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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랑의 고전소통] 人物論 良臣은 군주의 행동을 비추는 거울
[위징 魏徵] 군주를 편안하게, 백성을 행복하게 하다
이정랑 | 2021-05-12 08:12:55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위징 魏徵】 군주를 편안하게, 백성을 행복하게 하다

양신(良臣)은 부귀와 명성을 누리면서도 군주의 명성을 빛내고, 충신(忠臣)은 죄를 얻어 이름만 남기고 죽는다.

의(義)란 무엇인가? 의는 천금과 같은 것이다. 말에는 반드시 믿음이 있어야 하고 행동에는 반드시 결과가 있어야 한다 言必信行必果. 인격의 수양에 있어서 의 또는 의기(義氣)를 중시하는 것은 하나의 미덕임이 틀림없다. 누가 뭐라 해도 신의를 지키고 정의를 수호하는 군자가 무상함을 반복하며 이익만을 추구하는 소인배 보다, 낫기 때문이다.

하지만 의에도 대의(大義)와 소의(小義)가 있어서 모든 일을 소의에 맞춰 추진한다면 권력의 변화에 통달할 수 없게 되고 대의를 위해 개인적인 소의를 희생할 줄 모르게 된다.

때문에, 맹자는 맹목적으로 의를 중시하는 행태에 대해 “말에 반드시 믿음이 있어야 하는 것도 아니고, 행동에 반드시 결과가 있어야 하는 것도 아니다 言不必信 行不必果,”라고 말했다. 물론 맹자는 사람들에게 억지 궤변을 늘어놓은 것이 아니다. 그는 대의를 위해서라면 이른바 믿음과 결과를 포기할 수도 있음을 말한 것이다. 오늘날의 표현을 빌리자면 원칙을 지키되 구체적인 상황 분석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때문에, 전통사회에서는 “훌륭한 짐승은 나무를 택해서 보금자리를 짓고 훌륭한 신하는 군주를 택해 섬긴다 良禽擇木而栖 良臣擇主而事.”라는 말이 선비들이 군주를 택하는 가장 보편적인 원칙이 되어왔다.

중국 역사에 있어서 이러한 예는 무수히 많았지만, 그 대표적인 인물로 당나라의 명신이었던 위징만 한 인물이 없었다.

위징이 태어난 북주 정제(靜帝) 대상(大象) 2년(580)은 천하가 대란에 처해 있던 시기였다. 위징은 서향세가 출신이었고 그의 부친은 박학다식한 인물로서 수(隋) 왕조에서 지방관을 지낸 바 있지만, 부친이 너무 일찍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그의 가족은 어려서부터 매우 빈궁한 생활을 해야 했다.

하지만 위징은 가슴속에 언젠가 큰일을 이루고 말겠다는 웅대한 뜻을 품고 있었다. 이를 위해 그는 각고의 노력으로 독서에 힘쓰고 학문과 정치적 재능의 기초를 닦았다.

수양제가 주색에 빠져 정사를 돌보지 않는 날이 계속되자 각지에서 영웅호걸들이 분분히 기병하여 수 왕조에 대항하기 시작했다. 위징은 먼저 원보장(元寶藏)의 기의군에 참여했으나 대세의 흐름을 알 수 없어 출가함으로써 일시적인 난국을 피했다.

나중에 위징의 사람됨을 잘 아는 또 다른 기의군의 수령인 이밀(李密)이 그를, 막하로 불러들여 군중의 문서를 관장하게 했다. 이때 그의 나이 이미 38세였다.

이밀의 군중에서 위징의 지위는 그리 높지 않아 아무런 발언권도 없었다. 당시 이밀의 와강군(瓦岡軍)은 세력이 막강하여 수 왕조의 주요 양곡 창고인 하남의 낙구창과 화락창, 여양창 등을 점령한 후 창고를 개방하여 굶주린 백성들을 구제함으로써 기의군의 전성시대를 맞았다. 이때 관군의 대장 왕세충(王世充)이 낙양을 지키면서 기의군과 목숨을 건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위징은 기의군의 부족한 점을 냉정하게 파악하여 간언을 올렸다.

