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회원가입 | CMS후원
2021.05.12 20:40
종합  |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  세계  |  미디어  |  칼럼  |  서팡게시판  |  여행게시판
 
뉴스홈 > 정치

[연재] 한홍구TV, 거짓과 진실, 그리고 헛소리 26
허수아비 교통부장관 차규헌
강진욱  | 등록:2021-03-08 15:21:21 | 최종:2021-03-08 15:25:26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한홍구TV, 거짓과 진실, 그리고 헛소리 26
- 11월 26일 방송 ‘KAL 858기 폭파사건’에 대하여

강진욱 <1983 버마> 저자

26. 허수아비 교통부장관 차규헌

앞글 몇 편을 통해 KAL 858편 여객기 폭파 공작을 자행한 세력이 조직적으로 사고기의 잔해 수색을 방해한 사실을 확인했다.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진 이유 중 하나는 당시 정부 조직이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특히 이 사건의 주무 부서인 교통부는 시종일관 무능했고 비굴했다. 사고 직후 교통부는 김창갑(金昌甲) 차관을 본부장으로 하는 항공사고수습대책본부를 꾸렸지만 이 본부가 한 일은 KAL 858편 여객기의 최종 교신 지점을 조작하는 일이었다.

[교통부는 29일 하오 ... 항공사고수습대책본부(본부장. 김창갑 교통부 차관)를 구성, 사고 여객기 실종 지점 인접 국가인 버마 태국 방글라데시 등 3개국 항공관제소에 실종 KAL기의 수색과 구조를 요청 ... 항공기의 마지막 교신은 29일 하오 2기 1분(한국시간) 랑군항공관제소에 대한 위치 보고 ... 교통부가 확인한 랑군항공관제소에 녹음된 ... 마지막 교신은 “KAL 858기 14시22분, 토비이[타보이] 통과 예정”이 전부 ... ](「태국.버마 등에 수색.협조 요청」<경향신문> 1987.11.30)

앞글(23편)에서 위 교통부 사고수습대책본부는 실제 최종 교신 지점인 ‘톨리스(TOLIS)’를 발설하지 않았지만, ‘타보이(TAVOY) 통과 예정’이라는 말은 사고기가 톨리스에서 동쪽으로 30km나 더 가야 나오는 어디스(URDIS)를 통과한 것같은 뉘앙스라고 지적했다. ‘어디스’를 통과한 것처럼 속였다는 말이다.

왜 이렇게 됐을까. 전두환네 패거리와 그 ‘상부’는(전두환 패거리 뒤에는 늘 ‘상부’가 있다)는 이 사건을 기획하면서부터 교통부의 의사 결정 체계를 망가뜨렸을 것이다. 항공 사고를 조사할 책임과 권한을 갖고 있는 교통부가 제 권한을 갖고 제 역할을 하게 놔둬서는 KAL 858 공작이 성공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미 전두환 정권은 정상적인 정부 조직이 아니었다. ‘군바리’들이 요소요소 박혀 정부 조직의 의사 결정에 개입하고 있었다. 사건 당시 교통부장관도 육군 대장 출신이었다. 육사 11기인 전두환 보다 3기수 위인 8기 차규헌(車圭憲). 그의 말년은 전두환 정권 7년 동안 자행된 네 건의 자작테러와 궤를 같이했다. 그의 이력을 살펴봤다. 

( 차규헌 수도군단장 시절)

김종필과 김형욱, 윤필용, 강창성 등과 동기인 차규헌은 5.16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가 군복 대신 양복을 입고 대통령이 되는(이를 ‘민정 이양’이라 했다) 선거 때 육군방첩대(CIC) 정보처장(대령)이었다. 10.26 때 육군참모총장(계엄사령관)이 됐다 전두환에게 당하는 정승화가 방첩대(CIC) 대장일 때였다. 이들 육군방첩대가 부정선거를 모의했다는 주장이 제기됐었다.

