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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랑의 고전소통]人物論 망국의 군주, 충정의 장수
이정랑 | 2021-05-27 08:43:27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崇禎皇帝와 袁崇煥】 의심 많은 숭정, 충신 원숭환을 죽게 하다 (上)

군주가 현명하지 못하면 간신이 득세하고 충신을 잃게 된다.

명나라 숭정(崇禎) 3년(1630) 어느 날, 북경의 채소시장은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민족의 반역자’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으며 그의 최후가 어떤 것인지를 보기 위해 모여든 인파였다. 그 가운데는 ‘배신자’의 살 한 조각을 얻어 자신이 진정한 염황(炎皇-중국 고대의 불의 신인 염제(炎帝)와 전설상의 제왕인 황제(皇帝)를 칭함) 자손이며 군자임을 증명하고 겁이 많은 소심증을 치료하려는 개인적인 희망을 안고 찾아온 사람도 있었다. 마침내 ‘반역자’는 죄수를 가두는 수레에 실려 나왔고 능지처참 형을 선고받았다.

‘능지(凌遲)’라는 형벌은 칼로 천 번을 베고 마지막 한 번의 칼침으로 죽음에 이르게 하는 형벌로, 칼을 더 대도 안 되고 덜, 대도 안 되며 이를 어길 경우, 회자수(劊子手-사형을 집행하던 천역賤役)이 처벌을 받게 되는 매우 잔인한 형벌이었다. 따라서 회자수는 먼저 죄수의 겉살을 도려내는 것으로 칼질을 시작하되 혈관을 건드리지 말아야 했다. 혈관을 건드릴 경우, 쉽게 죽음에 이르기 때문이다. 죄수의 몸에서 잘라낸 살은 군중들이 값을 부르며 서로 사겠다고 다퉈 은 한 전에 살 한 점씩 거래되기도 하고, 죄수의 살을 산 사람은 이를 입에 넣고 씹으면서 ‘반역자’를 욕하곤 한다. 사흘째 되는 날 회자수의 마지막 칼질에 마침내 ‘반역자’가 숨을 거두면 그의 시신은 내장까지 말끔하게 군중의 손으로 넘어간다.

이 잔인한 능지처참의 형벌을 받는 비운의 주인공은 한때 용맹한 장수로 이름을 날렸던 원숭환(袁崇煥)이었다.

만력(萬曆) 초년, 만청(滿淸) 정권은 중국 동북 지역에서 떨치고 일어나기 시작했다. 1583년, 누르하치(努爾哈赤)는 조부가 물려준 대규모 군사를 기반으로 20여 년에 걸친 정벌 끝에 마침내 여진족을 완전히 정복하고 후금(後金) 정권을 세웠다. 1618년, 누르하치는 만주족에 대한 명 왕조의 기만행위를 ‘일곱 가지 큰 원한’으로 요약하고, 이를 구실로 명나라를 침략했다. 이듬해에는 요동의 주요 거점인 무순을 점령했다.

정사를 돌보지 않고 매일 주색에 빠져 있던 명나라 신종(神宗)은 정세가 다급해지자 서둘러 요동 경략 양호(楊鎬)에게 10만 대군을 네 개의 지대로 나누어 만청을 격퇴하라고 명령했지만, 결과는 참패였다. 다급해진 조정은 다시 웅정필(熊廷弼)을 요동으로 파견하여 군무를 관장하게 했다. 이런 상황에서 신종이 죽고 그의 아들 광종(光宗)이 왕위를 이었으나 한 달 만에 약물 오용으로 비명에 갔고, 황위는 다시 광종의 아들인 주유교(朱由校)에게 이어졌다. 그가 바로 희종(熹宗)으로, 연호는 천계(天啓)였다.

희종은 황제가 되긴 했지만, 아직 열다섯 살의 소년에 불과했다. 성격이 매우 유약하고 노는 것을 좋아했으며, 목공예에 심취하여 정무를 돌보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태자였을 때 시중을 들었던 태감 위충현(魏忠賢)에게 정사를 전담시키고 자신은 목공예에만 몰두했다.

전권을 쥐게 된 위충현은 온갖 악행을 자행하면서 정직한 대신들을 대규모로 주살하고 중국 역사상 최대 규모의 사당(私黨)인 엄당(閹黨-환관의 정치집단)을 결성하여 국가의 환란을 조장하였다.

