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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II] 故 안병하 평전 ⑩ 1부 발포를 거부하다
안호재 | 2021-10-13 13:13:52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국가보훈처가 선정한 6·25전쟁 호국영웅 안병하 대위
경찰청이 선정한 경찰영웅 1호 인권경찰 안병하 치안감

● 군 투입되면 경찰은 더 편할 것 기대
  
한편 안병하 국장의 부인 전임순 여사는 17일 자정 무렵 ‘비상’이라며 남편이 나간 뒤부터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직업이 직업인지라 항상 남편은 그랬다. ‘비상’이 걸리면 곧바로 나갔고, 며칠씩 집에 들어오지 못하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군인과 경찰의 아내로 살아가야 하는 사람의 숙명이려니 하면서도 이런 불안을 견디는 건 언제나 자신만의 몫이었다. 오랜만에 집에 들어온 남편은 불과 2~3시간 정도 짧은 시간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가 곧바로 다시 나갔다. 잠시 후 경찰국에서 전화가 왔다. 비상계엄령이 전국으로 확대해서 선도됐다는 사실을 알려왔다.
  
18일 아침 날이 밝자 경찰국 과장이나 경찰서장 부인들 8~9명이 불안한 표정으로 국장 관사에 모여들었다. 돌아가는 상황이 모두 궁금했다. 누군가 관사에 오던 도중에 보니까 대학교에는 이미 군인들이 들어와 있더라고 했다. 바깥 상황이 너무 궁금해 거리로 나가 대학교 앞에 가보니 학생들이 모여 있었고, 군인들에게 돌을 던지기도 했다. 점점 학생들이 늘어갔다. 파출소 앞에도 학생들이 모여 있었다. 시간이 갈수록 그 숫자는 늘어갔다. 뭔가 큰일이 생길 것 같아 걱정스러웠다. 그때 누군가가 오후 2시에 공수부대가 시내에 들어온다고 말했다. 군인들이 들어오면 경찰을 대신해서 시위를 막아 줄 것이므로 차라리 잘된 일 아니냐고 부인들끼리는 서로의 생각을 주고받았다.

꽤 오랜 시간이 흘렀다. 어디에선가 많은 학생들이 몰려왔다. 마침내 누군가 ‘공수부대가 온다“고 외쳤다. 부인들도 그쪽으로 가보았다. 군중 속으로 군 트럭이 몇 대 들어오더니 차에서 내린 공수대원들이 진압에 나섰다. 군인들은 학생들을 진압봉으로 닥치는 대로 때린 다음 차에 실었다. 피투성이가 된 학생들이 고개만 들어도 진압봉을 마구 휘둘렀다. 부인들은 너무 놀랐다. ‘이런 게 아닌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공수부대원들은 상가 빌딩 안으로 도망가는 학생들도 끝까지 추적해서 잡아왔다. 주변에서 데모를 구경하던 사람들은 겁에 질려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주위가 조용해지자 부인들은 힘없는 발걸음으로 관사로 돌아왔다. 관사에 남아 있던 임 순경은 여기저기서 발생한 부상자가 몇 백 명은 될 것이라며, 경찰은 연행된 학생들 가운데 부상자를 치료하고 밥도 먹여야 한다고 말했다.
  