[부정선거 지령은 지난 4일 춘천의 제2군단방첩대와 6일의 대전지구방첩대에서 전국의 방첩대장 41명을 모아 놓고 연 2차에 걸친 회의석상에서 정승화 방첩대장과 차규헌 정보처장에 의해서 내려졌다고 ...](「“군의 부재자투표 미끼로 부정선거 기도”」<동아일보> 1963.11.21)

육군방첩대(CIC)는 이승만 정권 때부터 박정희 정권을 거쳐 전두환 정권과 노태우 정권에 이르기까지 이 땅 남녘에 군사독재의 뿌리를 내린 조직이다. 이들에게 독재자의 정권 연장을 위한 부정선거는 차라리 ‘껌’이었다. 방첩대의 주특기는 ‘내수 공작’(테러). ‘이승만의 개’였다 부하의 손에 사살된(1956) 김창룡이 특무대장일 때부터 시작된 수많은 간첩 조작과 빨갱이몰이, 그 과정에서 빚어진 숱한 테러가 없었다면 이 땅 남녘이 반세기 넘게(어쩌면 지금도) 사상과 사유의 자유마저 박탈당한 극우꼴통국가로 전락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1964년 한일회담 반대 시위가 연일 계속될 때 그 부대원들이 법원과 <동아일보>에 난입한 사건, 1965년 ‘CIC 특공대장’ 이진삼(李鎭三) 중위(훗날 육군참모총장. 체육부장관. 자유선진당 의원)의 부대가 <동아방송>과 <동아일보> 간부들의 집에 폭발물을 투척하고 정치인들을 두들겨 팬 사건 등등, ‘내수공작’은 1980년대 후반까지 공공연하게 계속됐다.

이런 방첩대에서 잔뼈가 굵은 차규헌은 1966년 11월 준장으로 진급하면서 제1공수단장이 되고, 얼마 뒤 육군본부 인사참모부 장교보직처장을 거쳐 1969년 2월 파월 비둘기부대장이 된다. 아마도 이즈음부터 전두환과 인연을 맺었는지도 모른다. 전두환은 1960년 공수특전단 대위로 미국 군사유학을 다녀온 뒤에도 공수단에 속해 있었고, 1971년 11월까지 1년 간 백마부대 29연대장으로 월남에 갔다 돌아온 뒤 1공수특전여단장이 됐다.

차 씨는 1969년 1970년 3월 비둘기부대장 임무를 마치고 돌아와 소장으로 진급했고, 1974년 1월 박정희가 긴급조치 2호 발령으로 급조된 비상고등군법회의 심판관들 중 한 명으로 임명된다(이때 재판장은 이세호 대장, 심판관은 차 씨 외 윤성민 소장(후에 국방장관)등이 있다). 이어 1975년 2월 수도경비사령관, 1978년 10월 육군 수도군단장에 임명됐다. 이때 10.26 사태를 맞이했고, 한 달여 뒤 전두환 패거리의 12.12 쿠데타를 도왔다. 그의 수도군단과 황영시(‘비정규 육사’ 10기)의 1군단의 호응이 쿠데타 성공을 뒷받침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아마도 전두환 쿠데타의 성공에 꼭 필요한 자리에 이 둘을 보냈다고 봐야 할 것이다.

( 12.12 쿠데타 직후 서울 종로구 소격동 국군보안사(현 현대사박물관) 앞뜰에서 찍은 기념사진. 전두환(앞줄 왼쪽에서 다섯 번째) 좌우에 차규헌(유일하게 팔짱 낀 이)과 노태우가 있다.)

이 사진에서도 유추할 수 있고, 또 전두환 정권을 노태우에게 넘기는 과정에서도 확인되는 것이 바로 ‘좌규헌 우태우 체제’다. 차규헌은 전두환 정권의 실세가 아니었고 전두환이 나름 ‘선배 대우’를 해 줄 뿐이었지만 이 없는 듯 있는 듯 한 체제는 노태우 정권이 출범할 때까지 8년 동안 유효했다. 그 후 차규헌은 1979년 12월부터 1980년 7월까지 육군사관학교 교장으로 있다 황영시 후임으로 육군참모차장에 임명된다. 차규헌의 후임 육사 교장이 전두환의 육사 11기 동기인 김복동이었다. 이렇게 전두환네 육사 11기와 늘 함께하던 차규헌은 또 1981년 7월 노태우와 함께 대장에 진급한다. ‘비정규 육사’ 8기인 그와 전두환의 동기이자 절친인 육사 11기 노태우(수경사령관)가 동시에 별 넷을 단다는 것은 매우 이례적이다. 전두환 또는 그 누군가가 차규헌을 많이 챙겼다는 얘기다. 또 전두환 정권이 노태우 정권으로 넘어가는데 차규헌이 나름 역할을 했음을 시사한다.