“기의군이 승리를 계속하고 있긴 하지만 잃는 것도 적지 않습니다. 군대를 운영하는 비용도 넉넉지 않고 비축된 물자도 한계가 있지요. 따라서 지금으로서는 무모하게 공격하는 것보다 적군의 군량이 떨어져 철수할 때쯤 추격하여 무찌르는 것이 바람직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밀은 속전속결을 주장하며 대규모 공격에 나섰다가 왕세충의 화공에 참패하여 돌아왔다. 이 전투로 와강군의 전력은 철저하게 파괴되고 말았다. 추격을 받던 이밀의 패잔 병력은 이연에게 투항했다. 그러나 그 대우에 불만을 품고 다시 낙양으로 돌아가 군사를 모아 재차 기병하여 이연에 대항했지만 얼마 후 대패하여 주살 당하고 말았다.

위징은 이연의 이당(李唐) 정권에 희망이 있다고 판단하고 이연을 찾아가 이밀의 군대를 받아들일 것을 요청했다. 당 왕조의 신하가 된 위징은 나중에 이연의 동의를 얻어 군주의 예를 갖춰 이밀의 장례를 성대하게 치러주고 「당고형국공이밀묘지명 唐故形國公李密墓誌銘」이란 제문을 지어 그를 해하에서 패한 항우에 비유하며 그의 공적과 인품을 서술했다. 문책을 두려워하지 않고 전에 섬기던 주인을 애도하는 그의 충심에 사람들이 모두 칭송했고 그가 이밀을 배반하고 이연에게 투항한 것이 아님을 인정했다.

나중에 위징은 기의군의 수령이었던 두건덕(竇建德)의 권유와 협박에 못 이겨 1년 반 동안 그의 군중에 있다가 얼마 후 두건덕과 왕세충이 전부 이세민에게 패하자 다른 사람들과 함께 다시 이연에게 귀의했다.

농민군의 대오에 들어간 것이 비록 협박에 의한 것이었다고 해도 또 당 왕조에 중용되기는 어려웠다. 태자 이건성은 위징이 유능하고 인품을 갖춘 인물이라는 소문을 듣고 그를 불러다 도서와 경적을 관리하는 세마(洗馬)라는 작은 관직을 주었다. 이 시기에 위징에겐 약간의 명성이 있긴 했지만 실제로는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했다. 단지 이건성에게 병력을 이끌고 나가 유흑달(劉黑闥)을 공격함으로써 군공을 세우고 몰래 호걸들과 교우하도록 건의한 것이 전부였다. 태자는 그의 건의를 받아들여 만족할 만한 성과를 거두었다.

이당 정권이 천하의 대세를 장악한 후 이세민은 ‘현무문 정변’을 일으켜 형인 태자 이건성과 동생인 제왕 이원길을 죽이고 자신이 스스로 태자가 되었다. 이세민도 위징이 이건성의 심복으로서 보통 인물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그를 불러놓고 말했다.

“당신은 무엇 때문에 우리 형제 사이에 끼어들었던 것인가?”

워낙 교언영색(巧言令色-남의 환심을 사려고 번지르르하게 발라맞추는 말과 알랑거리는 낯빛)을 모르는 위징은 사실 그대로 대답했다.

“사람에겐 누구나 주인이 있기 마련이지요. 만일 태자께서 제 말을 들었다면 오늘 같은 결과가 발생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제가 이건성에게 충성을 다한 것이 무슨 잘못이 있단 말입니까? 관중도 제환공의 허리띠를 활로 쏘아 맞힌 적이 있지 않습니까?”

이세민은 위장의 솔직하고 일리 있는 대답을 듣고는 그의 대담한 기백에 감복하여 그를 즉시 사면하고 그를 주부(主簿)로 봉했다. 이로써 위징은 주인 없는 생애를 마감했다.

