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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그들의 죽음이… 순국이었을까?
1981년 5월, 미국이 안기부를 호출했다
강진욱  | 등록:2021-05-11 11:18:51 | 최종:2021-05-11 12:38:40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그들의 죽음이… 순국이었을까?
최병효 책 <그들은 왜 순국해야 했는가> 독후기- 9

<1983 버마> 저자 강진욱

9. 1981년 5월, 미국이 안기부를 호출했다

1981년 8월 버마와 한국에서 수상한 사건들이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하기 석 달 전, 유학성 (兪學聖) 안기부장을 위시한 안기부 수뇌부가 극비리에 미국 중앙정보국(CIA)를 방문했다. 1981년 8월 버마 네 윈 정권과 남한의 전두환 정권에서 동시에 가시화된 ‘버마 공작 정황’, 그 석 달 전 유학성 안기부장의 방미. 아직까지 둘 사이의 인과관계는 드러나지 않고 있다. 그러나 박세직 수도경비사령관이 강제예편과 동시에 안기부장 특보가 됐다는 기록, 그가 ‘1983 버마 사건’과 그 전후 수상한 공작에 관여한 정황과 증언 등에 비춰볼 때 그 석 달 전 극비리에 이뤄진 안기부장의 방미는 예사롭지 않았다.

[그의 방문은 당시 케이시 CIA국장의 초청을 받고 이루어졌는데 한국 정보기관 책임자가 CIA 책임자의 초청으로 미국을 공식 방문한 것은 중앙정보부가 생긴 이래 처음 있는 일 ... 그의 방문길에는 김근수(金瑾洙 중정공채1기) 정치정보국장, 김태서(金泰瑞) 북한국장, 이상열 해외정보국장[해외공작국장] 등이 수행 ... 케이시 국장은 1981년 CIA국장에 임명되면서 카터 시절 일시 중단했던 ‘비밀공작’을 재개, 미 국방부와 국무부가 망설이는 국내외 분쟁 지역에 대담하게 파고들어 ‘CIA비밀전쟁’을 활발히 벌이고 있었다. 유 부장은 이러한 성향을 충분히 파악하고 있었으며 이번 기회에 국익을 위해 이를 적절히 활용하겠다는 생각을 가졌다. 유 부장은 먼저 막후공작 협력 채널을 만들자고 제안했다. 한국대사관의 안기부 공사 손장래(孫章來)와 미국 부통령실 안보보좌관(당시 그레그)간의 막후 대화 채널을 열어 남북고위급 회담은 물론 소련 및 중국과의 대화 중개 역할을 제의 ... 케이시 국장은 긍정적 ... 부시 부대통령을 한번 만나보라고 ... 유 부장은 CIA국장 출신인 부시 부대통령을 만나게 된다.] (「[김문 작가 칼럼] 미 CIA와 밀월관계 구축, 북방외교 시동」<미디어파인> 2019.02.08)

먼저, 위 글의 정치적 성격을 지적해야 한다. 글을 쓴 ‘작가 김문’은 <서울신문> 기자 출신으로, 김영삼 정부 시절인 1994년 1월부터 1996년 12월까지 3년 가까이 군 장성 출신자들을 인터뷰해 <서울신문> 자매 주간지 <뉴스피플>에 연재했고, 그 글들을 모아 1998년 1월 2권 짜리『장군의 비망록 - 격동의 현대사를 주도한 장군들의 이야기』(도서출판 별방)를 냈다. 위 글도 자신의 책에서 발췌한 것이다.

전두환과 노태우 등의 군 내 사조직 ‘하나회’를 손보던 김영삼 정부 시절에, 전두환과 노태우 정권을 떠받친 ‘별짜리들’의 화려한 이력을 신문에 연재한 것은 대단히 정파적이고 정략적인 행위다. 그의 글을 비판적으로 독해해야 하는 이유다.

우선, 미 CIA국장이 유학성 안기부장을 초청했다고 해 놓고 유학성이 막후공작 채널을 만들자고 제안했다고 쓰는 것은 지극히 비논리적이다. 미 CIA와 한국 정보부는 철두철미 상하 직할 관계에 놓여 있는 현실과 어긋난다. 미국이 불렀으면 미국이 무엇을 지시하거나 제안해야 맞는다. 주미한국대사관의 안기부 공사 손장래와 미국 부통령실 안보보좌관 사이의 막후 공작 채널은 미국 측이 제안한 것이고, 미국은 그 채널을 통해 남한으로 하여금 중공 및 소련과의 접촉면을 늘리고 북한을 향해 평화적인 제스처를 취하게 만들려 했던 것이다.