( 1981.7.11 매일경제신문 / 대장 진급)

노태우는 별을 단 이후 곧바로 전역해 ‘정무 2장관’이 되고, 차규헌은 1년 6개월이 지난 1983년 1월 전역하고 그로부터 두 달 뒤인 1983년 3월 국가안전보장회의 상근 위원 겸 비상기획위원회 위원장(장관급)에 임명된다. 육사 3기 후배인 노태우와 함께 별을 단 차규헌이 전역 후 비상기획위원장이 것은 노태우가 전역과 동시에 정무2장관으로 임명돼 전두환의 후계자로 키워진 것 만큼이나 의미심장한 일이다. 

( 1983.3.11 동아일보 / 전두환에 인사하는 차규헌)

국가안전보장회의 비상기획위원장이라는 자리는 박정희 정권 시절 민방위법에 근거해 설치됐지만 실제로는 전두환 정권 창출과 안착을 위해 쓰였다. 최규하가 대통령직에서 쫓겨난(1980년 8월 6일 하야성명 발표) 직후인 1980년 9월 조문환(曺文煥) 당시 국방차관(육사 7기. 특수전사령관, 국방대학원장. 중장 예편)이 비상기획위원장에 임명됐으나 그의 역할은 유명무실했다.

그러다 그의 후임으로 차규헌이 임명되면서 이 자리가 빛을(?) 발하기 시작한다. 앞에서 언급한 ‘좌규헌 우태우’ 체제가 이때부터 실질적으로 가동됐다고 볼 수 있다. 그 목적은 조만간 시작될 자작 테러(1983년 대구 미 문화원 앞 폭탄 테러(9.22)와 버마 아웅 산 묘소 테러(10.9), 1986년 9월 14일 김포공항 테러, 1987년 KAL 858편 테러) 기간 내내 ‘국가비상사태’ 분위기를 조장하는 것이었다. 그 막중한(?) 자리에 차규헌을 앉힌 것이다.

차규헌이 비상기획위원장에 임명된 지 한 달여 만인 1983년 4월 27일 오후 3시 업무계획을 보고하는 자리에서 전통(全統)은 예의 ‘북괴의 남침’을 떠벌렸다. 그는 “앞으로 전쟁이 일어날 경우 피아의 무기 체계가 대단히 고도화되어 있으므로 상황 전개는 6.25 때와는 많이 다를 것”이라며 “전쟁은 군과 경찰만이 하는 것이 아니므로 사태 발생 시 가용한 모든 인적. 물적 자원을 효율적으로 동원할 수 있는 방안을 강구하라”고 지시했다(<조선일보> 1983.4.27). 이때 이처럼 전시동원태세 비슷한 분위기를 조장할 이유는 없었다. 그것은 오로지 자신들이 곧 벌일 자작 테러 쇼의 필요성 때문이었다.

두 달여 뒤인 7월 12일 오전 과천 정부제2청사에서 차규헌 주재로 열린 각 부처 비상기획관 및 시도 민방위국장회의도 비슷했다. 이 회의는 “북괴의 침략 의도를 봉쇄할 전쟁 억지력의 확보가 최우선 선결 과제라는데 의견을 모으고 정부는 적의 침략에 대비, 국가의 모든 인적 물적 자원을 효율적으로 동원할 수 있는 대비 태세를 정비 보완, 효과적인 군사작전 지원책을 보강”하는 것이 목적이었다(<동아일보> 1983.7.12). 1983년 7월에 ‘북괴의 침략’ 운운하면서 ‘국가의 인적.물적 자원의 효율적인 동원’과 ‘효과적인 군사작전 지원책을 보강’할 이유는 없었다. 그것은 아마도 ‘버마 작전’ 개시를 위한 모종의 움직임이 아니었을까. 이틀 뒤 전통(全統)이 또 의미심장한 말을 했다.