이세민은 황제로 즉위하자마자 위징을 간의대부(諫議大夫)로 임명했다. 위징의 명성은 신하의 의견에 겸허하고 소박한 태도로 기꺼이 귀를, 기울이는 태종이 있었기에 가능했고, 또 당 태종의 치적은 황제의 비위를 거스르면서까지 직언을 서슴지 않는 신하 위징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신하는 직언을 서슴지 않고 임금은 그 직언을 거리낌 없이 받아들이는 군신 관계는 중국 역사에서 보기 드물게 아름다운 한 장을 장식한다.

간의대부는 전문적으로 황제에게 의견을 제시하는 직책으로서 아무런 권한도 없으면서 황제의 신임에 따라 막강한 권력을 발휘할 수 있는 지위였다. 당 태종이 위징을 간의대부로 임명한 것은 그의 능력을 인정하는 동시에 그의 됨됨이 자체를 존중하고 신임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 후 위징은 상서승(尙書丞)으로 승급하여 태종의 일거수일투족을 수행하면서 수시로 간언을 올렸다.

국가의 주요 통치전략으로 위징은 조세와 부역을 가볍게 하는 등 백성들의 삶을 보살필 것을 주장했다. 그는 수 왕조가 멸망한 원인을 세금 부담이 너무 크고 부역이 너무 많아 백성의 삶이 피폐해졌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이에 따라 조세와 부역의 부담이 월등히 가벼워졌고 이는 태종의 정관치세를 이루는 기초가 되었다.

태종이 막 즉위하고 천하가 간신히 안정 국면으로 접어들었지만, 온갖 병폐가 여전히 백성들을 괴롭히고 있었다. 어느 날 태종이 위징에게 물었다.

“현명한 군주가 나라를 잘 다스리려면 백 년의 세월은 필요하지 않겠소?”

위징은 태종의 생각에 동의하지 않았다.

“성명(聖明)한 군주가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소리가 금방 메아리가 되어 돌아오는 것과 같습니다. 1년이면 충분히 효과를 볼 수 있고 3년이면 너무 늦습니다. 그런데 백 년을 기다릴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상서우복야 봉덕이(封德彛)가 나서서 말을 받았다.

“예부터 인심은 강물과 같아서 세월이 지나면 간사해지기 마련입니다. 진(秦)이 가혹한 형벌을 쓰고 한(漢)이 패도를 이용했던 것은 인심을 교화하는 데 성공하지 못했기 때문이지요. 위징은 지금 서생의 기질로 나라를 다스리려 하는데, 결코 성공하지 못할 것입니다.”

위징도 지지 않았다.

“대란이 휩쓸고 간 다음에는 나라를 다스리는 것이 오래 굶주린 사람이 먹을 것을 찾는 것처럼 아주 빨리 이루어집니다. 만일 인심이 물처럼 위에서 아래로만 흐른다면 지금 살아 있는 사람들은 오래전에 귀신이 되었을 텐데, 어떻게 치국을 얘기할 수 있겠습니까? 제도(帝道)를 행하면 황제가 되고 왕도를 행하면 왕이 되는 것이지요. 대업은 사람의 행하는 바에 달린 것이지 백성들을 교화시킬 수 있느냐의 여부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태종이 위징의 의견을 받아들여 적극적인 조처를 한 결과 3년도 채 안 돼서 대당제국은 이른바 정관치세의 태평성대를 누릴 수 있었다.

법의 집행에 있어서 위징은 정확하면서도 관대한 처리를 주장했다. 그는 진나라 때와 같은 가혹한 형벌을 반대하고 사사로운 감정에 얽매이지 않는 법률 적용을 강조했다.

한번은 태종이 노조상(盧祖尙)을 교주자사로 임명했는데, 노조상은 처음에는 이를 수락했다가 얼마 후 병을 핑계로 부임을 거부했다. 태종이 직접 만나 다시 권유해봤지만 받아들이지 않았다. 태종은 몹시 화가 나서 그를 당장 주살해버렸다. 나중에 태종은 자신의 처사가 너무, 지나쳤다고 후회하며 모든 일을 법률에 따라 처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때 위징이 나서서 북제의 황제였던 고양(高洋)이 매사에 신중하게 자신과 상대방의 입장을, 생각하고 처신했던 사례를 들어 태종을 비판했고 태종은 그의 충언에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태종이 진왕(秦王)으로 있을 때 부하였던 복주자사 방상수(龐相壽)는 태종의 위세를 믿고 부패 행위를 저질러 고소를 당했는데, 추궁 끝에 뇌물을 받은 것이 드러나 관직을 박탈당했다. 방상수가 태종에게 선처를 호소하자 태종은 옛정을 생각하여 그에게 비단 백 필을 보내고 다시는 부패 행위를 저지르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낸 후 자사의 관직을 유지하게 했다. 위징이 이 사실을 전해 듣고 태종에게 말했다.

