한낱 소신파였다. 강인희는 매사에 직설적이었고 소신을 굽히지 않는 성격이었다. 어떤 이들에게는 매우 비호감이었을 것이다. 그의 농수산차관 임명 당시의 신문 프로필이 눈에 띈다.

[말이 적다. 곧잘 얼굴을 붉힌다. 어느 때나 진지하다. 그만큼 그는 순수하고 일에 열심이다. 그러나 그런 사람이 흔히 그렇듯이 다소 비사교적이고 폭이나 여유가 적어 보인다.  ... 의대를 졸업, 경제기획원에서 관리 생활을 시작한 이후 농수산부 근무 13년 만에 차관 자리에 오른 ... ] (<동아일보> 1980.7.19)

반면, 박종문은 전두환의 국보위에서 농수산분과위원장과 입법위원을 지낸 것을 시작으로 시종 전두환의 주변을 맴돌았다. 역시 농정 전문가였던 박종문은 그렇게 국보위에 몸담은 덕에 1981년 4월 강원도지사로 영전했고, 다시 1년 1개월 뒤 농림수산부장관의 자리를 하사받았을 것이다.

( 매일경제신문 1982.5.22)

그는 1985년까지 장관 자리를 지켰고 장관에서 물러난 뒤 민정당 제12대 국회의원(전국구)을 지냈다. 검찰이 ‘5공 비리’를 조사할 때인 1988년 3월 24일 정오께 검찰청사로 경북 선산군 농민들이 물려와 전두환의 동생 전경환(全敬煥)과 박종문이 1984년 소값 파동의 주역이라며 둘을 처벌해 달라며 울분을 토로했다(<경향신문> 1988.3.25).

그의 급출세는 1981부터 1985년 2월까지 새마을운동중앙협의회 사무총장(1985~1987.2 새마을운동 중앙본부 회장)을 지낸 전경환과 인연이 있었을 것으로 볼 수 있는 대목이다.

1989년 5월, 5공 비리 청문회 때 위증한 혐의로 서울지검에 의해 고발당했고, 그해 9월에는 허문도.이상재 등 5공의 꼭두각시들과 함께 출국금지되고, 1991년 1월 징역 2년이 구형됐지만 - 이후 김영삼과 노태우가 손잡은 보수대연합 이후 - 검찰의 공소 취하로 유야무야했다.

‘살생부’ 명단이 전부는 아니었다. 공식 수행원 명단에 포함됐지만 아웅 산 묘소 도열 명단에 들지 않은 이들이 있고, 도열 명단에 들고도 도열하지 않은 공식 수행원도 있었다. 특히 후자는 매우 특이한 경우다. 이 ‘특별한 예외’의 주인공은 황선필(黃善必) 청와대 대변인이었다. 그가 도열에서 빠진 것은 아마도 ‘예정된 작전’을 위한 전두환네의 배려였을 것으로 본다. 우선 그가 도열에서 빠지게 된 경위.『전두환 회고록』에 따르면 황선필은 ‘별로 긴급하지도 않은 사안’을 갖고 전두환을 찾아간 것으로 돼 있다.

[영빈관을 출발하도록 예정된 10시 20분까지는 시간이 많이 남아 있었다. ... 영빈관에 함께 묶고 있는 수행원들의 숙소를 둘러보고 있는데 황선필 공보수석이 찾아왔다. 수행기자 가운데 동아일보 기자가 출국 직전 교체되었다는 사실을 보고했는데 긴급한 사안은 아니었다.](498쪽)

최병효 전 대사의 이야기를 곁들여야 한다.

[황선필 공보수석은 그날 아침 호텔을 떠나 영빈관에 가서 대통령에게 수행 기자단에 대해 보고를 하던 중 시간이 지체되었고 다시 호텔로 돌아와서 행사장으로 가는 바람에 폭발 시점에 아직도 행사장에 도착하지 못하고 ...] (최병효 책『그들은 왜 순국해야 했는가』129쪽)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전두환과 그 일행이 일부러 미적대며 행선지로 가지 않았다 해도, 장차관들이 모두 묘소 앞에 도열해 있는 상황이라면 청와대 대변인도 마땅히 미리 가 있어야 했다. 그러지 않고 뭘 보고하네 어쩌네 하며 시간을 끌다 빠진 것이다. 그가 스스로 이런 꼼수를 부렸을 리 없고 누군가 시켰을 것이다. 그러면 이는 ‘작전’이 맞는다. 왜 그랬을까. 그가 해야 할 일이 있었다. 폭탄이 터지면 곧바로 “북괴의 소행으로 보이는 버마 폭발 테러가 발생했다”고 현장에서 발표하는 일이었다.