[7월 14일 청와대의 상춘재[常春齋]에서 법무부 및 검찰 간부 34명이 모인 가운데 ... 전 대통령은 “금년도와 미국에서 대통령 선거가 있는 내년도가 매우 위험하다. 북한이 도발해도 미국이 강경한 대처를 하기 어렵다는 것을 김일성이 잘 알고 있을 것이다”며 안보 강화를 강조 ... 전 대통령의 우려가 현실화되어, 몇 달 후인 10월 9일에 버마(현 미얀마)에서 아웅산 폭탄 테러가 있었다.](박철언『바른 역사를 위한 증언-1』108쪽)

전통이 ‘북한이 도발할 거야’라고 예언한대로 북한이 도발했다는, 참으로 웃기는 이야기다. 차규헌은 이후에도 계속 국가안전보장회의 상근 위원 겸 비상기획위원회 위원장 자리를 유지했다. 1984년(2월 29일)과 1985년(3월 20일)에도 청와대에서 업무계획을 보고했지만 앞에서 본 전시동원 분위기 조장 등 수상한 움직임은 없었다. 그것은 이 두 해에는 ‘별 일’(전두환 정권의 자작테러)이 없는 해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면 그 ‘별 일’이 일어나는 1986년에는 그런 수상한 움직임이 있었을 것이다. 실제로 그랬다. 이 해 5월 9일 차규헌은 정부기관.기업체.협회.단체의 비상계획관 등 1천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전국 비상계획관 회의를 열어 ‘전시 대비 업무’를 분석하고 앞으로의 업무 추진 방향 등을 검토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경향신문> 1986.5.9). 또 그 ‘전시 대비’였다. 1983년의 ‘버마 사건’ 비슷한 일이 일어날 조짐이었다.

차규헌이 난데없이 ‘전시 대비 업무’ 운운한 지 두 달 뒤인 1986년 7월 13일 일요일, 전통(全統)이 갑자기 김포공항에 나타나 던지고 간 말은 더 수상했다. 그는 윤일균(尹鎰均) 공항관리공단이사장을 만나 “아주대회[86 아시안게임]를 성공적으로 치르고 나면 외국 관광객이 크게 늘어날 것”이라며, 특히 안전 문제와 관련 “공항의 각종 감시 기구를 최신화해서 출입국자들의 소지품 등 화물 검색에 완벽을 기하도록 하라”고 당부했다(<매일경제신문> 1986.7.14)

( 1986.7.14 매일경제신문)

이로부터 한 달여 뒤인 1986년 8월, 장장 3년 5개월 동안 비상기획위원장 자리를 지키던 차규헌은 8.26 개각 때 교통부장관에 임명된다. 앞서 지적했듯이 차규헌은 전두환 정권의 실세가 아니었다. 그를 교통부장관에 임명한 것은 어떤 중요한 일을 해야 할 자리에 허수아비를 앉힌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차규헌이 교통부장관에 임명되기 전 교통부는 이미 김포공항의 보안관리 업무에서 배제됐고, 그 업무는 전두환이 갑자기 김포공항에 나타나 만나고 간 윤일균 공항관리공단 이사장의 손에 넘어가 있었다.

아니나다를까 차규헌이 교통부장관이 된 지 20일 뒤인 9월 14일 김포공항 국제선청사 현관 앞에서 폭탄이 터진다. 또 ‘예견된 북괴의 테러’였다.