“방상수는 엄연히 죄를 범했는데도 폐하께서는 오히려 그에게 후한 상을 내리시고 관직을 보전해주셨습니다. 이는 사사로운 정리로 법률을 깨뜨리는 행위입니다. 폐하께서 진왕으로 계실 당시의 부하들이 적지 않는데 이들이 모두 방상수처럼, 범죄를 저지른다면 그때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상을 내릴 때는 소원한 사람들을 잊지 말고 징벌을 내릴 때는 측근과 귀족들에 대한 정리를 염두에 두지 말아야 합니다. 모든 상벌은 공정과 인정(仁政)을 원칙으로 해야만 사람들을 설복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위징의 강경한 주장에 태종은 자신의 처사를 철회하지 않을 수 없었다.

위징은 또 백성들의 신임을 얻기 위해선 조령모개(朝令暮改-아침에 명령을 내리고 저녁에 다시 고친다는 뜻으로 ’법령이나 명령이 자주 뒤바뀜‘을 이르는 말)해서는 안 된다고 역설했다. 당 왕조의 정책은 애당초 18세 이상의 남자만 병역에 징집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었다. 한번은 태종이 변경을 수비할 병력을 징집하기 위해 16세 이상의 남자는 전부 징병에 응하라는 명령을 내리려 하자 위징이 반대하고 나섰다.

당시의 규정에 따르면 황제의 명령은 조정의 대신들이 만장일치로 서명을 해야만 효력을 발휘했다. 위징은 태종의 방침이 당조 이전의 법령과 어긋나며 백성들을 혹사하는 조치라 판단하고 여러 차례 서명을 거부했다. 태종이 위징에게 버럭 화를 내며 어째서 황제의 명에 서명을 거부하느냐고 다그쳤다. 위징은 차분한 어투로 대답했다.

“연못을 말려 물고기를 잡고 수풀을 태워 사냥하는 것은 닭을 잡아 계란을 꺼내는 것과 같습니다. 병력은 수를 늘리는 것보다 정예병으로 훈련하는 것이 더 중요한 법인데 어째서 나이도 안 찬 사람들을 징병하시겠다는 말씀입니까?”

결국, 태종은 위징의 의견에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아울러 자신이 너무 쉽게 감정에 좌우된다는 사실을 깨닫고 대신들에게 특별히 자신의 한쪽으로 치우친 결정을 바로잡고 조정의 제도를 올바로 이끌어 달라고 당부했다.

태종은 이전에 없었던 새로운 제도를 제정하여 간관(諫官)과 사관(史官)들에게 정사를 논하는 회의에 참여하게 했다. 이러한 제도는 간관과 사관들에게 조정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적시에 알아 간언을 올림으로써 재상이나 다른 대신들이 정무를 소홀히 다루지 못하게 하는 감찰 기능의 효과를 거두었다.

또 황제건 대신이건 간에 과실이나 부당한 행위가 있을 때 간관이 회의 석상에서 이를 지적하고 이를 변론할 수 있도록 규정했다. 또 사관은 황제와 대신들의 상황을 정확히 이해하여 일차적인 자료에 근거하여 기거주(起居注-황제의 생활을 자세히 기록한 글)를 작성함으로써 기본적인 감독 기능을 할 수 있었다.

위징은 이처럼 관대하고 자유로운 환경에서 간관의 직책을 수행할 수 있었고 그가 올리는 간언의 내용은 치국과 군정에서부터 황제의 일상생활에 이르기까지 미치지 않는 곳이 없어 태종이 ’정관의 치세‘를 실현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인재 활용에 있어서 위징은 시대 상황에 따라 인덕과 능력을 취사 선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위징이 태종에게 말했다.