이런 상황에서도 웅정필은 요동에서 천신만고 끝에 가까스로 정세의 안정을 이룩해놓았다. 그러나 일부 대신들이 그에 대한 비난과 질책을 계속하자 조정에서는 그의 관직을 박탈하고 원응태(袁應泰)를 통수(統帥)로 임명하여 파견했다. 원웅태는 뛰어난 수리 전문가로 전투에는 문외한이었는데도 경솔하게 병력을 이끌고 원정에 나섰다가 참패했다. 조정에서는 하는 수 없이 웅정필을 다시 기용했지만, 이번에는 병부상서(兵部尙書) 장학명(張鶴鳴)과 손발이 맞지 않았다. 장학명은 웅정필의 부하인 왕화정(王化貞)에게 웅정필의 명령에 불복하도록 사주했고, 결국 전공(戰功)만을 추구하던 왕화정의 실책으로 명군은 또 청군에 참패하는 수모를 겪었다. 조정에서는 진상을 제대로 파악하지도 않고 왕화정과 웅정필을 한꺼번에 구속하는 동시에 장학명을 물러나게 했다. 이러한, 때에 원숭환이 변경을 침범한 만청 군대를 막아내야 하는 중대한 임무를 맡게 된 것이다.

원숭환은 광동 동완 출신으로 선조의 원적은 광서 오주 등현이었다. 그는 성품이 강직하고 담력과 지략이 뛰어난 데다가 군무를 매우 좋아하여 어려서부터 변방을 경영하는 데 뜻을 두고 있었다. 1619년, 원숭환은 진사에 합격하여 복건 소무의 지현으로 부임했다. 1922년에는 다시 북경으로 가서 술직(述職-중국에서 제후가 조회에 나아가 황제에게 직무의 상황을 아뢰던 일) 하면서 친구들과 더불어 요동의 군사업무에 관한 긍정적인 견해를 발표하여 어사 후순(侯恂)의 주목을 받기도 했다. 후순은 조정에 그를 적극, 천거했고 조정에서는 그를 병부직방사(兵部職方司) 주사(主事)로 승진시켜 변방의 군무를 담당하게 했다.

원숭환이 병부 주사로 임명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왕화정이 싸움에 대패하고 돌아온 일이 발생했다. 조정에서는 그의 패배에 크게 경악했다. 사방에서 갖가지 소문이 무성했고 민심도 흉흉했다. 이런 상황에서 원숭환은 혼자 몰래 말을 타고 산해관(山海關-중국 하북성 북동단에 있는 교통 군사상의 요지. 산과 바다 사이에 있는 관(關)이라는 뜻으로 14세기 초 명대(明代)에 성을 쌓고 산해위(山海衛)를 설치해 군대를 주둔시킨 데서 유래된 지명) 밖으로 나가 군정을 살폈다. 얼마 후 북경으로 돌아온 그는 상관에게 산해관의 형세를 자세하게 보고하면서 군마와 군량만 충분히 있다면 혼자서도 산해관을 지켜낼 수 있다고 장담했다. 이에 조정에서는 그를 병부검사로 승급시켰다.

산해관으로 부임한 원숭환은 맨 처음 요동 경략 왕재진(王在晉)의 부하로 들어가 관내의 업무를 담당했다. 당시 왕재진은 산해관의 방비에만 전념하고 있었다. 그러나 산해관과 장성이 너무 가깝기에 산해관을 경계로 할 경우, 북경의 장성이 곧 국경이 되어 이를 잃게 되면 그 결과는 치명적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원숭환은 만일 영원에 성을 축조하면 또 하나의 전장이 생겨 확고한 근거지를 확보할 수 있고, 광활한 전장에서 만청 군대를 저지하거나 궤멸시킬 수도 있기에 만리장성보다 훨씬 완전하고 든든한 방어 수단이 될 수 있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대학사 손승종(孫承宗)은 직접 산해관 밖으로 나가 형세를 관찰하고 나서 원숭환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얼마 후 조정에서는 손승종을 보내 왕재진을 대신하여 요동 주수의 지위를 맡게 했고, 원숭환과 부하 장수인 만계(滿桂)에게 영원에 주둔하면서 변방을 수비하도록 했다. 1622년, 원숭환은 영원으로 가서 곧장 성을 쌓는 일에 착수했다. 영원은 산해관으로부터 약 2백 리 정도 떨어진 곳이었다. 원숭환은 병사들과 힘을 합쳐 성벽의 높이를 3장 2척으로 하고 두께도 특별히 넓게 잡아 이듬해에 성벽을 완성했다. 원숭환은 이 성벽의 축조를 시작으로 20년 동안이나 요동의 방비를 관장했다. 그가 죽기 전까지 만청 군대는 여러 차례 북경성을 비롯한 명의 관내 지역을 공격했지만 단 한 번도 영원 지역을 넘지 못했다.