( 1986.9.15 경향신문 / 전두환 시절 일어난 끔찍한 테러 사건들은 이처럼 전두환네나 미국 측 모 인사가 뭐라뭐라 예언하면 북측(북한)이 그 예언에 딱 맞는 테러를 저질렀다는 얼토당토않은 해설이 붙는다. 전두환 패거리와 이 패거리를 싸고도는 세력이 저지른 자작극을 북한의 소행으로 몰려다 보니 비논리적이고 부자연스러운 결론을 강요하고 세뇌해야 했던 것이다.)

차규헌이 ‘전시 대비’ 운운하고 두 달 뒤 전두환이 김포공항에 나타나 ‘검색 강화’를 당부할 때 모종의 작전이 시작됐을 것이다. 아마도 그즈음 보안사 등 군 내 특수조직이 공항을 장악해 김포공항 운영 체계를 비정상으로 만들었을 것이다. 그러지 않았더라면 그야말로 ‘철통같은’ 경비망 속에서 김포공항 국제선 청사 외곽 쓰레기통에 폭발물이 설치되는 일은 일어날 수 없다(김포공항 테러에 대해서는 5편 참조)!

전두환이 7월 1일 일요일 김포공항에서 만난 공항관리공단 이사장 윤일균도 수상한 이력의 소유자다. 한국현대사에 관심이 있는 독자들이라면 그의 이름이 낯설지 않을 것이다.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이 미국으로 도망가 박정희 정권의 치부를 고발할 때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김형욱을 달래기 위해 보낸(1977년) 밀사였고, 박정희가 김재규의 총에 맞아 죽었을 때는 중앙정보부 1차장으로 ‘부장 직무대리’로 있다 전두환에게 중정을 내주고 물러난 이다.

국제공항관리공단 설립 이야기가 나온 때는 박정희 서거 직후, 윤일균이 중정 부장 직무대리를 할 때였다. 1979년 11월 13일 국무회의가 국제공항관리공단법안을 의결했다. 이 법안에 의하면 공단은 공항의 여객청사와 화물청사, 활주로 및 항공 보안시설 등의 관리.운영 밍 유지.보수 등의 사업을 행하도록 돼 있다(「국무회의, 국제공항관리공단 설립 의결」<동아일보> 1979.11.14).

윤일균은 전두환이 중정 부장서리가(1980.4) 된 뒤 중정 차장직에서 물러나 곧바로 국제공항관리공단 이사장이 됐고(1980.5.30) 연임(1983년)과 3연임을 했다(1986년 5월). 그러다 넉 달 뒤 김포공항테러가 터지자 ‘허수아비 장관’ 차규헌에게 사표를 냈다. 공항의 관리.운영권은 사실상 자신이 갖고 있었으면서, 아무 실권이 없는 명목상의 상관인 장관에게 사표를 냈을 뿐이다. 윤일균의 연임과 3연임은 이 테러 사건을 기획하고 실행하기 위한 것이었고, 사건을 벌인 뒤 곧바로 말뿐인 ‘책임’을 지고 물러났다는 의심을 지울 수 없다.

( 1986.9.16 조선일보 / 사진 설명 : “전두환 대통령이 15일 새벽 김포공항의 폭발사건 현장을 살펴본 뒤 청사 외곽 경비를 철저히 하라고 지시하고 있다.” 웃기는 얘기다. 청사 내부 경비만 해서 청사 현관문 앞 쓰레기통에 폭탄이 설치되는 것을 몰랐다는 말인가? 사진 왼쪽 반쯤 보이는 이가 차규헌. 사진 우측 끝에 검은 넥타이를 맨 이가 윤일균.)

( 1988.3.25 조선일보 / 윤일균(사진 오른쪽) 국제공항관리공단 이사장은 김포공항테러 사건 직후 사표를 냈다지만, 그로부터 1년 반이 지난 1988년 3월 전두환의 동생 전경환이 해외여행에서 돌아올 때도 공항에 나와 그를 수행했다.)

차규헌은 이처럼 김포공항 테러 사건 발생 20일 전 교통부장관에 임명돼 전두환네의 자작테러가 일어나는 것을 그냥 보고만 있어야 했다. 그것이 다가 아니었다. 그에게는 또 하나의 사건을 은폐해야 하는 막중한 임무가 주어져 있었다. 바로 KAL 858편 여객기 자작테러였다. 사건 당시 교통부가 얼마나 한심한 지경이었는지는 이미 살펴봤지만, 그 사실을 가장 잘 아는 이들은 바로 유족들이다.