“천하가 안정되지 않았을 때는 인사의 기준에 있어서 능력을 중시하고 덕행과 행실에 대한 고려를 줄여야 하지만 천하가 완전히 평정된 이후에는 재덕을 겸비한 인재들을 중용해야 합니다.”

위징이 제시한 인사의 원칙에 따라 태종은 안으로는 황실 인척의 천거를 기피 하지 않았고 밖으로는 원수를 중용하는 일도 꺼리지 않았다.

한번은 태종이 먼저 위징에게 말했다.

“관리를 임용할 때는 경솔하게 함부로 발탁해서는 안 될 것이오. 군자를 중용하면 많은, 군자들이 따라오겠지만 소인배를 중용하면 소인배들이 마구 몰려들 것이기 때문이오.”

개인의 향락에서도 위징은 태종의 일거수일투족을 철저하게 감독하면서 간언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한번은 태종이 남산으로 사냥을 나가려고 수레와 말을 준비했다가 이를 취소한 일이 있었다. 위징이 그 이유를 묻자 태종이 말했다.

“원래는 사냥을 나가고 싶었지만, 그대에게 야단맞을 일이 두려워 포기했소.”

정관 4년(630), 태종이 낙양궁을 축조하려 하자 중묘현의 현승인 황보덕참(皇甫德參)이 이를 반대하는 상소문을 올렸는데 그 언사가 매우 격렬했다. 태종이 이에 격분하여 황보덕참을 처벌하려 하자 위징이 그를 변호하면서 자고로 상소문의 언사가 격렬하지 않으면 군주의 마음을 움직일 수 없다고 설득하여 태종의 분노를 가라앉게 했다.

그 후 하남과 섬서 일대에 폭우가 내려 큰 수해가 발생했는데도 태종은 낙양에 정산궁을 수축하려 했다. 이 소식을 들은 위징이 한걸음에 달려와 태종에게 간언했다.

“수나라가 그렇게 빨리 망했던 것은 수양제가 정자와 누대를 축조하는 등 대규모 공사로 백성들의 부역을 가중했기 때문입니다. 현재 남아있는 궁전과 누대만 해도 다 사용하지 못할 정도로 많습니다. 수 왕조의 멸망을 생각한다면 이 누대와 궁전들을 부숴버려도 시원치 않을 것이고, 아까워서 부수지 못한다면 더 짓지 않는 것이 마땅합니다. 천하를 얻을 때의 어려움을 잊고 계속 궁전을 지어 화려함과 향락을 추구한다면 수나라와 똑같은 길을 가게 될 것입니다.”

태종은 위징의 간언을 받아들여 궁전 수축을 중지하고 자재를 전부 수해 지역으로 보내 백성들의 집을 짓는 데 사용하게 했다.

정관 12년(638), 공경대신들이 태종에게 태산에 올라가 봉선대례(封禪大禮)를 거행할 것을 권했으나 위징 한 사람만 아직은 때가 아니라며 이에 반대했다.

태종이 위징에게 말했다.

“그렇다면 그대의 생각을 한번 말해보시오. 혹시 내 공로가 아직 부족하다는 것이오? 아니면 내 덕행이 모자란단 말이오? 그것도 아니면 나라가 태평하지 못하고 변방의 이민족들이 대당제국을 우러르지 않는다는 것이오? 나라가 두루 태평하고 온갖 좋은 징조가 가득하며 농사도 해마다 풍작을 이루는데 봉선대례를 행하지 못할 이유가 어디 있단 말이오?”