[【랭군=윤구 특파원】황선필 청와대 대변인은 9일 상오 10시23분(한국시간 낮 12시53분) “북괴가 장치한 것으로 보이는 종류 미상의 폭발물이 폭발, 서석준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 등 공식 수행원 11명과 비공식 수행원 4명 등 15명이 사망하고 ... 16명이 중경상을 이었다”고 ... “그러나 전두환 대통령 내외분은 예정보다 다소 늦게 출발하여 무사했다”고 ... “] (<경향신문> 1983.10.9)

( 경향신문 호외 1983.10.9)

사건 발생 2시간여 만에, 사건의 내막이 밝혀지기는커녕 현장 조사도 시작되지 않은 상태에서, 또한 범행 현장에는 가지도 않은 자들이 먼저 ‘북괴의 소행’을 외친 것부터가 예정된 계획에 따른 것이었다. 최 전 대사의 말을 통해 이 ‘성명 작전’의 내막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다.

[사건 현장에도 돌아온 수행원들이 한동안 우왕좌왕하는 중에 전에 국가정보기관에서 같이 근무했던 Y서기관이 눈에 띄었다. 그는 경호 업무를 위해 사전에 파견되어 있었다. 그에게 대통령이 이번 테러 사건이 북한 소행이라는 성명을 발표한다는데 무슨 증거도 없이 너무 성급한 게 아니냐고 물었다. 그도 북한의 해외 공작 능력에 비추어 그들의 소행보다는 버마 반군의 소행일 가능성이 크다고 하면서 대통령의 성급한 발표에 대한 반향을 우려하였다.] (최병효 책『그들은 왜 순국해야 했는가』133쪽)
 
앞에서 최재욱 청와대 공보비서관이 공식 수행원단에 포함된 것은 ‘덤’이며, 청와대 대변인 겸 공보수석(황선필)과 그가 함께 따라가야 할 이유가 없다고 지적했다. 청와대 공보수석과 공보비서관을 묘소 도열 명단에 함께 넣어 놓고, 황선필은 빼는 작전이었을 것이다. 황선필이 ‘긴급한 사안도 아닌 것’을 들고 전두환을 찾아가게 한 뒤 ‘공보비서가 둘이나(최재욱.이재관) 가 있다는데 ... 선필이는 남아’ 하지 않았을까.

황선필은 4.19 당시 서울대 학생시위를 주도했다는 거창한 전설과 어울리지 않게, <동아일보> 사회부.정치부 기자로 일하다 박정희의 유신 직후인 1973년 문화공보부 홍보조정관이 됐다. 1977년 문공부 보도국장 겸 대변인으로 유신 1기 언론 통제를 주도했다는 비난까지 받고 있다. 전두환의 쿠데타 당일인 1979년 12월 12일 국무총리 공보비서관을 거쳐 전두환 정권 출범 뒤인 1982년 청와대 공보수석 겸 대변인이 돼 버마에 갔다 생환했던 것.

( 경향신문 1979.7.7 / 주한미군사령부가 황선필에게 문화공보부에 보낼 감사패를 전달하고 있다.)

( 경향신문 1982.6.4 / 동아일보 기자 출신 둘은 청와대 대변인 에 이어 문화방송 MBC 사장 자리도 물려주고 물려받는다.)

그 후 황선필은 계속 전두환의 곁에 있었다. 1984년 8월 전두환의 방일, 1985년 4월 그의 방미 때도 따라갔고, 1986년 2월, 자신에게 청와대 대변인 자리를 물려준 <동아일보> 선배 이웅희(李雄熙)의 후임 MBC 사장이 됐다. ‘5공 주구’를 거부하는 노조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1988년까지 자리를 지키다 임기를 마친 뒤 민정당 공천으로 국회의원에 출마했다 낙선했다. 1991년 한국방송개발원 원장에 내정됐다 이곳 노조로부터 “5공 인사 황선필 반대” 저항에 직면해 스스로 물러났다. 이후에도 그는 전두환네 골프 모임이나 전두환 가족사에는 빠짐없이 참석했고, 전두환의 백담사행을 배웅하는 등 ‘전두환맨’의 본분을 한시도 잊지 않았다.