KAL 858편 여객기를 몬 기장(박명규. 당시 53세)의 부인으로 최근까지 유족회 회장이었던 차옥정 씨는 <오마이뉴스>와의 인터뷰에서 당시 “교통부 차관에게 수색현장 자료라도 보여 달라고 사정을 했더니 오히려 ‘제발 보여 달라고는 하지 말라’고 나에게 빌더라”고 말했다(「“115명 죽은 사고에 사진 한 장 없을 수 있나?”」<오마이뉴스> 2003.10.23). 차 씨가 기억하는 교통부 차관은 바로 KAL 858편 여객기의 최종 교신 지점을 오도한 이였다.

[교통부는 29일 하오 ... 항공사고수습대책본부(본부장. 김창갑 교통부 차관)를 구성 ... 교통부가 확인한 ... 마지막 교신은 “KAL 858기 14시22분, 토비이[타보이.TAVOY] 통과 예정”이 전부 ... ]<경향신문> 1987.11.30)

차규헌의 교통부가 한 일이 또 있었다. 바로 자료를 복사하는 일이었다. 당시 교통부 항공과에 근무했던 최OO국장은 2005년 11월 8일 정청래의원실이 주최한 국회토론회에 토론자로 나와 “저는 복사기와 팩스만 돌렸습니다. 저희들이 실제로 할 일은 없었지요.”라고 증언했다(신성국 신부 글「KAL 858기 사건 30주기 ③전두환의 무지개 공작, 사고 조사는 없었다」<진실의 길> 2017.10.9). 이 토론회를 주관한 신 신부는 “항공기와 철도 사고의 주무부처는 교통부”였음에도 불구하고 “정부 합동조사단에 국토부(교통부) 직원은 단 한 명도 포함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교통부는 이처럼 사건 조사에서 완전히 배제됐을 뿐만 아니라, 불법적으로 희생자들에 대한 집단 사망신고까지 해야 했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사건을 하루빨리 마무리하고 그 내막을 덮으려던 안기부의 사후 공작에서 교통부는 그저 꼭두각시였다.

[더 어이가 없었던 것은 유품 하나 발견되지 않은 탑승객들을 정부는 사고 3개월 만에 전원 사망신고를 했던 것. 차[옥정 유족회] 회장은 아들의 취직 관계로 호적 초본을 뗐다가 가족들도 모르게 남편의 사망신고가 돼 있던 걸 보고 아연실색했다. “항공, 선박사고의 경우 시신이 발견되지 않으면 1년이 지나서야 사망으로 간주하는데 정부는 3개월 만에 일괄적으로 사망신고를 했습니다. 어떻게 아무런 증거도, 확신도 없는 상태에서 가족들도 모르게 사망신고를 할 수가 있습니까.”](<오마이뉴스> 2003.10.23)

대한항공도 꼭두각시이기는 마찬가지였다. UPI와 AP등 미국 통신사들이 돌아가면서 ‘칸차나부리 경찰’을 소스로 내세워 계속 거짓 정보를 유포하는 동안 대한항공 측도 계속 잘못된 정보를 흘렸다는 사실을 전편 글에서 살펴봤다.

[한편 이근수(李根秀) 대한항공 사고대책본부장도 30일 오후 2시 13분 경 대책본부 3층 가족대기실에서 실종된 KE858편기는 방콕 서북서쪽 128km 지점에서 추락한 사실을 태국 내무성을 통해 확인했다고 ... 잔해가 발견됨에 따라 방콕에 도착해 있는 조중훈(趙重勳) 대한항공 회장이 사고 현장으로 떠났다고 밝혔다.](<동아일보> 1987.11.30)

그런데 대한항공사고대책본부장 이근수도 공군 장성 출신이었다. 당시 대한항공의 이사 30명 중 10명이 공군 출신이었다. 이근수는 1978 KAL 동경지점 상무, 1981년 일본 지역본부장, 1982년 대한항공 상무, 1985년 대한항공 전무 자리에 올랐고, 1987년 4월부터는 한진해운 부사장을 겸했다. 이 본부장은 이후 유족 보상금 협의까지 마무리한 뒤 1988년 대한항공 부사장 겸 한진해운 사장으로 영전한다.