“페하의 공로가 아무리 높다고 해도 백성들은 아직 폐하의 은덕을 느끼지 못하고 있고 폐하의 덕행이 아무리 순후하다 해도 폐하의 어진 정치가 아직 전국에 두루 미치지 못하고 있습니다. 전국이 안정되긴 했지만, 사업을 흥성시키기 위한 자원은 부족한 상태입니다. 변방의 이민족들이 폐하의 높으신 뜻을 우러르고 있긴 하지만 조정은 그들의 요구를 만족시킬 능력이 없습니다. 좋은 일이 있을 징조가 많이 나타나긴 하지만 법은 여전히 엄격하고, 몇 년째 계속 풍작을 거두고 있긴 하지만 양곡창고는 아직 비어 있는 상태입니다. 이 모든 것이 아직은 봉선대례를 거행할 수 없는 이유이지요. 제가 사람을 비유로 들어 말씀드리겠습니다. 10년째 중병으로 누워 있다가 간신히 치료되어 피골이 상접해 있는 사람에게 쌀 한 가마니를 들고 매일 백 리를 걸으라고 하면 그는 금세 쓰러질 것이 분명합니다. 수나라의 대란이 10년간이나 지속하다가 폐하께서 전국의 혼란을 바로잡으신 것이 바로 엊그제 일이라 국고가 아직 충실하지 못한데 벌써 대업이 다 이루어졌다고 만천하에 알리는 것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게다가 폐하께서 친히 태산으로 행차하신다면 각국의 사절들이 모두 서둘러 먼길을 달려와야 합니다. 지금 서쪽의 이수와 낙수 유역에서 동쪽의 태산에 이르는 길에는 산과 강은 물론이요, 늪지대와 황무지가 분포해 있고 도로 사정이 열악하여 통행이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어찌 이민족 사절들을 대거 불러들여 우리나라의 허약한 모습을 보여주려 하십니까? 그들에게 많은 재물을 상으로 내린다 해도 그들의 기대를 만족시키기 어려울 것이고, 2년치 부역과 조세를 면제해준다 해도 백성들의 노고를 덜기 어려울 것입니다. 더구나 가는 길에 일기가 순조롭지 못해 가뭄이나 수재를 만나게 된다면 이 일에 동원된 노역자들 사이에 불만과 원성이 자자할 것이라 그때 가서 후회한다 해도 손해를 만회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어찌 이것이 소신 혼자만 폐하의 봉선대례을 막으려고 획책하는 것이겠습니까? 천하의 만백성이 모두 폐하의 은덕을 갈망하고 있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태종은 위징의 간곡한 설득에 결국, 봉선대례를 취소했다.

또 한번은 장안을 떠나 낙양의 현인궁에 갔을 때 일이다. 태종은 그곳에서 바친 음식과 물건들이 마음에 들지 않아 몹시 분개했다. 위징이 망설이지 않고 직간했다.

“수양제는 한없이 향락을 추구하다가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지금 폐하께서 바치는 물건들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역정을 내시면 아랫사람들은 앞으로 폐하를 만족시키기 위해 봉공(奉供)에 최선을 다하려 들것입니다. 그런데 봉공하는 물건에는 한계가 있지만, 상인들의 사치 욕은 무한한 법이지요. 이러다가는 수나라의 치욕을 되풀이하게 될 것입니다.”

태종은 위징의 지적을 두려워하여 검약한 생활에 만족하게 되었다.

위징은 태종의 인격 수양문제도 매우 중시했다. 한번은 위징이 아주 겁 없는 직언을 올렸다.

“윗사람들의 행실이 바르지 못하면 명령을 내려도 복종하지 않는 법입니다.”
위징은 순자(荀子)의 말을 인용하면서 간언을 계속했다.

“군주는 배이고 백성은 물입니다. 물은 배를 띄우기도 하지만 배를 뒤집기도 하지요.”

위징의 말에 크게, 놀란 태종은 이를 마음에 새기는 동시에 태자에게도 이를 전하면서 절대 잊지 말라고 당부했다. 한번은 태종이 위징에게 어떻게 해야 명군이 될 수 있느냐고 물었다.

위징은 수조 때의 대신이었던 우세기(虞世基)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우세기는 수양제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듣기 좋은 말만 하고 귀에 거슬리는 말은 전혀 하지 않았으며 희소식만 전하고 좋지 않은 소식은 일체, 전하지 않았다. 아울러 위징은 “두루 폭넓게 들으면 밝아지고 편벽되게 들으면 어두워진다 兼聽則明 偏聽則暗.”라는 유명한 결론으로 태종의 물음에 답했다.