실제로 그런 일이 있었다. 유학성이 미국에 다녀간 뒤 손장래 주미공사가 반남친북 인사인 임창영 전 유엔대사(이승만 정권 시기)를 통해 이북에 정상회담을 할 것처럼 접근해 한동안 막후 대화가 이어졌고, 소련과 중공에도 별 시답잖은 일로 한국 밀사가 갔다. ‘북한에 의한 전두환 시해 각본’에 따라 연이어 해괴한 자작극을 벌이면서 일종의 위장 전술을 펼친 것이다.

[손장래-그레그 채널은 본격 가동되기 시작했고 또한 전 대통령과 김일성 주석간의 남북정상회담을 추진하기 위한 노력도 꾸준히 펼쳐 나갈 수 있었으며 양국 간 정보협력체제도 날로 강화 ... 유 부장은 귀국 후인 81년 10월 이러한 비밀채널을 이용한 역사적인 첫 사업으로 함병춘 [전] 주미대사[1973∼77년]를 모스크바에 파견 ... 유 부장은 81년 5월에 부시 부통령과 극비 독대를 했고 이때의 밀약에 따라 그해 10월 함병춘 주미대사를 모스크바에 밀파하게 됐다고 설명 ... 함 대사의 모스크바행은 미국의 중앙정보국, 소련의 국가보안위원회, 그리고 한국의 안기부 간의 3각 채널을 통해 007영화처럼 스릴 넘치게 진행됐다는 것이다.] (「[김문 작가 칼럼] 미 CIA와 밀월관계 구축, 북방외교 시동」<미디어파인> 2019.02.08)

레이건 정권은 그 자체로 거대한 공작 조직이었고 당시 미국은 세계 각국을 상대로 전복과 테러 및 쿠데타 등 온갖 종류의 ‘더러운 전쟁’(dirty war)에 몰두했다. 레이건 정권 시기와 겹치는 전두환 정권 시기 7년 동안 남녘 주민들을 희생양으로 삼는 자작테러가 무려 4건이나 자행된 이유다.

당시 CIA 국장 윌리엄 케이시(William Casey)는 “1981년 CIA국장에 임명되면서 카터 시절 일시 중단했던 ‘비밀공작’을 재개, 미 국방부와 국무부가 망설이는 국내외 분쟁 지역에 대담하게 파고들어 ‘CIA비밀전쟁’을 활발히 벌이고 있었다”는 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주미공사 손장래의 파트너가 된 도널드 그레그(Donald Gregg) 역시 CIA 출신으로 막후 공작에 능했다. 한일관계가 매우 민감했던 1960∼70년대 CIA 일본지부장과 한국지부장이었고, 이후 CIA 본부에서 아시아 비밀공작을 총괄하다 레이건 시기 부통령(조지 H.W. 부시)의 안보보좌관이 됐고, 부시 대통령 시기 주한미국대사로 와 한국을 주물렀다(재임 1989.9 ~1993.2). 그를 가리켜 ‘김대중을 두 번 살려준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은 똥에 박힌 콩 하나만 보는 것이다. 부시 부통령 역시 1976년부터 4년 간 CIA 국장을 지낸 공작 전문가다.

또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유학성의 방미에 동행한 이들의 면면이다. 김근수 정치정보국장, 김태서 북한국장, 이상열(李相悅) 해외공작국장. 이들은 중앙정보부 시절부터 공작정치 특히 대북공작으로 잔뼈가 굵은 이들이다. 미국이 안기부장만 부른 것이 아니라 한국 정보부 내 대북공작에 능한 자들을 모두 불렀다는 말이다. 유학성의 동행자 셋은 박정희의 중앙정보부가 사실상 해체될 때도 살아남은 이들이었다.