밤이 되자 얼굴도 모르는 일반 시민들로부터 경찰국장 관사로 전화가 걸려왔다. “붙잡힌 학생들이 다 죽었다는데 사실이냐?”고 물었다. “죽긴 왜 죽습니까? 지금은 비상시국이니 집에 돌아가거든 아이들을 밖에 내보내지 말고 잘 간수하라”고 당부했다. 전임순 여사는 밤새도록 이런 전화를 여러 차례 받았고 차분하게 답변해 주었다. 지금까지는 학생들만 시위를 했는데 앞으로 시민들끼리 합세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19일 아침 일찍 시장에 나가 보니 상인들이 삼삼오오 모여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누군가가 “우리 아이들이 죽어 가는데 장사가 다 무엇이냐. 우리도 같이 다 들고 일어나자”고 말했다. 전임순 여사가 생각한 대로였다. 택시운전사가 도망가는 학생을 태웠다고 군인이 대검으로 그 택시운전사 허벅지를 찔렀다는 이야기를 임 순경으로부터 전해 들었다. 이에 분노한 운전기사들이 들고 일어나겠다고 했다는 것이다. 점점 불안해졌다. 시위가 걷잡을 수 없이 커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TV에서는 광주에서 일어난 일들이 유언비어라고만 보도했다. 전화 등 통신도 두절되었으니 광주에서 사태가 이렇게 돌아가고 있는 것을 상부에서는 모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직접 눈으로 보고 귀로 들은 것을 그분들께 알리고 싶었다. 사태가 커질수록 남편도 너무 힘들어 질 것 같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런데 광주시민의 분노를 폭발시킨 7공수여단의 광주투입이 ‘안병하 도경국장의 요청에 따른 것’이라는 주장이 훗날 제기돼 논란이 됐다. 1988년 국회 5·18청문회 자리에서다. ‘경찰이 군병력 투입을 요청했다’고 증언한 사람은 1980년 5월 당시 31사단 작전보좌관 임00 소령이었다.*46 그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31사단이 경찰을 통제하고 있었는데 도경상황실에서 연락관을 통해 31사단 상황실에 그런 요청이 있었고 그에 따라 7공수여단을 광주시내에 투입했다고 주장했다. 전남도경에서 경찰력만으로는 시위진압을 감당하기 어려우니 31사단 측에 군을 투입해달라는 요청을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임 소령의 이런 주장은 거짓이다. 당시 국방부는 광주청문회에 대비하기 위해 ‘511연구위원회’(이하 511위원회)라는 조직을 만들었는데 여기서 증인을 회유하여 조작해낸 것이다.*47 청문회에서 조홍규 평민당 의원은 임00 증인이 승진을 목전에 둔 상태에서 육군본부의 회유에 따라 거짓 증언을 하고 있다고 질타했다. 『전두환 회고록』에서도 ‘전남경찰국의 요청’으로 계엄군이 시위 진압 전면에 나섰다고 주장했다.
  
오전까지만 해도 시가지 시위에는 경찰력만으로 대응할 수 있었다··· 시위대가 파출소를 습격하고 순찰차를 전복 방화하는 사태로까지 악화되자 전남도경은 전남북계엄분소장인 윤흥정 전교사령관에게 계엄군의 출동을 정식으로 요청했다. 도경의 요청을 받은 윤흥정 전교사령관은 오후 2시경 정웅 31사단장에게 계엄군의 출동을 지시했고 정웅 사단장은 곧바로 전남대와 조선대에 진주해 있던 7여단 33대대와 35대대에 시위진압을 위한 병력 출동을 명령했다.*48

*46 임00, 5·18광주민주화운동진상조사특별위원회 청문회 증언록, 1989. 1. 26. 청문회에서 국방부는 5·18 당시 31사단 작전보좌관이었던 임 소령을 여당 측 증인으로 내세웠다. 임00은 여당(민정당) 이민섭 청문위원의 질의에 대답하는 방식으로 청문회 때 예민한 쟁점이 됐던 ‘공수부대 투입상황’과 ‘31사단장이 배속된 공수부대를 실제로 작전통제’했는지 여부 등 당시 31사단의 작전상황 전반에 대하여 세밀하게 증언했다. 야당(평민당) 조홍규 청문위원은 임00이 승진을 하지 못할 경우 당장 옷을 벗어야 하는 절박한 상황에서 511위원회의 회유에 따라 거짓 증언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임00은 조홍규 위원의 추궁에 대해 증언 직전 약 20일 동안 육군본부로 출근하여 증언을 준비했다는 사실을 실토했다. 511위원회가 미리 왜곡 변조해 둔 5·18 당시 31사단 전투상보나 작전일지를 바탕으로 군 당국의 각본에 따라 ‘거짓 증언’했음을 간접적으로 시인한 것이다.

*47 511위원회가 출범한 배경은 전두환 5공 정권에서 5·18을 일방적으로 ‘폭동’이라고 규정한 것과 차별화하기 위해 노태우 정부가 ‘민주화를 위한 노력’이라는 전향적인 평가를 내린 데서 비롯됐다. 광주시민의 저항이 민주화운동이라는 관점을 수용하면서도 당시 계엄군 진압작전의 정당성을 훼손하지 않기 위해 육군본부가 왜곡하거나 조작하는 방식으로 대응했던 것이다. 당시 511위원회의 왜곡활동 전반에 대해서는 5·18진상규명법‘(법률 제 15434호, 2018. 3, 13. 제정) 제3조((진상규명의 범위) 제3항에 1988년 국회 청문회를 대비하여 군 보안사와 국방부 등 관계기관들이 구성한 511연구위원회의 조직 경위와 활동사항 및 진실왜곡, 조작의혹 사건’으로 진상조사의 대상이다.