가장 유명한 것은 충신(忠臣)과 양신(良臣)에 관한 위장의 변론이다. 한번은 태종이 다른 대신들의 참언을 그대로 믿고 위징이 자신의 친척들을 싸잡아 비난했다고 나무랐다가 위징의 해명을 듣고서 자신의 잘못을 깨달은 적이 있었다. 위징은 이런 기회를 놓치지 않고 태종에게 말했다.

“폐하께서는 저를 충신이 되게 하지 마시고 양신이 되게 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태종은 놀라움을 금치 못하며 되물었다.

“대체 충신과 양신이 어떻게 다르다는 게요?”

“차이가 매우, 많지요. 양신은 스스로 훌륭한 명성을 누릴 뿐 아니라 군주에게도 훌륭한 위세와 명망을 가져다주어 자손만대에 이어지게 하는 데 비해 충신은 결국, 미움을 받아 주살 당하기, 십상이고 군주에게는 어리석은 임금이라는 악명을 남겨주며 나라를 망치지요. 결국, 충신이 얻는 것은 공허한 이름뿐입니다.”

위징의 말에 크게 감동한 태종은 연신 그를 칭찬하며 비단 5백 필을 상으로 내렸다.

물론 태종도 인간이라 위징의 간언을 항상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인 것은 아니다. 때로는 몹시 분개했고 심지어 그를 주살하려는 마음을 먹은 적도 있었다. 한번은 태종이 매 한 마리를 헌상받고 매우 좋아하면서 이를 팔 위에 올려놓고 놀고 있었다. 그러다가 멀리서 위징이 다가오는 것을 본 태종은 몹시 긴장하며 위징이 이를 볼까 봐 서둘러 매를 품속에 감췄다. 사실 그 모습을 이미 다 보고 있던 위징은 태종이 하찮은 노리개에 마음을 빼앗기지나 않을까 걱정하여 일부러 정무를 보고하는 척하며 시간을 끌었고 결국 매는 태종의 품속에서 질식사하고 말았다.

위징이 물러가자 태종은 재빨리 품속에서 매를 꺼냈지만 이미 죽은 뒤였다. 태종은 이 일 때문에 몹시 기분이 상했지만 아무 말도 입 밖에 내지 못했다.

이런 위징이 늙어서 병으로 눕게 되자 태종은 거듭 사자를 보내 병세를 묻고 약을 보내주었으며 태자를 대동하여 직접 문병을 하러 가기도 했다.

위징이 세상을 떠나자 태종은 조정의 9품 이상 관리들에게 전부 조문하도록 지시하고 친히 비문을 써서 비석에 새기기도 했다. 그것으로도 위징에 대한 그리움을 달랠 수 없었던 태종은 좌우 대신들에게 유명한 말을 한마디 던졌다.

“사람들은 의관을 바로 보기 위해 구리로 거울을 만들지만, 옛것을 거울로 삼으면 왕조의 교체를 볼 수 있고 사람을 거울로 삼으면 정사의 득실을 알 수 있다. 이제 위징이 세상을 떠나고 나니 짐에겐 거울이 하나 없어진 셈이로구나!”

사람들은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고 열녀는 두 지아비를 섬기지 않는다.”라고 말한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위징은 절대로 충신이라 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천고에 길이 남을 훌륭한 양신임에 틀림이 없다. 그는 개인의 명리를 위해 황제와 조정의 비위를 맞추러 애를 쓰지 않았다. 그의 마음속에는 위로는 군주를 편안하게 하고 아래로는 백성들을 행복하게 해야 한다는 한 가지 원칙밖에 없었다. 그의 충성은 누구나 행할 수 있는 ‘작은 충성’이 아니라 큰 사람만이 행할 수 있는 ‘큰 충성’이었다.

이정랑 언론인(중국고전 연구가,칼럼리스트)

경인일보/호남매일/한서일보/의정뉴스/메스컴신문/노인신문/시정일보/조선일보/서울일보 기자, 편집국장, 논설실장 등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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