[80년 4월 14일.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부장서리를 겸하면서 기구 및 인원 개편 작업은 급속히 추진 ... 4월 17일 보안사의 허화평 비서실장, 허삼수 인사처장, 이학봉 대공처장 등은 부장 밑에 단일 처장 10개 부서로 기구를 축소하고 과장급 이상 전 직원에게 사표를 받는 개편 방안을 정리, 중정에 통보 ... 4월 24일에는 우선 국장급 이상 40명 가운데 33명을 부패.무능.무사안일.불충 등의 사유를 들어 잘라냈다. 살아남은 사람은 지주선(池珠善) 특보, 이동복(李東復) 남북회담사무국장, 김태서 북한국장, 현홍주 기획정보국장, 김근수 대공수사국장, 이상렬 전북지부장, 김만기 서울지부장 (등 7명) ...] (「[남산의 부장들] (133)신군부 마각을 드러내다」<동아일보> 1993.3.27)

국장급 40명 중 33명이 잘릴 때 살아남은 7명은 한반도에서의 미국의 최대 국가이익인 남북분단체제 유지 보수에 필요한 이들이었을 것이다. 남북분단체제를 유지하고 지탱하는 근간은 남한의 대북 적대감이다. 그 적대감을 극대화시키는 방법은 ‘북한에게 책임을 돌리는 사건’을 조작하는 것이었다. 이는 박정희 정권 이후 지금까지도 통용되는 역사적 사실이다. 최근의 예가 천안함 사건과 말레이시아에서의 김정남 살해 사건이다(‘김정남 사건’에 대해서는 「김정남 살해 ‘박근혜 국정원’+CIA의 소행이다!」<마로니에방송> 2020.6.21 https://www.youtube.com/watch?v=SORk4qFT-Gs 참조). 유학성과 함께 미국에 불려간  세 사람이 곧이어 시작되는 ‘1983 버마 공작’에서 어떤 역할을 했을 것이라고 보는 것은 지극히 합리적이다.

( 2006년 4월 부고 기사)

특히 이상열 해외공작국장. 1965년 일명 ‘원충연 대령 모반 사건’(반(反)박정희 쿠데타 모의)에 가담하는 척 하며 모반자들을 밀고해 당시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의 눈에 들었고, 1970년대는 주로 해외에서 활동했다 한다. 1979년 10월 6일(박정희가 김재규의 총에 맞아 죽기 20일 전) 프랑스 파리에서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이 실종(살해)됐을 때 주불(駐佛) 공사(중앙정보부 파리 거점장)였다. 자신을 아꼈던 김형욱을 파리로 유인해 살해하는데 관여했다는 의심을 받는다. 그는 유학성을 따라 미국에 다녀온 지 5개월 뒤인 1981년 10월 말 함병춘 당시 연세대 교수를 학술교류(?) 명목으로 은밀하게 소련에 보내는 일명 ‘모(스크바) 프로젝트’에 관여했다. 그 후 외교안보연구원에 들어앉았다 함병춘(1982.7 청와대 비서실장 임명) 등이 버마 아웅 산 묘소에서 몰사한 뒤 버마 대사를 3년 넘게 지내게 된다(1984.1∼1987.3). 그가 버마 공작에 관여했다고 보는 것이 무리일까? 

또 함병춘을 모스크바에 보내는 일에 관여한 당시 안기부 도쿄거점장 이상구(李常九)가 이상렬 후임 안기부 해외공작국장이 돼 ‘1983 버마 사건’ 직전 한 달 동안 버마에 가 있었다면, 유학성 안기부장의 방미의 결과물인 함병춘의 모스크바 행각이 ‘1983 버마 사건’과 관련이 있을까 없을까?

박세직 당시 안기부 2차장은 버마 사건 발생 한 달 전부터 “안기부 3국장을 현지 책임자로 파견했다”고 밝혔다.

( 박세직 책 50쪽)

( 박세직 책 51쪽)

당시 안기부 3국장이 바로 해외공작국장 이상구였다.

( 출처 「[김당의 시크릿파일] ⑧10·26 ‘반역죄인’ 중정, 조직개편.숙정 ... 최초공개 중앙정보부 마지막 간부진과 안기부 창설 간부 명단」<UPI뉴스> 2019.5.8 http://www.upinews.kr/newsView/upi201905080091)

라종일은『아웅산 테러리스트 강민철』에서 안기부 해외공작국장 이상구가 사건 발생 이틀 전에도 버마에 갔다고 썼다.