KAL 858편 여객기 사건 사후 처리와 관련해 교통부와 대한항공 내에 군 또는 정보계 출신들이 좌지우지했다는 사실은 이 사건의 내막이 지금까지도 밝혀지지 않고 있는 것과 결코 무관할 수 없다. 이 대목에서 앞에 쓴 글(19편)을 상기한다.

1983년 KAL 007기 격추 사건을 정밀 분석한 미국 예일대 사회학과의 데이비드 피어슨 박사는『KAL 007 - The  Cover-Up : Why The True Story Has Not Been Told』(KAL 007 - 은폐 : 왜 진실을 말하지 않는가)라는 책에서 “KAL은 한국의 중앙정보부(KCIA) 자산이었다”며 “조 씨 형제(조중훈.조중건)는 KAL을 박정희 정권으로부터 인수한 후 기업과 정치권, 정보 조직 및 군부가 얽혀 있는 권력구조의 한 축이 됐다”고 썼다. 또 “KAL은 이 ‘권력구조’가 하는 모든 일에 흔쾌히 따라 나섰고 KCIA의 수족처럼 움직였다”고 지적했다.

대한항공(KAL)이 독재권력 구조의 한 축이었으며 이 권력이 행하는 공작에 흔쾌히 따라 나선 대표적 사례가 바로 KAL 858 사건이고 1983년 9월 1일 KAL 007기가 소련 캄차카 반도에 들어갔다 소련 공군기가 쏜 미사일을 맞고 공중 폭파된 사건이다.
1983년 KAL 007기 격추 사건의 내막을 다룬 피어슨 박사의 책이 나온 1987년 KAL에게는 운명과도 같은 사건이 또 벌어진 것은 어쩌면 필연이었다. 

P.S.

위에서 ‘좌규헌 우태우 체제’가 은밀하게 작동하는 가운데 버마 자작 테러(1983.10.9)와 KAL 858 공작이 성공을 거두고 노태우 정권 창출로 이어졌다고 밝혔다. 이렇게 장기간에 걸쳐 매우 치밀하고 정교하게 짜인 자작테러 및 그 테러와 병행한 정권 연장 공작이 전두환 패거리의 머릿속에서 나왔을 리 없다. 이런 구상 및 그 실행은 전두환 일당의 5.18 만행을 방조하며 그의 정권을 만들고 지탱한 자들의 머리에서나 나올 수 있다.

이들이 저지른 장기 자작테러 공작의 전형이 바로 2001년 9.11 사건이다. 이 ‘9.11 공작’은 최소 10년에 걸쳐 고도화되고 정교화되는 과정을 거쳐 완성됐다. 미국의 전쟁 모리배들은 1991년 구 소련이 해체돼 ‘주적’이 사라지자 곧바로 ‘그린 페릴’(green peril, 초록빛 위험. 초록은 무슬림의 색이다)이라는 이름으로 ‘이슬람 테러(리즘)’을 형상화하기 시작했다.

1992년 ‘포린 어페어스’ 논문으로 초안을 잡고 1993년 책으로 엮은 새뮤엘 헌팅턴(Samuel Huntington) 의 ‘문명충돌론’은 이슬람권(중동)과 유교권(중국.북한)을 두 적진(敵陣)으로 규정하는 미 군산복합체의 새로운 세계지배전략이었다(1994년 영변 핵 폭격론도 중동과 극동에서의 두 개 전쟁 구상의 일환이었는지도 모른다). 이 구상이 무르익기 전, 머잖아 9.11 테러로 완성될 사건의 초기 구상 격인 사건이 일어난다.