아웅 산 묘소 도열자 명단에는 들지 않았어도 마땅히 묘소 헌화식장에 갔어야 했지만 가지 않은 이들도 있었다. 장세동(張世東) 경호실장, 김병훈(金炳薰) 청와대 의전수석, 노영찬(盧永瓚) 의전장 등 3명. 이들은 황선필처럼 전두환의 배려 또는 그와 함께 움직인 덕분에 묘소에 가지 않았을 것이다. 장세동.김병훈.노영찬.황선필은 1981년부터 2년째 공식 수행원으로 전두환의 비동맹권 순방에 따라갔지만 손끝 하나 다치지 않았다.

장세동은 ‘전두환의 분신’으로 통하는 인물이고, 김병훈 역시 1980년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시절 전두환과 인연을 맺은 뒤 1988년 2월 전두환이 청와대를 떠날 때까지, 또 그 후 전두환이 백담사가 갔다 오고 나서도 그의 곁을 지킨 ‘가신 그룹’의 일원이다. 전두환 정권이 노태우에게 넘어간 직후인 1988년 3월 국가원로자문회의가 만들어질 때 사무총장이 된 안현태(安賢泰)의 비서실장을 맡기도 했다.

사건이 일어난 뒤 황선필이 해야 할 일이 었었던 것처럼, 김병훈에게도 비슷한 임무가 주어졌다. 폭파 테러 직후 전두환은 김병훈에게 “외무장관 업무를 대행시켜 버마 정부와 사고 수습에 관한 협의를 하도록”(<경향신문>1983.10.10, <조선일보> 1983.10.10) 했다.

노영찬은 샌프란시스코 총영사로 일하다 1982년 5월 외무부 의전장으로 들어온 뒤 3년 동안 전두환의 의전을 책임졌다. 전두환의 버마 행각(일명 ‘국회작전’)을 분초 단위로 짠 이가 그였을 것이다(*‘국화 작전’이란 이름은 반기문 외무장관 비서실장이 붙인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반 씨는 이에대해 일언반구도 언급하지 않고 있다.).

[외무부는 5일 전두환 대통령의 서남아 및 대양주 5개국 순방이 발표되자 그간의 암행 작업을 표면화시켜 노영찬 의전장을 책임자로 하는 상황실을 회의실에 설치하고 종합적인 준비 작업에 착수 ... ‘국화작전’으로 불렸던 이번 전 대통령의 순방 계획은 지난해 말 인도와 호주가 이번 정상외교의 중심 국가로 결정되어 약 9개월간의 암행작업 끝에 발표하게 된 것인데, 본격적인 교섭은 3월부터 시작, 5월 말에 완전히 마무리 지었다고. 이번 전 대통령의 순방 여정은 약 3만3천km.] (「3만3천km ‘국화작전’」<경향신문> 1983.8.5)

노영찬은 1984년 8월 전두환의 방일, 1985년 4월 그의 방미 때도 의전장으로 전두환을 공식 수행했지만, 의전장에서 물러난 뒤의 화려한 이력은 그가 ‘전두환 맨’ 이상이었음을 시사한다. 1985년 5월 포르투갈 대사로 나가 1988년 3월 임기를 마치고 본부로 들어왔지만, 1989년 6월에는 아프리카 순방 특사, 1990년에는 알제리 특사로 활약하다, 1990년 6월부터 1993년까지 프랑스 대사를 지냈고, 다시 본부로 들어온 뒤 1994년 아프리카 특사로 파견됐다. 1996년에는 한-아프리카 문화협회 회장을 지냈으며 최근 유엔 산하 ‘구호개발 NGO 플랜코리아’ 대표를 지냈다. 주로 아프리카를 무대로 활약한 외교관 이력이 이렇게 화려하기가 쉽지 않다.

( 훗날 노영찬은 반기문(유엔 사무총장)과 함께 활동한다. 외무부 의전장관 외무장관 비서실장으로 전두환의 버마 방문 계획 ‘국화 작전’을 짜는데 함께 일했던 둘이 훗날 함께 유엔에서 다시 활동하는 것이 우연일까. 사진 왼쪽이 노영찬)