( 라종일 책 86쪽)

이상구는 박세직의 진술대로 사건 발생 한 달 전부터 버마를 오갔을 것이고 마지막으로 사건 발생 이틀 전 버마에 갔을 것이다(*‘사건 발생 이틀 전’(10월 7일)은 바로 아웅 산 묘소 천장에 크레모아 2개와 소이탄이 설치됐다는 날이다. 범인들인 어쩌면 이상구 해외공작국장과 함께 버마에 갔을 지도 모른다.) 아무튼 학술교류를 명분으로 함병춘을 모스크바에 보내는 일은 철두철미 미국의 지시와 지원 및 방조 아래 이뤄진 일이었다.

[함병춘 씨가 일본의 나리타공항에 도착한 것은 10월27일. ... 안기부 요원이 건네주는 비행기표를 소지하고 아에로플로트에 몸을 실었다. 바로 이 시각 남산의 유 부장은 안기부 동경거점장인 이상구 공사로부터 함 씨가 무사히 출국했다는 연락을 받았다. 유 부장은 다시 CIA 서울거점장인 로버트 케네디에게 전화를 걸어 함 씨가 소련으로 향했음을 알렸고 워싱턴의 손장래 공사도 케이시 국장과 부시 부통령, 그리고 앨런 안보담당특보 등에게 신속히 연락을 취했다.] (「[김문 작가 칼럼] 함병춘 ‘철의 장막’ 모스크바에 극비 밀파되다」<미디어파인> 2019.2.21)

유학성 안기부장은 함병춘을 모스크바에 보내면서 일일이 미국 측에 보고했고, 그들이 준 임무를 무사히 완수했을 때는 부시 부통령의 얼굴을 떠올렸다 한다.

[함 씨는 11월2일 임무를 마치고 파리공항에 무사히 도착했다. 공항에는 안기부 요원이 마중 나와 있었는데 비로소 ‘붉은 광장’의 두려움이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함씨는 우선 서울의 유 부장에게 전화를 걸어 “학술교류가 이루어지게 됐다”며 크렘린에서의 내용을 정리해 전했다. 유 부장은 즉시 청와대에 이같은 결과를 보고했고 워싱턴 등지에도 연락해 ‘모 프로젝트’가 무사히 끝났음을 통보했다. 그제서야 유 부장은 안도의 숨을 내쉬며 부시 부통령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가 아니었으면 일은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김문 작가 칼럼] 소련의 동북아문제 최고 권위자와 학술교류 협의」<미디어파인> 2019.2.28)

유학성 안기부장 일행의 방미는 ‘1983 버마 사건’이 단지 전두환 패거리들만의 자작극이 아니었음을 웅변한다. 실제로 ‘1983 버마 사건’은 전두환 패거리 몇몇이 수군거려 만들어낼 수 있는 사건이 아니다. 공수협잡 구도가 명백한 사건이며 1981년 8월 한국과 버마에서 ‘버마 공작’의 개시를 알리는 수상한 사건들이 동시에 벌어졌지만, 버마의 네윈 정권과 남한의 전두환 정권은 그런 일을 공모할 수 있는 사이가 아니었다.

전두환이 갑자기 이범석 외무장관에게 자신의 버마 행각을 강요했지만(1983년 5월), 버마는 남한 총리나 외무장관조차 간 적이 없는 나라였다. 둘이 뭘 짜고 말고 할 수 있는 관계가 형성돼 있지 않았다는 말이다. 그런데 중요한 시기마다 버마와 남한 양쪽에서 이 해괴한 사건이 일어나는데 필요하고도 충분한 조건이 마련된 것은 버마와 남한을 동시에 움직이는 ‘제3의 손’이 있었다는 말이다. 그 ‘제3의 손’은 전두환 정권과 네 윈 정권을 손아귀에 쥐고 흔들 수 있는 미국 정부 또는 미국 정부와 긴밀하게 연결된 다른 나라 정보조직 외 다른 것
일 수 없다.

P.S.

안기부가 함병춘을 모스크바에 보내기 전과 후 그의 인지도를 높이는 일련의 작업이 있었다. 박정희 정권 말년에 대통령 정치담당특별보좌관을 지내다 10.26과 12.12로 물러난 그는 1980년 8월 1일 외교안보연구원 연구위원이 되고, 다시 1년 뒤인 1981년 8월 1일 연세대 교수로 채용된다. 연세대가 그를 정법대학 교수로 신규 채용하겠다고 발표한 때가 공교롭게도 한국과 버마에서 동시에 수상한 일들이 연발하는 1981년 8월(1일)이었다는 점도 흥미롭다. 연세대가 그의 교수 채용을 발표하기 하루 전인 7월 30일 <조선일보>가 1면에 함병춘을 ‘아침논단’ 필진으로 기용한다는 사고(社告)를 낸 것은 더 흥미롭다. 그는 자신의 출세가도가 다시 열린 줄 알았을 것이다.