클린턴행정부 출범 직후인 1993년 2월 26일, 세계무역센터(WTC) 지하에서 폭탄을 실은 밴을 터뜨린 뒤 “아랍 테러리스트의 공격이 시작됐다”고 떠벌렸다. 뜬금없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이들은 많지 않았지만 저들은 새로운 전쟁 구상을 차근차근 실행에 옮겼다.

1990년대 중후반 사우디아라비아(1995년과 1996년 호바르 미군기지 등 테러)와 아프리카(1998년 8월 케냐.탄자니아 미 대사관 동시 테러) 및 중동(2000년 예멘 아덴항 미 군함 폭탄테러)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자작테러가 그것이었다. 저들은 이들 사건 모두를 ‘오사마 빈 라덴의 국제테러’라고 선전했지만 모두 자작극이었다. 2001년 9월 11일 세계무역센터(WTC) 쌍둥이 건물을 ‘컨트롤드 데몰리션’(Controlled Demolition, 초고층빌딩 재건축 공법)으로 무너뜨린 것은 장기간에 걸친 연속 자작테러극의 총결산이자 완성작이었다. 저들이 이처럼 장기간에 걸친 끔찍한 자해(自害)공작을 실행에 옮길 수 있었던 것은 1980년대 전두환 정권을 주무르며 두 차례 연속 자작테러에 성공한데 따른 자신감과 환희 때문이 아니었을까. (27편으로 계속)



본글주소: http://www.poweroftruth.net/m/mainView.php?uid=5107&table=byple_news 









    




모바일 기기에서도 댓글 작성이 가능하도록 보완하였습니다. (현재 아이폰 기기까지 테스트 완료하였습니다.)


닉네임  비밀번호  205704  (스팸등록방지:빨간숫자만입력)

58180 [오영수 시] 중국에 고함
52181 KBS <역사저널 그날>의 ‘역...
50414 [연재] 한홍구TV, 거짓과 진실, 그...
41956 [연재] 한홍구TV, 거짓과 진실, 그...
36435 백기완 선생의 추억
34303 부동산 투기대책에 등장한 ‘친일...
34298 [연재] 한홍구TV, 거짓과 진실, 그...
23918 생태계와 인간을 계속 좀먹은 농약
23259 악당들의 수익모델
21252 ‘도로보’들
                                                 
民草가 주인인 中原, 제3지대를 위...
                                                 
[연재] 홍콩의 벤처이야기 “홍콩...
                                                 
가난은 개인만의 잘못이 아닙니다
                                                 
김사복, 5.18 진상을 세상에 알리...
                                                 
왜 당신은 계란을 바위에 던지시나...
                                                 
공기업 적자, 정치인-자본-관료의 ...
                                                 
블링컨 “미국 대북정책 중심은 외...
                                                 
2021년 인류 사회의 과제
                                                 
[신상철TV] 정치현안이슈 2
                                                 
청소노동자의 외침 “차별받아도 ...
                                                 
정당지지도, 민주당·국민의힘 각 ...
                                                 
송영길, 청와대 친문과의 갈등…? ...
                                                 
천안함의 진실을 지킨 사람들과 박...
                                                 
부동산 투기대책에 등장한 ‘친일...
                                                 
돈으로 김어준을 쫓아내고 싶다고?
                                                 
[이정랑의 고전소통] 人物論 良臣...
                                                 
전두환 비서출신 이용섭 사건 재정...
                                                 
“귀환” KAL858기 사건 33주기 추...
                                                 
안병하 공직자 바로 세우기 운동본...
                                                 
[오영수 시] 중국에 고함

서울시 영등포구 국회대로 800 여의도파라곤 930호 (주)민진미디어 | 발행.편집인:신상철 | 청소년보호정책책임자:마기선 | 등록번호: 서울 아01961
등록일 2012.02.02 | 발행일: 2012.02.15 | 이메일: poweroftruth@daum.net | 사업자번호: 107-87-60009 | 대표전화: 02-761-1678 | 팩스: 02-6442-0472
회사소개 | 이용약관 | 개인정보취급방침 | 청소년보호방침 | 광고/사업제휴문의 | 기사제보 | 칼럼쓰기