마지막으로, 아웅 산 묘소 도열 명단에 들지 않았어도 공식 수행원으로서 묘소 헌화식에 참석해야 했거나 참석할 수 있었지만 참석하지 않아 살아난 이들이 2명 있다. 홍순영(洪淳瑛) 청와대 외교 담당 정무수석과 김병연(金炳淵) 외무부 아주국장이 그들이다. 둘이 묘소 헌화식에 참석하지 않은 경위에 대해 최병효 전 대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아웅 산 묘소 헌화식 행사 당일] 오전에 특별한 일이 없으므로 그 행사를 참관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내가 탈 차편이 있는지 묻자 [당시 의전과 이수혁(현 주미대사)이] 좌석이 남으니 같이 가자고 ... 나갈 준비를 하고 있는데 버마 측에서 ... 공동성명 문안을 좀 고쳐야 하니 오전 11시에 외무성으로 오라는 것 ... 내일 정상회담 후 발표할 문서인데 이제 와서 고친다는 것은 상식에도 어긋나는 일이지만 초청국의 요청이니 할 수 없이 ... 김병연 아주국장에게 보고하니, ... 이상한 일이지만 ... 같이 가자고 ... 김 국장과 호텔 복도에서 그 이야기를 하고 있는 중에 마침 홍순영 외교담당 정무비서관이 ... 김 국장이 그를 붙잡아 같이 외무성에 가자고 ... 김 국장과 가까운 사이인 홍 비서관은, 묘소 같은 데는 가고 싶지 않았는데 마침 잘 됐다고 ... ] (최병효 책『그들은 왜 순국해야 했는가』124∼125쪽)

최 전 대사는 버마 측이 어떤 음모의 낌새를 알아차리고 공동성명 문안 수정을 핑계 삼아 최 자신을 살렸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대통령이 서울을 떠나기 오래 전(최소 1주일 이상 전)에 합의된 공동성명문을 이미 국빈방문이 시작된 시점에서 수정하자는 매우 비상식적이고 황당하기도 한 ... 이 비상식적인 이상한 요청이 공식 수행원으로서 아웅 산 묘소에 미리 가서 대기하다가 폭사했을 두 사람(김병연 아주국장, 홍순영 정무비서관)과 도열대 아래서 헌화 행사를 참관하다가 부상을 입을 수도 있는[있었을] 나를 구한 것 ... 버마 외무성 정무총국이 몇 달 동안 우리 측과 공동성명 등 방문의 성과를 내고자 함께 노력해 온 카운터파트의 안위를 고려하여 그러한 상식 밖의 요청으로 우리를 아웅 산 묘소에 가지 못하도록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엉뚱한 상상을 떨칠 수가 없었다. ... 아직까지도 내 머리 속에 그저 미스터리로만 남아 있다.] (최병효 책『그들은 왜 순국해야 했는가』125∼126쪽)

버마 측의 배려는 최 전 대사를 향한 것이었다. 김병연 아주국장은 그의 상관이어서, 홍순영 비서관은 김 국장의 절친한 사이여서 살았다는 것이다. 셋은 천우신조(天佑神助)로 살았다 할 것이다.

그런데 홍순영에 대해서는 엉뚱한 이야기가 전해진다. 2014년 4월 30일 그의 사망 소식을 전하는 <연합뉴스>의 부고 : “1983년 아웅산 폭탄테러 사건 때는 북한의 공작 가능성을 제기해 초기 수습 방향을 잡기도 했다.” <한겨레신문>등 여러 신문과 방송이 그대로 베껴 전했다.

사건 발생 직후 전두환이 “공식수행원인 노영찬 외교부 의전장과 홍순영 청와대 외교담당비서관을 현지에 남겨 사고 수습에 임하도록”(<조선일보> 1983.10.10) 한 사실을 누군가 과대포장한 것일까. 아니면 누군가 그의 죽음을 기화로 한 차례 더 대북 적대감을 조장하려 기자에게 없는 이야기를 전했을까.

P.S.

전두환의 서남아.대양주 순방 계획 발표 때(8월 5일)는 20명, 출국 전날 발표 때(10월 7일)는 22명이던 ‘공식 수행원’은 사건 당일 21명 된다. 공식 수행원 중 1명이 버마에 오지 않았가 때문이다. 그는 처음 발표 때 명단에 없었다 추가된 2명 중 1명인 김종호(金宗鎬) 건설부장관이었다. 일행의 출국 하루 전 발표 때부터 그는 버마에는 가지 않고 다음 행선지인 인도에서 합류하기로 했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우연이라면 우연이겠지만, 그의 ‘버마 패싱’는 황선필의 ‘열외’ 만큼이나 불가사의하다. 건설부장관이 대통령 해외순방의 공식 수행원단에 포함되고도 한 나라를 빼고 다음 행선지부터 합류한다는 것이 정상인가. 만약 처음부터 합류하기 힘든 사정이 있다면 공식 수행원단에서 빠지는 것이 정상 아닌가.