원숭환과 손승종이 여러 해 동안 고심하면서 변방을 지킨 결과 명나라의 국방력은 크게 증강되었다. 이후 명군은 출격을 시작하여 그동안 빼앗겼던 영토를 하나하나 회복했으며, 방어선을 수백 리나 전방으로 이동시켰다. 계속되는 전공으로 승진을 거듭한 원숭환은 병비부사(兵備副使)를 거쳐 우참정(右參政)이 되었고 주수였던 손승종도 승진을 거듭했다.

이처럼 전선은 안정되었으나 조정은 갈수록 부패하여 위충현의 전횡은 멈출 줄 몰랐다. 이에 정직한 신하들, 특히 동림당(東林黨-명나라 말기 정계와 학계에서 활약한 정의파 관료독서인(官僚讀書人)의 당파) 사람들은 연이어 위충현을 탄핵하는 상소를 올렸다. 이에 대해 위충현은 극단적인 수단을 동원하여 양련(楊連) 등 이른바 ‘6군자’라 불리는 대신 여섯 명을 살해하고 웅정필을 주살했다. 반대파를 제압한 위충현은 더욱 기고만장하여 ‘구천세(九千歲-구천세에 이르도록 영화를 누리라는 뜻. 황제 다음가는 권력자에게, 황제에게 쓰는 ’만세‘ 대신 ’구천세‘ 라고 부른 것에서 비롯되었다. 국가권력을 마음대로 주무르던 권신을 가리키는 말로 쓰이나 아부의 뜻이 강하다)’를 자칭하면서 온갖 수단을 동원하여 재물을 축적했다. 위충현은 손승종이 자기 말을 잘 듣지 않자 손승종의 지위를 박탈하고 측근인 고제(高弟)를 대신 파견했다.

고제는 허풍만 떨 줄 알았지 무능한 위인이었다. 그는 요동으로 부임한 후에도 겁이 많아 영원성을 지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하면서 즉시 군사를 철수시킬 것을 명령했다. 원숭환은 군무에는 전진은 있어도 후퇴는 있을 수 없으며 영원에서 철군할 경우 전선 전체가 붕괴할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고제의 명령에 불복했다. 고제는 원숭환보다 상급자 였지만 문관 출신인 데다가 소심해서 불복하는 원숭환에 대해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못하고 금주를 비롯한 몇몇 수비 거점의 병력을 산해관 안쪽으로 이동시키라는 명령만 내렸다. 결국, 영원성은 폭풍과 설한에완전히 노출되었다.

누르하치는 이런 기회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1626년, 누르하치는 직접 13만의 대군을 이끌고 영원성을 공격했다. 병력이 1만에 불과한 원숭환은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용감하게 맞섰다. 그 유명한 영원대첩의 시작이었다.

같은 해 2월, 누르하치의 팔기 정병은 곧장 산해관을 향해 진격하여 금주와 대능하, 소능하, 행산, 연산, 탑산 등의 방어 보루를 차례로 격파하고 파죽지세로 밀고 들어와 마침내 19일에는 영원성에 도착했다. 그는 먼저 명군에 사자를 보내 30만 대군이 일거에 성을 무너뜨리겠다고 위협하면서 투항을 권고했다. 그러나 원숭환은 30만 청군도 자신에겐 소군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면서 의롭게 죽음으로써 성을 사수하겠다는 굳은 의지를 밝혔다.
누르하치는 먼저 일부 병력을 보내 성을 포위함으로써 명군의 지원을 차단했다. 사실 누르하치가 병력을 파견하지 않았다 해도 고제가 지원 병력을 보낼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원숭환은 의연하게 만계와 저대수(袓大壽)에게 성의 네 문을 맡기고 성 밖의 주민들을 성안으로 이주시키는 동시에 주민과 상인들을 조직하여 식량을 조달하게 하고 혈서를 써서 병사들을 격려했다. 한편 멀리 산서에 있는 처자식을 불러들여 영원성과 생사를 같이하겠다는 굳은 의지를 보였다. 영원성 내의 군민이 일치단결하여 철저하게 진영을 정비한 상태에서 만청 군대를 맞았다.