*48 전두환, 『전두환 회고록』, 1권, 391쪽, 2017.
 

“계엄군 투입 요청하지 않았다”
  
그러나 1980년 전남경찰국에서 작성한 「집단사태 발생 및 조치상황」에는 경찰이 군에 최초로 병력지원을 요청한 것은 단 두 차례였다. 그 시점은 ‘5. 19. 15:18’과 ‘5. 20. 19:49’ 두 차례다.*49 「전두환 회고록」에 기재된 것처럼 ‘5월 18일 오후 두 시경’이 아니라 계엄군의 과격한 진압작전으로 인해 시내 상황이 악화된 다음 날인 ‘19일 오후’ 경찰이 시위군중에 포위되었을 때 긴급히 7공수에게 지원을 요청했던 것이 최초다. 또한 도경에서 군에게 지원을 요청한 방법도 31사단이나 전교사에 정식으로 요청하지 않았고, 시위 현장에서 작전을 진행 중인 7공수여단 정보참모에게 직접 요청한 것이다. 31사단 작전보좌관 임00 소령이 청문회에서 ‘도경 연락관을 통해 31사단 상황실에 군 지원을 요청’했다는 내용이 조작되었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주는 대목이다. 경찰이 군의 지원을 요청한 것은 19일과 20일 단 두 차례였다는 사실은 당시 군 지원을 직접 요청했던 경찰의 증언에서 다음과 같이 확인된다.
  
19일로 기억되는데 노동청과 전대병원 사이에 우리 경력이 고립되자 공수부대에 지원을 요청하여 공수부대의 도움으로 포위망을 빠져 나왔으며, 20일 저녁 무렵 이미 시위대가 시내 전역을 장악하고 도청으로 밀려왔기 때문에 군 지원을 요청하였는데, 경찰이 군에 지원을 요청한 것은 단 두 차례이며, 지시를 받아 내가 직접 요청(했다). (이00 전남경찰국 경비계)*50
  
5·18 직후 합동수사본부 수사관이 작성한 「전남도경국장 직무유기 피의 사건」*51 조사 보고서에도 당시 안병하 도경국장이 공수부대의 투입을 요청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매우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전남도의 치안 책임자인 본명은 관할 계엄분소장에게 군 동원의 필요성을 외면한 채 단순 경찰 병력으로만 저지 가능하리라는 안일한 판단으로 사태가 악화되는 오류를 저질렀으며··· 5·17. 22:00경에는 군이 시내에 진주하여 대학과 공공건물은 군이 담당 경비한다는 기본 방침에만 의존, 구체적인 군과의 협조를 소홀히 하여 경찰 병력 배치 계획을 수립치 않았고, 5·18 계엄군 진주 시 경찰은 도로변을 담당, 11:00경부터 작전에 임하였으나 계엄군에만 의존한 소극적 작전 계획과 협조 미비로 데모 저지에 미진.

*저자 이재의
전남대 경제학과 졸업, 조선대 경영학 박사, 《광주일보》 ‘월간 예향’ 기자, 《광남일보》 논설위원.
1980년 5월 항쟁 당시 시민군으로 전남도청 상황실에서 활동, 그해 10월 체포, 1981년 5.18특사로 석방.
1985년 5?18 광주항쟁 최초 기록물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황석영 기록) 초고 작성, 2017년 전면개정판 공동 집필.
2000년 내외신 기자들의 5?18 취재기 The Gwangju Uprising(M.E, Sharpe)을 《뉴욕타임스》 특파원 헨리 스콧 스톡스(Henry Scott Stokes)와 함께 편집하여 미국에서 출판.
현재 5?18기념재단 비상임연구위원으로 활동 중.



본글주소: http://www.poweroftruth.net/m/mainView.php?kcat=2035&table=c_hojae&uid=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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