이범석 장관의 경우, 수술을 받은 잇몸 실밥을 뽑고 하루 늦게 가겠다고 전두환에게 얘기했다 “장관이 돼 갖고 그깟 일로 ... ”하며 혼이 났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4편 글 참조). 그런데 건설부장관 김종호에게는 무슨 까닭으로 인도 일정부터 합류하기로 하는 특전이 부여됐을까. 누가 그에게 ‘버마 패싱’의 기회를 줬을까.

1981년엔 건설부 장관이, 1982년엔 건설부 차관이 전두환의 순방에 따라갔던 터라 장관이든 차관이든 둘 중 하나는 공식 수행원단에 넣었어야 했던 모양이다. 장관이 다른 일정과 겹치면 차관이 가면 될 일이었다. 그런데 굳이 김종호 장관을 공식 수행원단에 집어넣어야 했을까. 혹시 한 해 전 순방에 따라갔던 이관영(李寬永) 차관이 가지 말아야 할 이유가 있었을까. 혹시 이관영이 실세고 김종호가 곁다리였을까?

어쨌든 이관영 차관이 아닌 김종호 장관이 공식 수행원이 됐고, 마땅히 그는 아웅 산 묘소에 도열해야 할 운명이었다. 그런데 그는 순방단이 버마로 떠나기 2주 전인 9월 27일 “해외건설 현장 시찰 및 발주국 정부 요인과의 건설 외교 강화를 위해 중동 및 아프리카 10개국을 방문”한다며 출국했다. 적어도 이때까지는 일정을 단축해 대통령을 수행하기로 돼 있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막판에 ‘버마 일정 불가’ 요인이 발생했을 것이다. 그가 중동과 아프리카를 돈 뒤 영국 런던으로 간 이유다. 중동과 아프리카를 돌던 그가 왜 영국으로 가야했는지에 대해서는 일절 알려진 것이 없다.

김종호는 육사 8기 출신으로, 소장으로 예편한 뒤 아세아자동차 부사장을 거쳐 금호산업 사장을 지내다 전두환의 5.18 광주학살 열흘 만인 1980년 5월 28일 전남지사에 임명됐다. 5월27일 공수부대가 ‘도청 진압 작전’으로 무수히 많은 이들을 살상한 다음날, 장형태(張炯泰) 지사가 사표를 내자 그 자리를 차지한 것이다.

이어 1년 7개월 만인 1982년 1.3개각 때 건설부 장관이 됐다. 그러더니 3월 말부터 약 한 달 동안 ‘대통령 특사’ 자격으로 인도네시아와 네팔, 요르단, 아랍에미리트연합, 말레이시아와 필리핀 등 아.중동 7개국을 다녀온 것을 시작으로 본격적으로 해외를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5월에는 사우디아라비아와 리비아, 아랍에미리트연합, 홍콩, 대만 등 5개국을 다녀왔다.

1983년에도 김종호의 해외 나들이는 계속됐다. 7월 16일부터 2주일에 걸쳐 홍콩과 필리핀, 브루나이, 싱가포르,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등 동남아 6국을 순방했고, 9월 27일부터 중동 및 아프리카 10개국을 돈 뒤 영국 런던으로 갔던 것이다.

좀 특별한 해외 나들이도 있었다. 1983년 2월 말 미국 주택도시개발장관(새뮤엘 피어스) 초청으로 워싱턴을 방문한 것. 한미 양국 건설업계가 중남미와 아프리카 등 제3국 시장에 공동으로 진출하기 위한 방안을 모색한다는 취지였다. 2월 28일 미국 국가건설협회(NCA) 회장(윌리엄 존스)과 NCA 국제업무위원장(마빈 마커스) 등을 만났고, 이때 미국 거대 기업 벡텔(Bechtel)과 한국 건설회사가 공동으로 출자해 기술전담회사를 설립키로 했다는 소식도 전해졌다.

벡텔은 이라크의 이란 침공으로 시작된 중동전이 한창일 때 한국의 값싼 노동력을 활용해 중동 시장을 장악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벡텔은 또 이란-이라크전에서 이어지는 1.2차 걸프전을 통해 막대한 수익을 챙겼고, 2001년 9.11 자작테러를 시작으로 20년 넘게 계속되고 있는 ‘테러와의 전쟁’으로 파괴와 건설 재미를 톡톡히 보고 있다. 차관에게도 밀려 살생부에 든 김종호에게 ‘버마 패싱’의 기회를 준 것인 벡텔 쪽이 아니었을까.

( 매일경제신문 1983.3.1)

(25편으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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