원래 용맹하고 전투 경험이 많기로 유명했던 만청 군대는 영원성을 공격하면서 더욱더 흉악해져 있었다. 만청 군대는 철갑병을 앞세워 성을 공격했는데, 이들은 모두 두 겹의 철갑으로 무장하고 있어서 화살이나 돌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사다리를 대고 용감하게 성벽으로 올라왔다. 또 철판 장갑차로 뚫고 들어오는 바람에 성내 여러 군데가 파손되었다.

원숭환의 군대도 매우 용감하게 배수의 진을 치고 싸움에 임했다. 이들은 성 위에 서양에서 사들인 열한 문의 홍이(紅夷) 대포를 장착하여 적에게 큰 타격을 입혔고, 가까이 접근한 청군 병사에 대해서는 돌이나 화살을 퍼붓고 주먹으로 가격했으며, 기름과 유황을 묻힌 솜방망이를 던져 적의 병기를 불태웠다. 이렇게 만청 군대의 거듭된 공격은 매번 원숭환이 이끄는 명군의 저항에 격퇴당했다.

문인 출신인 원숭환은 선비의 풍모를 보이면서도 직접 전투를 지휘하곤 했다. 그의 장점은 침착하고 냉정하다는 것이었다. 적병이 성벽을 부수고 쳐들어와도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병사들과 함께 돌을 날라 부서진 부분을 보수했다. 청군과의 전투에서 여러 군데 부상을, 당했지만 적군이 퇴각하자 다시 사수대를 조직하여 성 밖으로 내려가 퇴각하는 적을 뒤쫓아 공격하고 화살 10여 만개를 회수하여 돌아오기도 했다. 한 차례의 전투에서 그가 이끄는 명군은 만청 병사 3백여 명과 장수 10여 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21일, 만청 군대는 재차 공격해 왔지만, 이번에도 성공하지 못하고 닷새 만인 26일에 포위를 풀고 돌아갔다. 적군이 퇴각하자 원숭환은 돌연 학자의 풍모를 보이며 사자를 통해 누르하치에게 편지를 보내 말했다.

“노장께서는 10년 동안 북방을 종횡하면서 승리하지 않은 싸움이 없었지만 이번에 제게 패하셨으니 이는 아마도 하늘의 뜻인 것 같습니다!”

누르하치도 원숭환에게 정중한 답신과 함께 군마를 몇 필 보내면서 조만간 다시 겨룰 것을 약속했다. 성을 공격하다 부상을, 입고 수레에 실려 진영으로 돌아간 누르하치는 여러 종실 귀족들을 모아놓고 말했다.

“짐은 스물다섯에 기병한 이후 43년 동안 진 싸움이 없었고 성공하지 못한 공격이 없었으나 영원성만은 빼앗지 못했구나!”

그는 자존심이 매우 상한 데다가 온몸에 독창을 입어 병세가 가중되면서 몇 달 후에 원계보에서 사망하고 말았다.

영원대첩 소식이 도성에 전해지자 조정과 민간이 모두 크게 기뻐하면서 환호했다. 고제는 영원성을 지원하지 못한 책임을 물어 물러났고 병부상서 왕지신(王之臣)이 그의 자리를, 대신하게 되었으며, 원숭환은 4품인 우검도어사(右檢都御史)로 승급했다. 그 후로도 원숭환은 출격을 계속하여 고제가 포기한 영토를 하나하나 회복해갔다. (下 에서 계속)

이정랑 언론인(중국고전 연구가,칼럼리스트)

경인일보/호남매일/한서일보/의정뉴스/메스컴신문/노인신문/시정일보/조선일보/서울일보 기자, 편집국장, 논설실장 등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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