( 조선일보 1981.7.30 / ‘사고’(社告) 타이틀 바로 옆에 함병춘의 사진을 게재했다.)

실제로 함병춘은 연세대 교수 채용 한 달 만인 1981년 9월 2일「치러야 할 대가」라는 제목의 <조선일보> ‘아침논단’ 칼럼을 통해 자신의 재출세를 공지했다. 영국 강성 노조가 나라를 망치고 있다는 투의 당시 세평대로 ‘영국병’을 질타하는 내용이었다. 큰 지면에 비해 내용은 그저 그랬다. 3주 뒤인 그 해 9월 21∼23일에는 육군사관학교가 창군 33주년을 맞아 주최한 ‘군대와 국가발전’이라는 주제의 제1회 화랑대 국제학술심포지엄에서 ‘한국군과 국가발전’이란 주제로 강연했다. 도하 각 신문들이 그의 강연을 예고하는 기사를 실었고, 주제 발표 당일에는 다시 큰 지면을 할애했다. 법철학 교수가 군사 정권을 찬양하고 싶었을까?

(사진 좌 : 조선일보 1981.9.2 / 사진 우 : 조선일보 1981.9.22)

다시 열흘 뒤인 10월 2일에는 흥사단이 그를 초청해 ‘한국 외교의 진로’라는 제목으로 제959차 ‘금요강좌’를 열었고, 10월 13일 자 <조선일보>에 또 그의 칼럼이 큼지막하게 실렸다. 이번에는 해양생태학자가 쓸법한 글이었다. 제목은 ‘바다를 향해 뻗어가자’. “더 잘 살려면 바다 밑 보고를 잘 활용하자.”

(사진 좌 : 조선일보 1981.10.13 / 사진 우 조선일보 1981.12.11)

10월 22일 저녁에는 고려대 경영대학원 제19기 동우회가 서울 앰배서더호텔에서 연 추계 세미나에서 ‘최근 국제정세와 한반도’를 주제로 강연했고, 10월 25일에는 ‘민족분단과 올림픽’이라는 제목으로 ‘아침논단’을 썼다. 9월 30일 ‘바덴바덴의 낭보’(88올림픽 서울 개최 결정)에 대한 북한의 반응을 성토하는 내용이었다. “북한의 (올림픽)위원이 나고야에 표를 던졌다”고도 했다. 모스크바 잠행 직전에는 이동복 남북대화사무국 대변인 등과 함께 문화공보부가 주최한 ‘한-아세안 언론인 세미나’에서 연사로 참석했고, 모스크바에 다녀온 뒤에는 ‘잘 하기 어려운 한국어’라는 제목으로 <조선일보> ‘아침논단’을 썼다. 국어학자들이 괄목할 글이었다. 

함 씨가 이처럼 자신의 전공인 법학이나 외교와 무관한 주제로 분주하게 글을 쓴 것은 그에게 ‘한국을 대표하는 학자’로서의 이미지를 부여했을 것이다. 그렇게 인지도를 높인 뒤 안기부 밀사(?)가 돼 학술 교류 명목으로 소련에 다녀온 지 7개월 만인 1982년 7월 이범석 후임으로 청와대 비서실장이 됐고, 다시 1년 3개월 뒤 이범석과 함께 버마 아웅 산 묘소에서 억울한 죽음을 맞이한다.

1982년 6월 2일 노신영 외무장관에게 안기부장 자리를 내 주고 물러났던 유학성은 어느 새 한국반공연맹 이사장이 돼 있었고, ‘버마 사건’ 나흘 뒤 서울 여의도광장 궐기대회를 열고 그럴듯한 대회사를 낭독했다. “아무리 악랄한 북괴 도당이라 하더라도 동족의 피가 한 방울이라도 섞여 있다면 이같은 전대미문의 살육을 저지를 수 있겠는가 ... ”(<동아일보> 1983.10.13)

( 궐기대회 동아일보 1983.10.13)

(10편으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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